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상, 증언의 문학적 형식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의 『인류L'espéce humaine』(1947)는 독일 강제수용소 체험의 기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던 그는 1944년 6월 독일군에 체포된다. 그는 파리 근교의 프렌(Fresnes) 형무소, 콩피에뉴(compiègne) 임시수용소를 거쳐 1944년 8월 독일의 부헨발트(Buchenwald) 강제수용소로 이감된다. 다시 10월 부헨발트 부설 작업반 간더스하임(Gandersheim)으로 이송되고 간더스하임의 비행기 조립 공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수감 기간의 대부분을 지낸다. 1945년 4월 연합군의 공격과 독일군의 후퇴로 인해 간더스하임을 떠나서 10일간 걸어간 ‘죽음의 행진’, 숱한 동료들의 죽음을 목도한 13일간 ‘죽음의 열차’ 여정 끝에 4월 27일 다하우(Dachau) 수용소에 도착한다. 그리고 4월 29일 다하우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해방된다. 극도의 영양 결핍과 누적된 피로로 인해 거의 죽음에 다다랐던 앙텔므는 다하우 수용소로부터 극적으로 구조되어 파리로 귀환한다.
『인류』는 간더스하임 작업반의 일상을 기록하여 책의 절반 이상 분량을 차지하는 1부 「간더스하임」, 10일간 걸어간 죽음의 행진을 기록한 2부 「길」, 13일간 죽음의 열차 여정과 다하우 수용소에서 보낸 사흘을 기록한 3부 「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목차 구성은 『인류』의 특성과 목적을 유추할 수 있는 기점을 만든다. 그것은 『인류』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논리적 구성과 인과적 서사로 이뤄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인류』는 살아남은 자의 증언과 나치의 폭력에 대한 고발을 중요한 기록으로 내세운 르포르타주(reportage)로서의 증언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앙텔므의 지적 사유와 성찰의 결과로서 구축된 증언 ‘문학’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머리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있는 그대로 말하는 증언의 불가능성을 고백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우리의 체험, 그 대부분이 아직도 우리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체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단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설명은 불가능했다. 말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숨이 막혔다.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상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겪은 체험과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 사이의 불균형은 그후 확고해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일컬어지는 현실 중 하나와 맞닥뜨린 것이 분명했다. 이제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선택에 의해, 즉 여전히 상상에 의해서일 뿐임이 분명해졌다.
나는 여기서 한 독일 강제수용소(부헨발트)의 한 코만도(간더스하임) 생활을 재구성해보려 했다.(『인류』:6-7)(강조는 앙텔므가 이탤릭체와 정자체를 대비시켜 강조한 것을 번역자가 강조한 것이다)
―로베르 앙텔므, 「머리말」 부분
그는 1945년 귀환 직후부터 자신이 체험한 강제수용소에 대하여 “말하기를 원했고, 마침내 누군가 들어주기를 원했”다고 밝힌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강제수용소의 생생한 체험과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격렬한 열망”으로 가득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강제수용소의 체험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일컬어지는 현실”이 강제수용소에서 발생했는데, 그 “상상 불가능한” 현실을 완벽한 재현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기억이며 재현의 불가능성을 재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선택에 의해, 즉 여전히 상상에 의해서일 뿐임이 분명”하다고 밝힌다. 『인류』는 사실적인 증언의 연대기가 아니라 앙텔므의 기억에서 선택된 사실과 그 사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상상’에 의한 글쓰기 결과인 것이다. “독일 강제수용소(부헨발트)의 한 코만도(간더스하임) 생활을 재구성”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소각장에서 발견한 네 장의 사진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기억하기 위해서는 상상”해야 한다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처럼, 그는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도움을 받아서 연대기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개연성의 보편성, 필연성의 논리적 구성에 따른 글쓰기를 수행한다. 그 결과가 『인류』의 시간 흐름에 따른 논리적 구성과 인과적 서사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는 강제수용소의 기록과 증언을 담은 ‘증언’ 문학이 아니라 증언 ‘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9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시인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과 필연성의 질서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 “연대기 작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지만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 까닭에 시는 연대기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고귀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는 데 반해 연대기는 특수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앙텔므는, 연대기 작가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자신의 사실적 체험에 근거한 ‘상상’에 의지하여 사실임직한 개연성과 인과적 서사를 『인류』에서 전개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과장하거나 개인적 증언을 절대화하지 않고 강제수용소의 폭력과 수감자 증언의 보편성을 추구함으로써 『인류』의 문학성, 그 시적 특성을 견지한다.
