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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Jul 15. 2018

전체의 바깥과 오늘의 감각

― 이원의 시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가. 

전체의 내부에서 시작할 것인가. 전체의 바깥에서 시작할 것인가.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끊임없이 시를 배반하면서 미학적 갱신을 지속한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전체에 대한 통찰을. 시인에게 전체는 지금까지 살아낸 시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시에서 지금까지 써온 시의 궤적과 범주, 성공과 실패를 엄밀하게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할 줄 아는 시인의 정신이다. 시인의 정신이 지닌 최고의 능력이다. 더 나아가 그 정신에만 의지하지 않고 감각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는 직관의 예각을 점검할 줄 아는 육체의 능력이다. 그것은 예민한 감각으로 사태의 한 국면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다. 

최고의 정신과 최대한의 육체로 전체에 대한 통찰을 수행할 때 시인은 시와 삶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까지 써온 시의 영역과 경계를 극단적으로 파악한다. 전체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빈 곳 또한 전체의 바깥이다. 시인은 전체의 내부와 바깥을 가로지르는 경계마다 빗금을 긋는다. 정신과 육체의 극단으로 밀고 나가서 시에서 가능했던 모든 것과 불가능했던 모든 것의 구획을 짓는다. 그것은 언어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일이다. 또한 시인으로서 성공과 실패의 삶을 적시하는 일이다. 시인은 전체를 바라보며 자신의 소유지를 둘러본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전체의 내부를 돌아보며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때 시인은 어제의 시와 안주하는 삶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전체의 바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하려 할 때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시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무시한다. 자신의 시와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두 도려내고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하려 할 때 시인은 죽음과 무(無)를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전체의 바깥을 바라보며 경계에 서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제와 오늘의 경계. 오늘과 내일의 경계. ‘지금―여기’와 ‘미지―거기’의 경계. 이쪽 절벽과 저쪽 절벽의 경계. 시인은 자신이 소유한 시의 영토를 뒤로 하고 경계 너머로 저쪽 절벽을 향해 내딛는다. 이쪽 절벽 끝에서 저쪽 절벽 끝을 향해 눈을 감고 허공 속으로 내딛는 한 발. 미약한 언어에 실존을 걸고 온몸을 던지는 시적 도약의 순간.     


어제는 참을 수 없어. 들킨 것은 빈 곳을 골라 파고들던 발. 신발이 시킨 일. 발자국은 정렬되고 싶었을 뿐.     


어제는 참을 수 없어. 엉킨 몸으로라도 걸었는데. 줄이 늘어났어. 엉킨 몸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몸은 오늘의 소문. 너는 거기서 태어났다. 태어났으므로 입을 벌려라.    

 

너는 노래하는 사람. 2분 22초. 리듬이 멈추면 뒤로 사라지는 사람. 뒤에서 더 뒤로 걸어 나가는 사람. 당장 터져 나오는 말이 있어요. 리듬은 어디에서 가져 오나요. 메아리를 버려라.     


흰 접시에는 소 혓바닥 요리. 다만 너는 오늘의 가수. 두 팔쯤은 자를 수도 있다    

 

너는 가지를 자르는 사람. 뻗고 있는 길을 보란 듯이 잘라내는 사람. 좁은 숨통을 골라내 끊어내는 사람. 내일을 잘라 오늘을 보는 사람.     


다만 나는 오늘의 정원사. 한때 인간이 되고자 했던 것은

태양 속에 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

태양 아래 서게 되었을 때 내내 꼼짝할 수 없던 것은

불빛처럼 햇빛도 구부러지지 않았기 때문.     


오래 아팠다고.     


잘라버린 가지는 나의 두 팔이었던 것.     


끝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끊어진 두 팔을 뚫고 이제야 나오는 손. 징그러운 새순.

허공은 햇빛에게 그토록 오래 칼을 쥐어주고 있었던 것.     


어쩌자고 길부터 건너놓고 보니 가져가야 할 것들은 모두 맞은편에 있다. 

    

발목쯤은 자를 수도 있다     


그토록 믿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한 것. 우세한 것. 정렬된 것.

발이 그토록 오래 묻고 있었던 것     


다시 태어난다면 가수나 정원사가 될 거야

설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니 하겠지만     


흙 속에 파묻혔던 것들만이 안다. 새순이 올라오는 일.

고독을 품고 토마토가 다시 거리로 나오는 일.     


