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대 한국시의 현장: 안희연과 황유원의 시
“물과 슬픔이여, 높아져라, 다시 일으켜라, 대홍수들을”
―아르뛰르 랭보
송승환
1. 여름 장미는 파랗고 숲은 유리다
랭보의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Les Illuminations, 1873-1875』은 「대홍수 뒤에Après le Déluge」로 시작한다. ‘대홍수’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6-8장에서 최초 인류의 범죄와 타락에 대한 심판으로서 신이 일으킨 대홍수를 가리킨다. 신의 대홍수는 지상의 모든 생명들을 쓸어버리고 타락한 인류의 모든 죄를 심판하고 씻어내는 정화 작용의 의미를 지닌다. 대홍수는 인간이 지상에 구축한 법과 권력, 그 모든 환락에 대해 남김없이 절멸시키는 신의 무한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1921)에서 언급한 ‘신적 폭력’과 다르지 않다. 신은 지상에 구축한 인간의 법과 질서, 국가와 민족, 지상의 생명들에게 전염시킨 인간의 죄악들을 대홍수를 통해 일시에 쓸어버린다. 신은 새로운 대지 위에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그리고 의인(義人)이며 당대의 완전한 인간, ‘노아’와 그 후손들이 살아갈 세계를 개시한다는 점에서 대홍수는 혁명, 그 자체다. 대홍수는 모든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고 초과하는 신적 폭력이며 인간의 역사적 시간이 정지한 예외적 상태가 도래한 시간이라는 점에서 시적 순간이다. 대홍수가 인간의 통치 수단인 법과 국가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도래시키는 것처럼 시적 순간은 국가의 법과 규범적 언어가 지닌 권위와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위반하는 예외적 시간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지상에 정초하고 발명하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랭보는 “대홍수의 관념(l'idée du Déluge)”이 가라앉은 이후, 즉 대홍수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 금세 사라지고 화려한 “장엄 호텔(le Splendide-Hôtel)”을 “극지의 밤과 얼음의 혼돈 속”까지 건축하고 안주하는 인간의 삶을 비판한다. 대홍수가 가라앉은 이후의 삶은 “권태일 뿐이기에!” 랭보는 외친다. “번개와 천둥이여, 높아져라, 굴러라, ― 물과 슬픔이여, 높아져라, 다시 일으켜라, 대홍수들을.” 그 목소리는 다시 지상의 삶에 안주하고 국가의 법과 질서에 길들여지고 안온한 삶의 권태에 만족하는 인간의 삶을 전복하려는 랭보의 절규다. 대홍수와도 같은 삶의 영구 혁명을 어떤 두려움도 없이 갈망하는 랭보의 선언이다.
「대홍수 뒤에」는 파리 꼬뮌(1871년 3월 18일~5월 28일) 이후에 창작된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산문시 46편과 자유시 2편(「바다 풍경Marine」과 「운동Mouvement」)―에 수록된 산문시 중의 한 편이라는 점에서 랭보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혁명에 대한 향수와 좌절이 스며있는 작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랭보는 그 혁명에 대한 향수와 좌절을 즉자적이고 사실적인 재현의 운문시가 아니라 신학적 주제와 결부된 전복적 상상력의 알레고리 산문시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대홍수 뒤에」를 비롯한 『일뤼미나시옹』의 산문시들은 상상력의 무의식적 정치성과 산문시의 장르적 정치성을 적극 개진한 작품들이라는 의의가 있다. 「대홍수 뒤에」를 첫 시로 시작한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은 자유시의 모범을 제시한 2편의 자유시와 전통적인 운문시와 완전히 관계를 끊는 산문시를 통해 장르의 전위적 정치성을 선취한다. 그리고 산문시에서 세계의 끝(「곶Promontoire」)과 그 바깥으로 나아가 현실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된 무의식의 글쓰기와 미지의 세계를 환상적인 언어의 연금술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적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que nous ignorons)”을 바라볼 수 있는 투시자(le voyant)로서의 랭보가 제도 교육 밖에서 감행한 글쓰기, 그 자체도 2010년대 한국시의 현장에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불완전하지만 간접 민주주의의 가치가 그래도 지속적이며 안정적으로 실현되던 그 시기는, 역설적으로 가시적인 폭력과 감금의 통치 수단을 대신하여 비가시적이고 미시적인 초국적 자본의 지배가 개인의 실존과 사회 전체를 통제함으로써 공동체의 불안이 개인의 무의식을 잠식한 10년이었다. 