『인류』의 목차는 앙텔므가 최초로 수감된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헨발트에서부터 파리로의 귀환까지 핍박받은 고통과 억압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드러낸다. 『인류』는 부헨발트에서 이감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성찰, 새로운 카포(kapo, 감시원) 권력의 탄생, 간더스하임의 일상적 폭력이 수인의 신체에 각인시키는 감응(affect)의 개연성과 필연성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1부 간더스하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인류』를 ‘1부 간더스하임’으로 시작하여 ‘2부 길’과 ‘3부 끝’으로 마무리한 것은, 그가 선택한 기억의 서사와 그가 의도한 문학적 형식의 결합을 통해 『인류』의 시적 효과와 그 정치성을 극대화하려는 글쓰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 전부터 편집자이자 지식인이었으며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시인이었다. 그가 『인류』에서 그리워한 M은 다름아닌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였다. 그는 그녀와 1939년에 결혼하고 프랑수아 미테랑(후일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1944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전기적 배경은 그가 글쓰기의 자의식과 함께 문학적 형식에 대한 훈련이 체화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증언’ 문학이 증언 ‘문학’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글쓰기의 자의식과 함께 무엇보다 문학적 형식을 필요로 한다. 앙텔므의 증언과 그 문학적 형식은 앙텔므처럼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극적으로 귀환한 이탈리아 유대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의 첫 저작 『이것이 인간인가』(1947)에서도 나타난다. 레비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수감 생활과 귀환을 단테의 『신곡』 여정에 비유하면서 그 문학적 형식으로서 ‘지옥’으로의 여행과 생환 과정을 지성적 태도로 묘파한다. 역시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루마니아 유태인 파울 첼란(Paul Celan:1920-1970)은 푸가의 형식을 통해 강제수용소의 참혹함을 「죽음의 푸가Todesfuge」(1945)로 쓴다. 영화의 경우, 헝가리 감독 라슬로 네메시(László Nemes, 1977- )의 첫 장편 영화 <사울의 아들Saul fia>(2015)은 1944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살육 현장을 담는다. 라슬로 네메시는 1944년 비르케나우 5호 소각장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소각장 유대인 특수조직) 수인들이 찍은 네 장의 사진으로부터 영화를 제작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현장의 참혹함을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서 끊임없이 프레임 내부로 공습하는 폭력, 그 ‘사운드의 공습’을 양식화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장면을 관객들이 직접 상상하도록 이끄는 영화의 형식이다. 증언의 문학적 형식은 강제수용소의 체험과 언어 사이의 간극과 공백을 열어둔다. 그 공백에서 증언의 효과는 극대화되고 살아남은 증언자보다도 더욱 오래 살아남아서 돌아오지 못한 자와 아우슈비츠를 망각한 사람들에게 강제수용소의 지옥을 증언한다. 그 공백에서 발생하는 상상, 증언의 문학적 형식은 생환하지 못하여 증언하지 못한 자의 침묵과 재현 불가능한 언어의 가능성을 양식화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의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언하고 실천하는 문학의 정치성이다.
2. 신체의 감응과 공백의 언어
앙텔므는 강제수용소가 신체에 가한 폭력과 감응을 기록한다. 그가 수감되었던 간더스하임 강제수용소는 유대인 대량 학살을 위해 가스실과 소각로가 설치되고 운영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수용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억압, 점진적 소멸” 기계였음을 기록한다.
우리 모두는 이곳에 죽기 위해 있다. 그것이 친위대가 우리를 위해 선택한 목표다. 그들은 우리를 총살에도, 교수형에도 처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의도적으로 굶주림에 처해져 예정된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시기만 개인차가 있을 뿐이다. 각자의 유일한 목표는 따라서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빵은 언제나 배가 고프기 때문에 맛이 있다. 그러나 빵은 배고픔을 달래 줄 뿐 아니라, 빵과 함께 몸 안에서 생명이 스스로를 수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또한 그것을 느낀다. 추위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위대는 우리가 추위로 인해 죽기를 원한다. 추위 속에는 바로 죽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만 한다. 노역은 고단하고, 우리에게는 부조리하고, 우리를 마모시킨다. 친위대는 우리가 노역으로 죽기를 바란다. 따라서 일을 할 때는 우리 자신을 아껴야 한다. 죽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문제다. 친위대는 우리가 먹지 않고 노역을 하다 보면, 결국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친위대는 그들이 우리를 피로에 의해, 다시 말해 시간을 통해 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시간 속에 있다.(『인류』:61)
여기에 내가 겪었던 것을 옮겨 적는다. 그곳의 공포는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간더스하임에는 가스실도, 시체 소각장도 없었다. 그곳의 공포는 어둠, 지표의 절대적 부재, 고독, 끊이지 않는 억압, 점진적 소멸이었다. 우리 투쟁의 원동력은 인간으로 남겠다는 필사적 요구, 그마저도 거의 언제나 고독한 필사적 요구였다.(『인류』:9)
―로베르 앙텔므, 「머리말」 부분
친위대가 행사한 신체에 대한 폭력은 수감자들의 육체와 정신에 감응을 일으키고 변화시킨다. 수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매일 정확한 오열로 점호를 받는다. 머릿속에는 오직 배고픔을 견뎌내고 살아남기 위해 ‘빵’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끝없는 노역 속에서 유일한 휴식은 배설을 위한 ‘변소’에서 머무는 순간이다. 그 변소는 인간의 자존감을 유지시켜 줄 칸막이조차 없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지친 몸을 눕히면서 청하는 잠은 휴식과 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의 노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러지는 잠이다. 매일 반복되는 수용소의 노역은 수인들의 신체를 변화시킨다. 모두 동일한 삭발 머리와 줄무늬 수인복을 입은 익명의 존재가 됨으로써 모두 비슷해진다. 고개를 숙이고 눈빛이 사라지고 구부린 어깨와 메마른 신체. 그리하여 수인들의 신체적 “감응은 상호 작용의 흔적으로서만 새겨져, 그 효과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주체에게 생긴 타자의 이미지는 그의 것인 동시에 나의 것이고, 누구의 것도 아니라 양자 사이의 감응이 작용하여 생산한 공-동적(共-動的) 산물”이 된다. 그 ‘공-동적 산물’로서 수인들의 신체는 이름이 지워지고 숫자로 불리면서 얼굴 없는 비인간에 가까워진다. 수인들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이름 대신 명명된 숫자는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우고 무(無)로 만든다. 그 이름에 새겨진 한 사람의 삶과 역사는 숫자로 제거되고 수용소 총인원의 확인을 위한 단위로 변모한다. 이것은 도구화된 이성의 합리성이며 전체주의의 특성을 드러낸다. 오히려 친위대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것은 그 이름에 응답하는 수인의 생명이 위태롭거나 죽음에 처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본인의 이름이 불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신체의 움직임이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수용소에서의 처세이다. 강제수용소는 일상적인 생명 정치가 작동한다. 강제수용소는 수인과 그 동료들이 무명의 존재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감내해야 하는 익명의 공-동체(共-動體)인 것이다.
