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승환 Jul 15. 2018

신작시 「검은 돌 흰 돌」

           

 1  

   

나는 두 개의 무덤 

사이에서 태어난다  

   

나는      


극지의 바닥으로 내려간 자정을 알고 있다

적도의 바다 한 점에 머무는 자정을 알고 있다   

 

나는     


얼음을 두 손으로 부숴 삼킨다

빙하의 밤 심해의 쇄빙선 안에 갇혀있다    

 

검은 돌

검은 돌     


그림자     


자정에서 자정으로

백야에서 백야로     


그러나 나는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작살로     


나는 투명한 얼음의 밤을 깨뜨릴 수 있는가          



 2     


아이는 묻는다 열쇠는 무엇인가 침몰한 배의 철문 앞에서     


열쇠는 열다와 쇠      


열다 닫다 열다 닫다 닫다 닫히거나 잠긴 것 트는 것 벗기는 것 막힌 것 치우고 통하는 것 서랍의 밀폐된 공기를 풀어놓는 것 백지의 책을 펼치는 것 뒤틀리고 불투명하고 선으로 이어지고 끊어진 자리로 이어진 글자 씻어내는 것 이름도 없이 반짝이며 너울지는 은빛 물결 들어 올리는 것 바다의 장막과 마주서는 것      


쇠     


쇠     


철의 바람소리를 눈으로 듣는 것 마주치는 것     


칼을 받아들이는 것     


솟구치는 피의 음악 속으로 잠겨드는 것     


가라앉은 배의 키를 놓치지 않는 것     


파선의 바닥에서     


쇠     


쇠     


내가 쓰는 것     


묻는다     


묻는다          



 3     


마뇰magnol

마뇰리아

매그놀리아

머그올려

먹올려

목올여

목려

목련  


공기의 진동을 일으키는 밤의 태양      


검은 12월 

대륙의 흙과     


흰 1월 

바다의 파고를 타고 오는 소리     


꽃은     


맞닿아있는가

맞닿아있는가     


숨은

결은     


열릴 것인가     


목련     


숨결의 멈춤과 그 너머가 있다   

  

목련     


아이가 말한다     


하얗게 타오르는 빛 속에 용솟음치는 검은 재가 있다   


       

 4     


노를 젓는다

노를 젓는다     


바다의 심원에 파묻힌 선실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둠의 선체 안에서     


부러진 나무를 연필 삼아 

찢어진 옷깃을 종이 삼아     


흔적 없는 밤의 팔 젓기로 

필적 없는 밤의 노 젓기로     


밤의 페이지에 쓴다     


나는 모든 빛이 통과하는 어둠 속에 서 있다

나는 닻을 늘어뜨리고 암초를 긁으며 좌초된 배 안에 있다 

나는 하나의 짐이 아니라 하나의 힘이 되는 기억을 갖고 있다

나는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자줏빛 태양의 광선을 떠올린다 

나는 광대한 검정을 가리키는 아이의 흰 손가락을 바라본다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나는     


납빛     


낯빛     


그림자는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밤의 미광 속에서

밤의 정적 속에서     


검은 돌

검은 돌     


흰 돌     


아이는     


묻는다     


묻는다          



 5     


검은 깃털은 검은 깃털에서 나온 것인가

검은 돌은 검은 돌로 남는가     


초록의 에메랄드는 태양의 광원 속에서 왜 희거나 붉거나 푸르거나 검은가

백조는 백조이고 흰 돌은 흰 돌인가     


삼월에 명자가 떨어지면 슬픈 것인가

삼월에 아이가 태어나면 기쁜 것인가     


사월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이미 존재하는 것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     


끊임없이     


아무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     


파도는 흰 모래밭에 검은 거품을 남긴다

파도는 흰 모래밭에 거문 거품을 남긴다     


아이는     


끝없이     


끝까지     


계속     


거침없이          



 6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무력하게     


무용하게     


무참하게     


무한히     


빙하를     


백지를      


무덤을     


바다를     


바닥을     


나는     


마치            




                            

『시와사상』 2017년 봄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 2007)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문학동네, 근간) 문학평론집 『측위의 감각』(서정시학, 2010) 공저 『시네리테르』(문예중앙, 2011) 등이 있다.


poetika@naver.com

작가의 이전글 대홍수의 상상력, 그 무의식적 정치성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