이제는 한국 현대 시사에 당당히 자리매김된 일군의 1970년대산(産) 시인들이 첫 시집들에서 전개한 미학적 전위의 언어 실험과 다양한 시적 주체의 발명은 바로 10년간의 정치 제도와 경제적 토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징후적이다. 그 당대의 미학은 현실 세계의 가시적 폭력성과 맞서면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던 김지하 세대의 풍자의 미학과 백무산 세대의 사실주의 비판 미학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비가시적 폭력성과 자본 앞에서 유토피아를 전망할 수 없는 1970년대산 시인들의 무의식이 투영된 알레고리 미학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들은 한국시에 자리잡고 있던 확고한 자기 동일성의 시적 주체가 아니라 성적 소수자와 비주류 하위문화 향유자, 소숫점 이하의 주체와 분열증적 주체, 현실의 ‘나’를 책임질 수 없어서 ‘우리’에 숨은 3인칭 복수의 주체 혹은, 유령 주체를 출현시키고 억압된 개인의 무의식에 잠재된 불안을 다양한 주체들의 발화에 담아냄으로써 시인 각자의 언어 발명과 규범적 언어를 위반하는 언어의 정치성을 실험하였다. 그들의 시적 주체는 서정시라는 장르와 자기 동일성의 시적 주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촉발시키고 항상 최초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시, 그 시적인 것에 대한 근원적 물음 속에서 자기 합리화로 귀결되지 않고 성찰적 주체로 거듭나는 시적 주체의 모색을 각인시켰다는 성과가 있다.
그러나 2008년부터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합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다수결에 의한 통치와 공권력의 치안 정치로 전환됨으로써 더 많은 상상력과 더 많은 언어의 자유를 감행하고 시도해야 할 시인들의 언어가 현실의 폭압적 상황과 직면해야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결과 시에 대한 논의는 2009년 「이것은 사람의 말―6․9 작가선언」 전후로 ‘시의 미학과 시인의 윤리’,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감각적인 것의 분배’, ‘시와 공동체’ 등으로 진행되었는데, 2016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한국시의 현장은 그 논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한편으로는 시의 윤리와 시적인 것의 정치성을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Todesfuge」만큼 미학적으로 성취한 시의 소식도 잘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한국 현실의 중압감과 시의 언어와 시인들의 무의식에 미치는 억압이 상당하다는 예증이다. 2010년대 한국시에 더 많은 상상력과 자유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나쁜 피Mauvais Sang」(『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다른 삶들은 있는가?(est-il d'autre vies?)”라는 랭보의 물음에 앙드레 브르통은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1924)」(『초현실주의 선언』, 황현산 옮김, 미메시스, 2012) 마지막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여름 장미는 파랗다. 숲은 유리다. 녹음의 옷을 입은 대지는 유령처럼 나에게 별로 깊은 인상을 심지 못한다. 산다는 것과 살기를 그친다는 것, 그것은 상상의 해결책이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합리성과 이성을 가장한 권력과 제도 교육, 그 규범적 언어의 통치가 심화될수록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삶은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착란 Ⅰ」, 『지옥에서 보낸 한 철』)는 선언이다. 장미는 붉고 숲은 초록이며 현실의 삶은 억압적이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수용하지 않는 저항적 태도와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상상력과 자유의 실천이 필요하다. 전복적 상상력과 그 시적 실천이 요구되는 현 상황에서 2010년대 한국시의 현장에 등장한 1980년대산(産) 안희연과 황유원의 첫 시집에 삽입된 현실의 억압과 그 현실에 저항하는 대홍수의 상상력, 그 무의식적 정치성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2. ‘옆’의 시쓰기와 실패의 정치성: 안희연의 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삶 전체를 바칠 줄 안다”
― 아르뛰르 랭보