익명이 된다는 것은 이름의 소멸과 함께 정체성을 드러내는 얼굴의 제거까지 포함된다. 줄무늬 수감복은 수인의 유일한 소지품이다. 갈아입을 옷과 목욕할 기회는 제공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노역으로 인해 더럽고 수척한 얼굴, 다듬지 못한 머리칼과 헤진 줄무늬 수감복은 수감자들 사이의 구분을 지운다. 친위대에게 수인들은 모두 하나의 더러운 줄무늬 덩어리일 뿐이다. 거울조차 없는 수용소에서 자신의 얼굴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수인들은 점점 자신의 얼굴을 망각한다. 수용소 이전의 아름다운 기억은 현전할 수 없어서 고통스럽다. 가족과 연인에 대한 추억에서 현재의 수인 신분으로 돌아올 때마다 기억은 더욱 고통스럽다. 점점 얼굴 없는 비인간이 되어간다. 얼굴은 자신의 정체성과 ‘여기-있음’을 드러내는 기호로서 타자와 대면하는 장소이다. 얼굴은 타자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타자와의 공존과 환대를 생성하는 장소인데, 수용소의 수인들은 얼굴 없는 비인간이 되어감으로써 얼굴이 부재하는 ‘있다(Il y a∼)’의 ‘공동체(共同體)’가 되어간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오직 살아남기 위한 동물이 되어간다.
나는 수용소에서 이름들이 불리는 것을 생각한다. 명명하는 것은 말의 죽음의 놀이를 동반한다. 이름의 임의성, 이름을 앞서거나 동반하는 익명성, 명명의 비인격성은 끔찍한 방식으로, 언어가 살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고유명―숫자―은 그것을 지시하는 힘 그 자체에 의해, 한정 없는 언어의 힘에 의해 그 고유성을 상실한다. 여기서 “고유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기에 몸소 현전할 권리가 아니라, 반대로 바깥의 추위와 피로 속에서, 공적인 자리로 끌어내지는 무서운 의무이다. 사적인 불행의 이름으로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피난처도 제공함이 없이 말이다. 자기가 문제일 때, 자기의 어떤 것도 소유하거나 보존하는 것의 금지는 이름 혹은 그 이름을 대신하는 것의 선언에 의해 발설된다. 수용소에서의 호명은, 어떤 적절한 은닉의 장소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주민등록의 모든 형식적 의미를 (우리의 정교한 문명에서 경찰의 자유로운 폭력과 박탈에서 일어나는 신분의 확인에서처럼) 드러낸다. 언어는 소통하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벌거벗음―바깥에 놓기―에 벌거벗긴다.
―모리스 블랑쇼, 『저 너머로의 발걸음Le pas au-delà』(1973) 부분
앙텔므의 『인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블랑쇼는 수용소에서의 이름과 숫자에 관하여 사유한다. 이름이 아니라 숫자로 호명된 수인은 생명이 당분간 보존되는 익명인들의 바깥으로 불려와서 정체성이 확인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죽음과 폭력에 노출되는 생명체일 뿐이다. 수인들은 이름과 정체성을 부인해야 한다. 이름과 정체성의 부인만이 자신의 생명을 지속할 수 있다. 그 이름과 정체성의 부인은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예외적 상황은 일상적이다. 친위대가 호명하는 이름은 고유한 존재의 빛나는 현존이 아니라 고유한 의미가 무화(無化)되고 상실되는 기호로써 생명 없는 사물에 가까워지는 죽음의 선고이다. 수인들은 계속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이름 없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함으로써 비인간에 가까워지고 비인칭(非人稱, Impersonnalité) 존재가 된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에로디아드Hérodiade」에서 보석과 광물이 될 수 있는 죽음을 실천하여 영원히 아름다워지려는 ‘에로디아드’, 유한한 인간의 육체와 우연한 언어의 문법과 무관하게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수행하는 단 한 권의 책, 「주사위 던지기Uu coup de dés」에서 “북두칠성le septentrion”이 되는 비인칭적 존재를 지향한다. 블랑쇼는 앙텔므의 『인류』를 경유하여 말라르메의 ‘비인칭’에 아우슈비츠의 흔적과 정치성을 새겨놓는다. 말라르메의 ‘비인칭’은 블랑쇼의 ‘비인칭’과 결합됨으로써 미학성에서 정치성까지 확장시킨 미학적 정치성의 개념으로 기입된다. 그리하여 친위대에게 호명되지 않은 이름은 익명화되고 숫자로만 표시되는 수인들의 비인칭은, 단지 ‘있다(Il ya a∼ )'의 신체, 그 벌거벗은 존재가 된다.
비인칭의 신체, 벌거벗은 존재로서 수인은 ‘죽음’이 완료된 ‘명사’의 ‘있음’이 아니라 ‘죽어 감’의 점진적 소멸로 나아가는 ‘동사형 명사’로 있다. 동사형 명사로서 ‘죽어 감’은, 친위대의 권력이 수인의 신체에 행사되는 장소와 수인이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을 표현한다. 친위대는 자신의 권력과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당장 수인을 죽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피로에 의해, 다시 말해 시간을 통해 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시간 속에 있”음을 항상 자각하도록 만든다. 친위대는 ‘죽어 감’을 비인칭의 신체에 각인시킨다.
신체의 감응에 대하여 레비는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을 것이다. 매일, 정해진 리듬에 따라 아우스뤼켄Ausrücken(나가다), 아인뤼켄Einrücken(들어가다), 나갔다가 들어올 것이다. 일하고 자고 먹고, 아팠다가 낫거나 죽을 것”(『이것이 인간인가』:46)이라고 증언한다. 강제수용소의 일상적 폭력은 신체에 남긴 죽음의 리듬을 반복 생산하고 공포의 공동체(共同體)를 만든다. 강제수용소의 “공포는 어둠, 지표의 절대적 부재, 고독”을 수감자들의 신체에 각인시킨다. 더 나아가 수감자에게 가한 친위대의 고문은 도움을 기대하는 사회적 신뢰를 제거한다. 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서 벨기에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앙텔므와 레비처럼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장 아메리(Jean Améry: 1912-1978)는 자신이 겪은 고문을 기록한다.
