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삶들은 있는가 3
소포클레스의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로부터 추방당한 오이디푸스가 아테나이의 국경, 콜로노스에 도착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딸, 안티고네에 의지하여 국경에 도착한 그는 “우리는 이방인들인지라 이곳 주민들에게 배워야 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p.155) 한다고 말한다. 낯선 이방인으로서 오이디푸스는 아테나이의 통치자인 테세우스에게 국경에 거주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그는 국경에서 아테나이의 적들을 쳐부술 것이며 아테나이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의 약속에 화답하며 오이디푸스의 국경에서의 거주를 승인한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를 낯선 ‘이방인’이라고 규정하며 콜로노스의 주민들로부터 관습을 배우고 그들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국경을 넘은 외국인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된다. 국경은 국가의 통치와 법의 효력이 발휘되는 영토의 표지로서 국가의 법적 승인을 받은 국민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경계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국경은 필연적으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물음을 제기하고 모든 사람을 외국인과 내국인으로 구분하면서 외국인을 국경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국경 앞에서 외국인은 잠재적 범죄자와 임의적 적국의 국민으로 분류되고 그 존재 자체로 의심받는 존재가 된다. 외국인은 국경을 넘는 순간 “방문자/체류자/이민자/망명자/불법체류자/난민/증이 없는 자”(기욤 르 블랑, 『안과 밖: 외국인의 조건』, 박명옥 옮김, 글항아리, 2014, p.29) 중의 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국경은 외국인과 내국인을 구별하고 차이를 낳는 위계의 지표로 작동하면서 외국인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존재들의 거주지를 잉태시킨다. 그 국경은 지리적 위치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있는 국경이 된다. 국경은 외국인을 발생시키고 외국인은 국경에 존재한다. 그것이 오이디푸스가 국경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이며 그가 어디에 거주하든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외국인에 대한 국경의 거주는 오이디푸스처럼 해당 국가의 법을 준수하고 해당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때 승인된다. 그런데 외국인의 거주가 승인되었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은 즉각적인 내국인, 그 국가의 국민이 될 수 없다. 외국인은 내국인의 언어와 문화를 완전히 습득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외국인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인종과 계급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배제와 차별로 인해 국민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외국인이라는 익명의 존재로서 국가의 바깥에 놓인다. 역설적으로 내국인은 외국인에 대한 대타적 존재로 성립하면서 국가의 내부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결속한다. 익명의 외국인과 구별되는 내국인은 국가의 정체성을 내면화한 공동체의 내부에 거주하면서 ‘국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의 정의를 불분명하고 균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전환시킨다. 더 나아가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국가의 법은 누가 제정하는가’,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가’, ‘법은 국민을 보호하는가’, ‘국민은 어떻게 구성되고 유지되는가’,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실정법은 자연법보다 선차적인가’라는 물음들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처럼 보이던 국가와 국민과 법에 대한 정의에 균열을 일으킨다.
저 물음들은 간명하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저 물음들이 야기한 균열을 통해 공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답변 중의 하나는,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의 정의는 동일한 주체들의 단일한 목소리로 합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주체들의 정체성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은 동일한 주체들이 합의한 국가의 정체성 속에서 평등한 권리로 거주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저 물음들은 국가와 국민과 법이 동일한 주체들의 정합적 정립이 아니라 이질적인 타자들의 임의적 결합과 정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런 까닭에 외국인은 국가의 바깥과 국경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내부와 내국인 안에서도 존재한다. ‘남성/여성/성전환자’, ‘이성애자/동성애자/양성애자’, ‘정규직/비정규직/계약직/일용직’, ‘백인종/유색인종’, ‘자본가/노동자’, ‘통치자/피통치자’ 등의 위계와 차이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적 차이에서도 발생하는 내국인 사이의 차별은 외국인으로서 겪는 차별보다 심하지 않더라도 국경에서 타자화된 외국인이 겪는 차별들의 특성과 다르지 않다. 오이디푸스는 본래부터 외국인은 아니었으나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며 본국 테바이의 왕위를 포기하고 권좌로부터 추방당하자마자 외국인으로 전락한다. 외국인은 국경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국가와 공동체 안에서 타자화된 주체들도 잠재적 외국인으로 존재하며 언제든지 추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추방당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환대한 콜로노스의 방패가 되어주면서 찾아낸 국경의 장소는 타자화된 주체들의 무덤이자 국경의 바깥으로 내몰린 시민들이 이국에서 맞이한 비극적 안식처이다. 용산 참사의 철거민들과 세월호의 아이들, 강남역 살인사건의 여성과 여수 외국인보호소의 이주노동자처럼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국가의 폭력과 권력을 가진 주체에 의해 자행된 타살이다.