2012년에 등단한 1986년생 안희연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작과비평, 2015)의 시적 주체는 정교한 언어로 설계한 침묵의 도약을 통해 시의 ‘절대’를 지향한다. 그 절대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무(無, Néant)’, 기하학적 질서로 스스로 운행하는 우주의 “별자리(UNE CONSTELLATION)”(「주사위 던지기UN COUP DE DÉS」)와 인접한 언어의 계보에서 연원한 것인데, 그것은 2010년대 한국시에서 일정한 시적 계보를 형성한 김종삼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북치는 소년」)에 근접한 근친 언어이다. 안희연은 무엇보다 ‘시쓰기 주체’로서의 삶을 자신의 실존적 근거로 삼는다.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 「백색 공간」 부분
그의 소망은 말라르메의 ‘대문자 책(Le Livre)’, 즉 우주가 완전한 우주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그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한 “단 한 권의 책”, “우연한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건축적이고 계획된, 한 권의 책이어야만 하는 한 권의 책(un livre qui soit un livre)”(「폴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1885년 11월 16일」)”을 갖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은 “미학의 가장 순수한 빙하들”(「앙리 까잘리스에게 보낸 편지-1866년 7월 13일」)로 가득한 무(Néant)로서 낱말과 낱말 사이,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더 나아가 ‘백색 공간’으로서 새로운 낱말들이 창조되고 그 의미가 생성과 유예를 거듭하는 책이다. 백색 공간은 일상 언어의 우연성을 배제하는 시적 주체가 필연적이며 기하학적인 언어를 건축하고 동시에 죽음을 감행함으로써 우연적 언어의 완전한 침묵과 보편적 언어가 탄생하는 백지의 대문자 책이다. 그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한 권의 책’이 품고 있는 ‘백색 공간’이 “완전한 침묵”(「백색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백색 공간은 일상이 아니라 “가시권 밖” “극지”이며 “텅 빈 캔버스”(「히스테리아」)이다. 안희연은 3편의 동일 제목 「백색 공간」을 시집에 배치해놓을 만큼 시의 순수 이념으로서 ‘백색 공간’에 대한 시적 지향을 밝힌다. 그의 백색 공간은 미학적 차원의 극지이며 시쓰기의 목표로서 현실의 억압과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시의 지향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쓰기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물의 실재와 순수 이념이 부재하는 언어를 호명할 때마다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시쓰기를 매번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불가능을 말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새를 호명”(「트릭스터」)하고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의 시쓰기는 매번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실존론적 불안을 발생시킨다. 안희연의 시는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백색 공간) 백색 공간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의 기록으로서 “일초에 하나씩/새로운 옆”을 만든다. ‘새로운 옆’은 백색 공간에 도달하지 못한 안희연의 고유 언어가 정립한 시의 실존적 위치이자 미학적 입장이다. 새로운 ‘측위(flanc-garde)’의 시쓰기이다.
그리하여 안희연의 측위의 시쓰기는 ‘내용 있는’ 아름다움의 옆에 위치한다. 옆의 ‘내용’은 한국의 역사적 지평 속에 실존하는 시인의 삶에서 발원한다. 옆의 ‘내용’은 한국어의 우연성을 배제하고 보편적 언어의 필연성을 건축할 우주적 언어의 설계도가 아직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시적 주체의 죽음을 통과한 ‘비인칭(Impersonnel)’으로 한 권의 책에 도달하는 말라르메적 시도를 하지 않은 시적 주체의 태도에서 발생한다. 그런 이유로 안희연의 시적 주체는 유한한 육체와 언어의 우연성을 극복하고 완전한 언어로서의 순수 이념의 탄생과 영원한 우주의 질서를 출현시킬 시적 주체의 죽음, 즉 비인칭을 감행하는 말라르메의 데카당스적 주체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에서 ‘낭만적 이로니(Romantische Ironie)’를 겪는 낭만적 자아에 더욱 근접하다.