고통은 고통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감정의 질은 비교할 수도, 기술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언어를 통한 전달 능력의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전달하려 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해보고, 스스로 고문 집행자가 되어보아야 할 것이다.(『죄와 속죄의 저편』:79-80)
― 장 아메리, 「고문」 부분
장 아메리는 “등 뒤로 두 손을 묶은 수갑”을 찬 채 갈고리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한다. 그는 “뒤에서부터 위로 찢겨진 채 머리 위에서 돌아가 버린 묶인 팔에 의지해서 허공에 매달”린다. 고문은 망각하고 있던 육체의 감각을 상기시키고 고통을 안겨주는 뼈와 살의 현존을 부정하도록 만든다. 친위대의 고문은 레지스탕스 명단을 확보하려는 목적의 합리성을 지닌다. 고문하는 자는 고문당하는 자의 육체 속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고문당하는 자의 정신 소멸을 추구한다. 고문당하는 자가 절규할수록 고문하는 자는 권력의 자기실현과 쾌락을 향유한다. 고문당하는 자는 그 앞에서 저항할 수 없는 육체의 무력감과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신뢰의 완벽한 부재를 경험한다. 죽음에 직면한 살덩어리일 뿐이라는 감각과 세계로부터 완전한 고립감이 신체에 새겨진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당한 상태”(『죄와 속죄의 저편』:81)로 머문다. 신체의 고통을 적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완벽한 언어는 부재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장 아메리는 「고문」(1961)을 발표할 때까지 자신이 당한 고문에 대하여 16년여 동안이나 침묵한다. 그는 고통의 재현 불가능성을 말한다. 그 침묵과 재현 불가능한 언어는 강제수용소의 노역과 굶주림, 일상적 폭력과 고문이 수인들의 신체에 일으킨 감응이다. 수인들이 “상상 불가능한” 것을 직접 체험하고 경악과 공포의 기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공백의 언어이다. 앙텔므와 레비와 아메리가 공통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만 완벽한 증언의 불가능성으로서 말해야 할 것의 ‘비어 있음’이다. 그러나 말해야 할 것의 ‘비어 있음’으로서 공백 ‘Blank'는, 그저 비어있는 투명한 흰빛의 무(無)가 아니다. 영어 ‘Blank'는, ‘어둡고 캄캄한 검은’ 의미를 지닌 영어 ‘Black’과 빛깔 없이 ‘창백한(pale)', ‘백색(white)'의 의미를 지닌 영어 ‘blanc’,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과 ‘빛나다', ‘불타다'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Blanc'과 함께 영어의 어원 ‘blak'과 ‘blāc'을 모두 공유한다. 더 나아가 영어 어원 ‘blak'을 공유하는 독일어 ‘Blank'는 ‘반짝이는’과 ‘빛나는' 뿐만 아니라 ‘벌거벗은' 의미까지 지닌다. 그런 점에서 공백의 언어, ‘Blank'는 순백의 순수한 침묵의 비어있는 언어가 아니라 재의 언어이다. 빛이 어둠에서 나오듯 ‘흰’은 검정에서 나온다. 타오르는 불길에 타들어가서 몸체의 대부분이 연기로 사라져버리고 검게 그을린 붉은 숯이 되었다가 잿불만 남은 숯등걸. 그 숯등걸의 흰빛으로 남은 재의 언어이다. 공백의 언어로서 재의 언어는 투명하게 비어있는 백색이 아니라 친위대의 고문과 폭력의 불길에 한없이 타오른 붉은 화상과 검은 그을림을 신체에 드리우고 있는 흰빛의 언어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벌거벗은' 신체들이 타고 남은 잿빛의 언어이다. 육체와 정신, 이름과 얼굴까지 타오르고 검게 그을린 흰빛의 흔적 언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검붉은 연기로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운 언어이다. 그리하여 공백의 언어에는 흰빛 아래 검정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붉음과 살아남은 자의 분홍색이 서려있다.
우리는 그 이탈리아인에게서 죽음을 보았다. 친위대가 그에게 너 이리 와! 라고 말한 후 그는 분홍색이 되었다. 분홍색으로 변하기 전에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명된 것은 바로 그였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을 때 그는 분홍색이 되었다…중략…우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 준비되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각자 자신을 위해 두려움을 느끼지만, 아마 서로 이토록 연대감을 느낀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나 이토록 대체 가능하다고 느낀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준비한다. 준비란 이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그룹별로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관총 앞에 선 자신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죽을 준비를 하기.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작위로 죽도록 지명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아니다. 만일 그것이 나에게 닥친다면 나는 놀랄 것이고, 내 얼굴은 그 이탈리아인의 얼굴처럼 분홍색이 될 것이다.(『인류』:358-359)(강조는 원문)
친위대는 퇴각길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탈리아인을 호명한다. 이탈리아인은 자신이 선택되는 이유도 죽음의 이유도 의미도 모른 채 죽는다. 그것이 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의 방식이다. 아감벤은 이탈리아인이 “죽어야만 한다는 데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이) 죽임을 당하도록 아무렇게나 선택되었다는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156)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블랑쇼는 “죽음의 수용소의 공포, 갑자기, 그리고 끝없이 죽을 자로 선언되고 열거되고 확인되는 무수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의 공포는 각각의 죽어가는 자를 그 이상으로 결백할 수 없었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죄가 있는 자로서 만들고, 경솔함에 의해 보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하면서, 죽음의 비천함 그 자체 때문에 그에게 죽어 감을 선고”(『저 너머로의 발걸음』:144)한다고 명기한다. 그것은 살아남은 앙텔므의 죄의식과 분홍색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호명당한 즉시 총살당한 이탈리아인이 말하지 못한 분홍색의 의미를 직접 목격한 앙텔므조차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죽음의 선고와 다름없는 친위대의 호명이 신체에 일으킨 ‘분홍빛’ 감응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는 없다. 다만, 이탈리아인의 홍조는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조차 제기할 수 없는 당혹과 놀람, 어떤 저항의 말도 도움의 말도 건넬 수 없는 난감함과 공포가 서린 죽기 직전의 공백의 언어이다. 앙텔므의 홍조는 지목당한 이탈리아인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 그것으로만 해석되기 어려운 어떤 죄의식과 이탈리아인의 죽음을 명백한 언어로 증언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발생한 공백의 언어이다. 공백의 언어는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직접 증언할 수 없는 비인간의 증언이다.