물론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위계와 차이는 분명하며 그것으로 인한 차별과 배제는 외국인에게 일상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외국인이 쉽게 습득할 수 없는 언어는 즉시 동화될 수 없는 타자로서의 정체성과 상처를 매순간 각인시킨다. 말할 수 있는 이국 언어의 부재는 외국인을 하나의 국가와 공동체 안에서 실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부유하는 환영 같은 존재로 대우한다. 이국의 언어를 말할 수 없는 외국인은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타자임을 이름없는 자신의 육체로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입이 있으나 이국의 언어를 말할 수 없는 외국인은 자신의 몫이 전혀 없는 세계에 놓인 타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국경의 외국인들과 외국인의 처지로 내몰린 내국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이디푸스를 국경의 바깥으로 밀어낸 테바이의 왕, 크레온에게 문학은, 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비합법적인 어떤 목소리가 지르는
비명 소리
그것은 스스로를 듣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길들여서라도 알게 하고 싶었던 침묵이다
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넌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난 여러 개의 답변이 있었지만 넌 그것들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것은 너에게 그리고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 에이드리언 리치의 「침묵의 지도학」 부분
(에이드리언 리치, 『문턱 너머 저편The Fact of a Doorframe』, 한지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pp.290-291)
국가와 법은 공동체의 질서와 운영을 위해 인간이 만든 제도이지만 그것이 만인을 위한 제도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을 옭아매는 폭력적인 수단과 불법을 양산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이유로 합법과 비합법의 기준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제정하고 강제하는 주체와 지역,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국경의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의 국경을 넘은 외국인으로서 불법체류자이지만 콜로노스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과 테세우스의 승인과 동시에 합법적인 체류자의 신분이 된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침묵의 지도학」은 국경의 오이디푸스처럼 아직은 불법체류자의 신분에 놓인 외국인, ‘나’의 실존적 상황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내국인, ‘너’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외국인으로서 내가 비합법적인 존재로 규정될 때, 외국인으로서 내가 이국의 언어를 말하지 못할 때 나의 목소리는, 내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내 몫이 세계 안에 있음을 주장하지 못하고 너에게 이해되지 않는 “비명 소리”로만 들린다. 나의 목소리는 너에게 영원한 이방인이 내뱉는 타자의 언어로 들린다. 나의 목소리가 너에게 전달되지 않고 나의 내부에서만 맴돌 때 나의 언어는 그 의미를 잃는다. “스스로를 듣는 것을 멈”춘다. 언어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언어의 주체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내 언어가 너에게 “비명 소리”로만 들리고 나의 내부에서만 거주하면 내가 존재하는 양식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이다. 외국인과 타자로서 “나는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지만 외국인으로서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 물음을 말할 수 없는 나의 “침묵”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는 너의 언어는 나의 목소리를 타자의 언어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주체의 권력으로 작동한다. 말할 수 없는 내 앞에서 네가 말하는 것도 말하지 않는 것도 내 존재를 무력화시킨다. ‘침묵’으로써 “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넌 대답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국가라는 공동체는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가. 타자의 언어와 비명 소리를 주목하지 않을 때 국경에서는 어떤 사건들을 양산하는가.
국가와 국민은 동일한 주체들로만 구성되지 않고 이질적인 타자들과의 공존을 통해 성립되는 까닭에 타자의 언어와 침묵하는 존재들의 비명에 대한 외면과 방치는 타자화된 주체의 죽음들을 양산하며 외국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은 필연적이다. 타자의 언어와 침묵에 주목하지 않는 주체는 “나는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 주체는 반성찰적이고 폭력적이며 전체주의적 사유로 나아가는 도정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시는 반성찰적인 동일성의 주체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시는 스스로를 자명하다고 확정하는 그 주체에게, 차별과 폭력을 가하는 테바이의 왕, 크레온에게 “나는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시는 주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침묵하면서 타자의 언어를 응시하는 침묵의 자리에서 고요히 흘러넘치는 언어로서 출현한다. 그 침묵 속에서 너의 언어는 나의 언어를 대신하지 않으면서 너와 내가 함께 만나는 순간의 윤리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시는 국경의 바깥과 미지에서 도래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주체의 침묵에서 현현한다.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 2007)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문학동네, 근간) 문학평론집 『측위의 감각』(서정시학, 2010) 공저 『시네리테르』(문예중앙,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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