퍼드덕거리는 새를 펴면 종이가 된다

새 속에는 아무것도 써 있지 않다

덜 펴진 곳은 뼈의 흔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사람. 방금 전을 지우는 사람.

두 팔이 없는 사람. 두 발이 없는 사람.

없는 두 다리로 줄밖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    

 

첫 페이지는 비워둔다

언젠가 결핍이 필요하리라     

―이원,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현대문학』 2012년 6월호) 전문     


등단 20년. 이원은 네 번째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문학과지성사, 2012) 뒤표지 산문을 이렇게 쓴다. “매달릴 곳이 간절했다. 다만 적어도 닿는 곳은 있어야 했다. 절벽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경계가 보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삶도 죽음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경계. 나누어지는 곳이 아니라 닿는 곳으로서의 지점. 넘어가지 못한다 해도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넘어가지 못하는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너머에는, 닿아야 했다./경계는 스미는 것이 아니다. 다름을 다름으로 잡고 있는 힘. 그래서 그곳에서 떠나지 않는 힘. 비껴 서지 않는 힘./죽음이 들이닥쳤다고 해서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둘은 다만 닿고 있다. 둘은 적어도 닿고 있다”고 쓴 ‘이/원’. 그녀는 자신이 소유한 전체를 통찰하고 전체의 내부와 바깥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 그 경계에 서서 경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절벽 끝에 서 있다.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에서 이원은 나무에 시인의 전체를 투사한다. 나무는 어떻게 생장하는가. 나무는 어떻게 종이가 되는가. 나무는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자신의 육체로 실존한다. 생장의 “리듬이 멈추면 뒤로 사라지”고 “뒤에서 더 뒤로 걸어 나가는” 나무가 된다. 반대로 온몸으로 밀어내는 줄기와 가지는 허공에 길을 낸다. 나무에게 육체는 실존의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 뿌리로 뻗어가지 못한 “빈 곳”과 줄기로 나아가지 못한 “빈 곳” 모두 육체의 불가능성이다. 육체는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극단과 실존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극단이 맞닿은 경계다. 나무의 가지 끝에 맞닿은 허공이라는 무(無). 그것 자체가 육체의 한계이자 새로운 줄기가 뻗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나무가 새로운 생장을 하기 위해서는 오늘을 기준으로 어제까지 생장한 가지와 줄기를 잘라내야 한다. 팔과 다리를 스스로 잘라낼 수 없다면 정원사의 손을 빌려서라도. 잘라낼 때 나무는 “끊어진 두 팔을 뚫고” “새순”을 틔우고 “토마토”를 맺는다. 나무에게 지금 “명백한 것. 우세한 것. 정렬된 것”은 어제의 육체고 새로운 생장을 위해 잘라내야 할 육체다. 내일의 육체는 어제의 육체를 잘라내는 오늘의 감각에 있다. 오늘의 감각으로 어제까지 육체가 뻗어나간 전체를 무시하고 부정할 때 나무의 새로운 육체는 저 허공의 무(無)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나무에게 오늘의 감각은 전부이고 그 감각은 모든 것을 떠받치고 전체를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원사. “내일을 잘라 오늘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전체를 객관적으로 통찰하는 나무와 같다. 정원사는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주체. 곧 나무다.

나무가 정원사가 되어 전체를 통찰하고 주체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그 주체는 “방금 전을 지우는 사람”이 되고 “없는 두 다리로 줄밖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 주체를 확립한 삶의 인식과 체험으로 파악할 수 없는 타자의 세계로 넘어간다. “두 팔이 없”고 “두 발이 없”으면서도 무(無)에서 새순이 돋는 경이(驚異)를 체험한다. 나무가 종이가 될 때에도 동일하다. 나무가 나무이기를 멈출 때 나무는 종이가 된다. 오늘의 감각으로 이전의 시를 모두 부정할 때 시인은 새로운 시를 쓰기 직전이 된다. 매번 오늘의 감각으로 전체를 통찰하고 가능한 전체를 무시하고 불가능한 것에 온몸을 내맡길 때, 주체가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모두 부정할 때, 시인에게 불가능한 것은 가능한 것의 첫 페이지가 된다. 이것은 이원이 오늘의 감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에 서서 불가능한 언어의 첫 페이지를 쓰려는 시론(詩論)이다. 시인이 매번 지우면서 써왔던, 그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다.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 2007)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문학동네, 근간) 문학평론집 『측위의 감각』(서정시학, 2010) 공저 『시네리테르』(문예중앙, 2011) 등이 있다.


poetik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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