3. 시인의 언어와 증인의 언어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1869)에서 시적 주체 ‘나’는 조물주에 끝없이 반항하는 존재로서 조물주만큼이나 변신에 능하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종’을 조롱하고 혐오한다. 말도로르, 조물주의 전능한 힘을 소유한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로 변신할 수 있는 까닭에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와 다르지 않다. “내가 존재한다면, 나는 타자가 아니다Si j'existe, je ne suis pas un autre”라고 선언하는 말도로르는, 일자(一者)로서 세계의 모든 타자를 ‘나’로 귀속시키고 동일성의 원리를 작동시키는 1인칭 시적 주체이다. 반면에 「폴 드므니Paul Demeny에게 보낸 편지」(1871.5.15.)에서 “나는 타자다Je est un autre”라고 선언하는 랭보의 ‘나’는, 신체의 모든 감각이 일으킨 감응의 극단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세계의 모든 사물이 되는 타자성을 실현한다. 랭보의 ‘나’는 1인칭 시적 주체의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고 생명 없는 사물까지 신체적으로 감응하는 타자로서 비인칭적 존재이다. 1인칭 시적 주체의 신체 감각과 언어를 「취한 배Le Bateau ivre」(1871)에서처럼 놓아버린다. 랭보의 ‘나’는 “바다”의 신체와 “이국” 자연의 언어, 즉 타자의 신체와 언어를 받아들이고 합일하는 타자화된 주체이다. 타자화된 주체로서 ‘나’의 신체는 새로운 “나의 사유의 탄생에 참여해서, 그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듣는” 시인이 된다. 시인은 “착란délires”이라고 불러야 할 ‘타자가 되는 경험’을 통해 1인칭 시적 주체로서 바라보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상실한다. 시인은 타자로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고 다른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고 경험한다. 타자가 된 경험은 시인의 신체에 새겨진다. ‘미지-거기’에서 ‘지금-여기’로 생환한 시인의 신체에는 타자의 목소리와 다른 감각의 언어가 새겨져 있다. 이제 시인은 1인칭 시적 주체로 되돌아갈 수 없다.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게 인사를 할 줄 알”(「착란Ⅱ」)기 때문이다. 이제 시인은 1인칭 시적 주체의 언어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된 경험 속에서 ‘주체화된 타자’의 언어를 받아쓴다. “나는 타자”로서 타자의 언어를 ‘지금-여기’의 “이치에 맞”게 받아쓴다. 그것은 타자의 언어와 ‘지금-여기’ 사이에 간극과 공백이 있음을 드러낸다. ‘지금-여기’의 언어로는 미지의 세계와 타자의 언어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노출한다. “나는 침묵을, 밤을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적어 두었다. 나는 현기증을 정착”(「착란Ⅱ」)시킨다. 착란과 현기증을 일으키면서 나는 타자가 되고 타자의 목소리는 ‘지금-여기’로 생환한 ‘나’의 신체를 통해 발현된다. 이전과 ‘다른 나’는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쓴다. 그것은 1인칭 시적 주체의 시쓰기가 아니라 1인칭 시적 주체의 죽음을 통해 도달한 비인칭의 시쓰기이다. 주체의 비어있는 신체를 사로잡은 타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비인칭의 시쓰기이다. 검정과 분홍빛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공백의 흰 언어이다. 그것은 아감벤이 랭보의 ‘타자화된 주체’를 “탈주체화”로 설명하면서 존 키츠(John Keats)와 페루난두 페소아(Fernando Fessoa)와 함께 분석한 시인의 “탈주체화” 경험의 시쓰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랭보의 시는 ‘타자가 된 경험’에 대한 후일담이며 “상상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증언이다. 랭보의 시에서 시인은 “상상 불가능한”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 ‘지금-여기’ 사이에 자리 잡은 저 공백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받아쓴 증인이다. 시는 상상 불가능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증인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상상 불가능한” 강제수용소를 기억하는 앙텔므와 레비와 아메리의 증언은 말도로르의 언어가 아니라 랭보의 언어이다.
이제 K라는 이름은 남았다. 그 이름은 내가 공장에서 만났던 사람 위에 펄럭거린다. 그러나 그를 의무실에서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K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죽음은 그다지 많은 신비를 감추고 있지 않다.
K는 오늘 밤 죽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알았던 사람, 내가 아직도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의 친구는 더 해묵은 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사망을 선고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 우리 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죽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그것이 K의 생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살아 있는 K를 눈앞에 두고도 나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던 사람은 다시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한순간 나를 의심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본 것은 마치 호흡을 되찾기 위해서인 것처럼, 내가 분명 아직 나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나를 안심시킨 것처럼, 죽음, 죽음은 K를 안심시키고, K라는 사람의 통일성을 재형성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알았던 사람과 우리 모두가 알게 될 죽은 K 사이에 이렇게 허무가 자리했었다는 사실, 이 사실은 남을 것이다.(『인류』:265)(강조는 필자)
이제 앙텔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K의 죽음을 증언한다. K는 노역과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마땅한 약도 처방받지 못한 채 병을 앓아가며 죽어가고 있다. 앙텔므는 죽어가는 K를 보러 의무실에 간다. 그는 의무실에서 K를 찾는다. 그러나 그는 K를 찾지 못한다. 그는 K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 얼굴과 일치하는 K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가 알아왔던 K의 얼굴은 부재하다. K의 침대 옆 사람이 가리켜서야 겨우 K였던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이다. K는 움직이지 않는다. 앙텔므는 K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는 K의 “코마저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축 늘어진 머리에 벌어진 입”밖에 알아보지 못한다. K는 분명 살아 있었지만 앙텔므가 기억하고 있던 K는 죽어 있었다. 완전한 죽음의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K는 비인간으로 살아 있다가 죽는다. 앙텔므는 그가 알고 있던 K의 얼굴과 아무것도 아닌 비인간의 얼굴 사이의 공백을 체감한다. 앙텔므는 그 공백에서 죽어가는 K가 다름 아닌 자신의 얼굴과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두려움을 느낀다. K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아직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 공백에 “내가 알았던 사람과 우리 모두가 알게 될 죽은 K 사이에 이렇게 허무가 자리했었다는 사실, 이 사실은 남을 것”임을 기록한다. 그는 무(無)의 공포와 함께 “모두에게 정말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증언한다. 몇몇은 K를 알아보았고 앙텔므는 K를 기억한다. 앙텔므는 K가 남긴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K라는 사람의 통일성”을 재형성할 것임을 밝힌다. K는 K의 이름과 함께 앙텔므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는다.
그가 수용소 보건병동으로 보러 갔던 동료(K),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알아볼 수 없었던 그 동료의 모습을 본 후, 그는 삶 안에도 무(無)가 있다는 것, 그 접근을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할 깊고도 깊은 공허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이 공허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공허함 속에서도 충만함을 지켜 갈 것입니다.
―모리스 블랑쇼, 「지켜보는 밤」(1993.11)
앙텔므는 얼굴을 잃고 비인간으로 죽어간 K와 분홍빛 얼굴로 죽은 이탈리아인에 대한 신체의 감응을 통해 그들의 현존과 죽음을 증언하는 증인이다. 앙텔므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죽음에 직접 다다른 것과 다르지 않은 그의 임사 체험을 통해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의 얼굴을 받아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앙텔므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 내부에 “무(無)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동시에 블랑쇼의 명시처럼 “이 공허와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인류라는 공동체의 “공허함 속에서도 충만함을 지켜”가는 방법이다.
앙텔므의 증언은 앙텔므와 레비와 아메리가 강제수용소 이전의 주체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강제수용소의 희귀한 생존자로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당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증인이다. 아메리가 받은 고문의 고통은 고통으로 남고 앙텔므와 레비의 강제수용소 경험은 지속된다. 고통의 지속은 결과적으로 레비와 아메리의 자살로 이어진다. 그들은 강제수용소 이전의 주체와 다른 타자이다. 말도로르의 1인칭 시적 주체처럼 K의 죽음과 분홍빛 얼굴로 죽은 이탈리아인의 죽음을 모두 전유하여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의 현장에서 그 사태를 목격한 증인으로서 1인칭 시적 주체의 입장이 아니라 비인칭적 존재의 입장에서 죽은 자들의 얼굴을 온전히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말하기를 원했고, 마침내 누군가 들어주기를 원했다. 우리의 몰골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욱 웅변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선을 넘어 간신히 돌아왔으며, 우리와 함께 우리의 기억, 아주 생생한 우리의 체험을 가지고 돌아왔고,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격렬한 열망으로 가득했다.(『인류』:6)
―로베르 앙텔므, 「머리말」 부분
이 책은 이미 수용소 시절부터 구상되고 계획되었다.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사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 후까지도 우리들 사이에서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합을 벌일 정도로 즉각적이고 강렬한 충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다.(『이것이 인간인가』:7)
―프리모 레비, 「작가의 말」 부분
나는 20년간 줄곧 잃어버릴 수 없는 시간을 찾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풀기 힘든 마법이 풀린 것처럼 보였고, 갑자기 모든 것이 말해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태어났다.(『죄와 속죄의 저편』:14)
―장 아메리, 「1966년 초판 서문」 부분
앙텔므와 레비는 극소수의 살아남은 증인으로서 공교롭게도 1947년에 『인류』와 『이것이 인간인가』를 동시에 출간하여 강제수용소 체험과 죽은 자들에 대하여 증언한다. 그들은 생환한 증인으로서 “잃어버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과 “내적 해방”을 위한 글쓰기를 실천한다. 그런데 그 증인들의 언어는 1인칭 시적 주체의 동일성과 능동성에 근거한 글쓰기가 아니다. 그것은 “말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과 “즉각적이고 강렬한 충동”과 “갑자기 모든 것이 말해지기를 원”하는 욕구에 이끌린 신체의 비인칭적 글쓰기이다. 그들은 생환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직접 말하지 못한 공백의 언어에 감응한 신체이자 증인으로서 시인의 언어를 발화한 것이다.
4. 증인의 글쓰기와 조각의 문학
공백의 언어에는 단지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라 “침묵하는 동안에 내가 독일의 운명이자 나 자신의 운명인 그 12년간의 시간을 잊었다거나 떨쳐버렸다고 말할 수 없는”(『죄와 속죄의 저편』, 14쪽) 언어가 새겨져 있다. 더 나아가 공백의 언어에는 얼굴 없는 K와 분홍빛 얼굴의 이탈리아인뿐만 아니라 “후르비네크Hurbinek”의 언어가 있다. 레비는 독일군의 퇴각과 강제수용소의 해방 속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대수용소’의 병실로 이동한다. 레비는 그곳에서 “후르비네크”라는 아이를 만난다. 후르비네크는 세 살가량 되어 보이는 아우슈비츠의 자식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아이의 신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후르비네크”라는 이름의 기원조차 분명하지 않다. 아이가 “가끔씩 내뱉는 분명치 않은 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후르비네크로 해석하여 그에게 붙여준 것”이다. 후르비네크는 말할 줄 모르고 이름도 없다. 그러나 “삼각형의 얼굴 속에 푹 꺼진 아이의 두 눈은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요구와 주장들로, 침묵의 무덤을 깨부수고 나오려는 의지로 가득”(34쪽)하다. “아이에게는 결여된,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주려 한 적 없는 말言, 그 말의 필요성이 아이의 시선 속에서 터질 듯한 절박함으로 압박”(34쪽)한다. 아이의 눈빛이 절박한 빛으로 발하는 말. 아이에게 결핍된 말. 누구로부터 배운 적 없고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말. 말할 수 없는 자의 살아 있음을 스스로 증언하고 생존하려는 후르비네크의 말.
후르비네크가 ‘말을 했다’고 발표했다. 무슨 말이었는데? 그는 알지 못했다. 헝가리어는 아니고, 어려운 낱말이었어. ‘마스-클로mass-klo’, ‘마티스클로matisklo’ 같은 무슨 말인데, 밤에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정말이었다. 후르비네크가 있는 구석 쪽에서 이따금 어떤 소리가, 어떤 말이 들려왔다. 사실, 매번 정확히 같은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분절적인 단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씩 다르게 발음되는 단어들이었고, 하나의 어간 혹은 어근을 두고, 아니 어쩌면 어떤 명사를 두고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한 것들이었다.(『휴전』, 35쪽, 강조는 필자)
병실에서 후르비네크는 유일하게 열다섯 살 헝가리 소년 헤넥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 일주일이 지난 뒤 헤넥은 “후르비네크가 ‘말을 했다’고 발표”한다. “‘마스-클로mass-klo’, ‘마티스클로matisklo’ 같은 무슨 말”이다. “아주 조금씩 다르게 발음되는 단어들”. 그 말은 유럽의 모든 언어를 구사하는 수인에게도 해석되지 않고 어떤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mass-(붙여쓰기)klo’, ‘matisklo’, ‘ma-ss-kl-o’, ‘ma-ti-s-kl-o’. 문자로 씌어진 적 없는 말. 후르비네크의 말. 후르비네크의 ‘여기-있음’을 증언하는 비언어. 아무도 아닌 자의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공기를 가르고 사라지는 비언어의 언어이다. “공백으로부터 생겨나는 소리, 고독한 이가 말하는 비언어, 언어가 그것에 응답하고 언어가 그 속에서 태어나는 비언어”. 아무도 아닌 자가 말하고 공백으로 사라진 말이다. 후르비네크는 그 공백의 의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이다. 비언어의 언어로 스스로를 증언하는 증인. ‘지금-여기’ 부재하는 증인. ‘Hurbinek’.
그러나 후르비네크의 말만큼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메시지나 계시는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본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누군가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면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세운 가정들 중 하나인데) ‘먹다’ 또는 ‘빵’을 뜻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우리 중 보헤미아어를 아는 사람이 제법 설득력 있게 주장한 것처럼, 보헤미아어로 ‘고기’를 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나, 한 번도 나무를 본 적이 없었을 세 살배기 아이 후르비네크, 야수 같은 가공할 권력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한 인간으로서 투쟁했던 후르비네크, 그 조그만 팔에도 아우슈비츠의 문신이 새겨져 있던, 이름 없는 후르비네크. 1943년 3월 초, 후르비네크는 자유롭지만 진정 구원받지는 못한 채 죽었다. 그에 대한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렇게 나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휴전』, 35-36쪽, 강조는 필자)
후르비네크는 죽음으로써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무도 아닌 자가 되었다. 그러나 후르비네크의 말은 레비의 증언을 통해 해석되지 않은 의미의 공백으로 남았다. “그는 이렇게 나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고 레비는 증언한다. 레비의 증언은 증언하는 주체의 불완전성과 증언의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후르비네크의 ‘거기-있었음’과 말은 후르비네크가 증언할 수 없다. 그는 아무도 아닌 자로서 공백의 언어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도 아닌 자의 증언 불가능성이다. 후르비네크의 말은 레비의 “말을 통해 증언”된다. 그것은 증언할 수 없는 존재의 비언어에 감응한 레비의 말로 발화된다. 레비가 비언어를 언어로 옮겨서 증언한 것이다. 의미의 공백에 의미의 언어를 쓴 것이다. 증인의 글쓰기는 공백 위에 글을 쓰고 의미의 공백을 의미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에는 언어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후르비네크의 말과 흔적이 남아 있다. 레비도 온전히 증언하는 주체가 아닌 것이다. 온전한 증언은 레비가 언어를 비언어로 말할 때 가능하다. 레비의 언어가 ‘mass-klo’, ‘mati-(붙여쓰기)sklo’, ‘ma-ss-kl-o’, ‘ma-ti-s-kl-o’ 같은 비언어가 될 때 증언은 온전히 가능하다. 일종의 비인칭의 글쓰기를 실천할 때 증언은 가능하다. 온전한 증언은 비언어의 공백, 무의미의 언어가 되는 지점에서 가능하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레비는 비언어로 말할 수 없다. 후르비네크의 비언어와 레비의 언어 사이에는 여전히 의미의 공백과 재현의 불가능성이 현존한다. 이것이 레비의 증언 불가능성이다.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비언어가 되어야 하며, 언어는 비언어가 됨으로써 증언함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언하는 주체의 불완전성과 증언의 불가능성이다. 그런 점에서 증인의 글쓰기는 단편적이며 파편적이다. ‘지금-여기’에서 불완전한 증언 ‘문학’이며 도래할 미래의 순간에도 여전히 완전한 파악이 불가능한 조각의 문학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쓰고 말하기를 반복하고 멈추지 말아야 할 조각의 문학이다.
조각이라는 의도적 선택은 회의에 빠진 후퇴도, 완전한 파악(가능할 수도 있을)에 대한 맥없는 포기도 아니다. 그것은 인내하는-성급한, 이동하는-고정된 추구 방식이며, 동시에 의미와 의미 전체는 우리들과 우리의 글 안에 즉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도래해야 할 미래의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의미를 캐물을 때, 우리는 그 의미를 생성으로서 그리고 질문의 미래로서만 포착한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반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조각의 말, 모든 파편적 성찰은 반복과 무한한 다양성을 요구한다. (…) 그러나 우리는 말 혹은 글쓰기를 통하여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간접적인 것이야말로 곧바르고 가장 빠른 길이 아닌가를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모리스 블랑쇼, 「베를린」, 『정치평론 1953-1993』, 부분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 다른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차츰차츰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메두사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 중 하나)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부분
그렇다면 증언은 어떻게 가능한가. 앙텔므와 레비와 아메리. 이 증인들의 글쓰기는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우리의 체험, 그 대부분이 아직도 우리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체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인류』, 6쪽)해 보인다는 앙텔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자 하며, 철저히 객관적으로 독자들에게 나아가려고 했던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죄와 속죄의 저편』, 15쪽)고 고백하는 아메리.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증인됨’의 자리로 나아가서 증인의 글쓰기를 실천한다. “일어났던 것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어났던 것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는 저항”하고 “아우슈비츠. 내가 어떻게 그것에 이르렀는지,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 후에는 무슨 일이 뒤따랐는지, 내가 오늘 어떻게 여기 서 있는지를 밝혀”(「1977년판 서문」, 『죄와 속죄의 저편』, 13-14쪽)내고자 아메리는 쓴다.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이것이 인간인가』, 6쪽)하기 위해 레비는 쓴다. “우리들의 목표는 가장 겸허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오직 살아남는 것”(『인류』, 8쪽)이었음을 증언하기 위해 앙텔므는 쓴다. 그것은 증언하는 주체의 불완전성, 증언의 불가능성, 그 모든 것을 무릅쓰면서 “상상 불가능한” 것과 ‘공백의 언어’에 대한 ‘증인됨’을 반복하고 실천하는 증인의 글쓰기, 조각의 문학이다.
스스로 포기하고 동료들에게 포기당한 수감자를 칭하는 수용소 용어인 이른바 ‘무슬림Muselmann’은 선과 악, 고상한 것과 비천한 것, 정신적인 것과 비정신적인 것이 마주할 수 있는 의식의 공간을 더 이상 갖지 못했다. 그는 아직까지 움직이는 시체였고,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물리적 기능의 다발이었다.(「정신의 경계에서」, 『죄와 속죄의 저편』, 34쪽)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Muselmänner,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ㆍ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이것이 인간인가』, 126-127쪽)
증인의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로서 앙텔므와 레비와 아메리만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죽은 K, 분홍빛 얼굴로 죽은 이탈리아인, 이름도 없고 말도 배우지 못한 채 죽은 후르비네크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시체로서 기능하면서 이름도 얼굴도 없이 노동하는 익명의 비인간으로 살다가 천천히 ‘죽어감’으로 이행한 ‘무젤만Muselmann’의 공백까지 증언하는 증인이다.
아무것도 아니
었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 활짝 피어:
아무것도 아닌,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파울 첼란, 「찬미가Psalm」, 부분
그토록 내가 그대를 꿈꾸었기에
그토록 걷고 그토록 말하고
그토록 그대의 그림자를 사랑했기에
나에게는 더 이상 그대의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자들 중의 그림자가 되는 것
그림자보다 백배 더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빛 가득한 그대의 삶 속으로
오고 또 오고 할 그런 그림자가 되는 일일 뿐.
-로베르 데스노스, 「무제」
가혹한 밤들 우리는 꿈꾸었다
치열하고 격렬한 꿈들
온몸과 온 마음으로 꿈꾸었다
돌아가기를, 먹기를, 이야기하기를.
짧고 낮게
새벽의 기상 소리 울릴 때까지
‘브스타바치wstawać’
그러면 가슴속 심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집을 되찾았고
우리 배는 부르고
이야기도 끝마쳤다.
때가 되었다. 조만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이국의 기상 소리
‘브스타바치wstawać’
1946년 1월 11일
-프리모 레비, 『휴전』(15쪽), 부분
첼란과 데스노스와 레비. 그들은 구조되지 못하고 가라앉은 자, 생환되지 못한 비인간의 비언어, 모든 타자들의 목소리를 신체의 배음背音으로 삼고 ‘거기-있었음’과 공백을 증언하는 증인됨의 공동共動 글쓰기 주체가 된다. 아우슈비츠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들의 유대를 파괴하고 인간임을 부정하는 비인간 ‘무젤만’의 상태까지 몰아가는 지점에서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이것이 인간인가』, 54쪽)는 레비, “존엄성은 삶에 대한 권리”(「유대인 되기의 강제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죄와 속죄의 저편』, 176쪽)라는 아메리와 함께 앙텔므는 선언한다. “박해자는 인간을 죽일 수는 있지만, 인간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는 못한다”(『인류』, 339쪽)는 선언. “인간의 극한에 근접한 이 순간 명약관화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진실을 은폐하는데, 그 진실이란 여러 종류의 인류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친위대들도 결국은 우리 앞에서 무력할 것”(『인류』, 337- 338쪽)이라고 레비는 쓴다. 이것이 『인류』, 즉 ‘인간이라는 종’의 표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표제가 된 이유이다. 이것은 이방인과 타자를 절멸시키려는 극한의 아우슈비츠에서도 끝끝내 ‘인간됨’의 윤리를 공통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한 증인‘들’의 글쓰기이다. 조각의 문학은 비인간의 상태에서 발화하는 비언어, ‘Blank’ 표면 아래에서 흔적으로 남아 있는 후르비네크의 말과 함께 ‘오직 하나의 인류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증언 ‘문학’은 완결된 증언 전체의 문학이 아니다. 증언 ‘문학’은 증언된 증인의 글쓰기 바깥에서 여전히 발화되지 못한 공백의 언어와 함께 단편적이며 파편적인 목소리로 남아 있는 조각의 문학이다. 조각의 문학으로서 증인의 글쓰기는 단편적이며 파편적인 증언의 행간에서 익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무한히 생성 중인 증언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