모든 악몽 위에 세워진
고요의 땅
그곳으로
너를 찾으러 간다
―「선고」 부분
나는 온 힘을 다해 고요한 어항을 떠올렸지만 어항 뒤로
피투성이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화산섬」 부분
「선고」와 「화산섬」을 비롯한 여러 시편들은 영원한 시의 절대, 즉 “고요의 땅”과 “고요한 어항”에 도달하기 위한 성찰(Reflexion)의 무한 운동을 멈추지 않으면서 항상 자신의 “피투성이 얼굴”로 귀환하는 낭만적 자아의 성향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안희연의 시가 지향하는 ‘백색 공간’은 말라르메의 ‘한 권의 책’, 그 무(無)에 인접한 ‘낭만적 무한으로서의 절대’와 상사(相似) 관계에 놓여있다. 그의 낭만적 자아는 시의 절대를 지향하면서도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국경을 넘어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만”(「소인국에서의 여름」) “어둠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알게”(「개에게서 소년에게」) 된다. 그 낭만적 자아는 ‘백색 공간’의 상실을 멜랑꼴리(Mélancholie)로 경험하면서도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불안을 겪는다. 안희연 시의 낭만적 자아는 유한한 육체의 죽음을 감행함으로써 영원한 우주와 합일하려는 데카당스적 주체가 드물고 전위적 정치성으로 무장한 시적 주체 또한 희소한 2010년대 한국시의 특성이기도 하다. 안희연 시의 낭만적 자아의 멜랑꼴리와 자기동일성 유지 성향은 201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과 경제적 불평등 시대에 나타난 1980년대생 시인들의 무의식적 증상의 단면이다.
안희연 시의 ‘백색 공간’, 그 절대의 지향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미학적 전회를 겪는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은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수면 위에 드러내고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시인들은 다시, 참혹한 현실에 대한 시의 윤리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만 하는 시의 미학 사이의 관계를 재사유하였다. 안희연은 백색 공간의 ‘옆’에서 세월호 사건이 제기한 시의 윤리와 미학 사이의 고뇌를 측위의 시쓰기로 실천한다.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과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 사이에서
그는 내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주하라,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지금껏 수많은 지시어를 만나왔습니다 나에게는 예언의 새가 있고 언제나처럼 그것을 따라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검게 주저앉는 마을을 보면서부터 그때 나는 손 닿을 듯 가까운 언덕에서,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방향에 있었습니다
질문을 품었습니다 음악은 어디서 오는가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리란 애초에 삼켜질 운명을 지닌 것,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는 문장만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나에게 죽음을 공물로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의 새는, 아니 예언의 새일 거라는 믿음은, 눈앞에서 처참히 찢겼습니다 영혼이 실리지 않은 음표들이 차가운 유리 조각으로 쏟아집니다
―「피아노의 병」 부분
「피아노의 병」은 안희연의 측위의 시쓰기, 그 실존적 위치와 미학적 입장을 가장 적확히 드러낸 작품이다. 시인이 지향하는 ‘백색 공간’에서 ‘옆’의 현실적 지평으로 진화한 측위의 시편이다. 한권의 책. 그 절대를 피아노의 음악으로, 시쓰기를 피아노 연주로 비유한 「피아노의 병」은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서, 음악의 시와 애도의 시 사이에서, “예언의 새”와 “죽은 아이의 목소리” 사이에서,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과/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 사이에서” 번민하는 글쓰기 주체의 고백을 담고 있다. 그는 ‘한권의 책’, 그 미학적 절대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의 시쓰기에서 ‘죽은 아이의 목소리’를 담보하지 못한 실패의 시쓰기로 나아간 미학적 전회를 고백한다. 세월호 사건은 ‘가만히 있으라’는 한국 사회의 실재를 자각하는 변곡점이었음을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 시를 쓰지 못하는 날들의 고통으로 고백하고 시와 음악의 효용성을 성찰한다. 시쓰기의 모든 실패 속에서 현실의 폭력에 대한 시와 음악의 무력감을 토로하고 시와 음악의 가능성과 그 믿음을 회의한다. 그는 “바깥을 믿”(「러시안룰렛」)고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접어놓은 페이지」)고 “눈앞에 없는 새만이 진짜일 거라고 믿”(「프랙털」)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른 곳, 다른 곳은 없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어」) 말한다.
시인의 미학적 전회는 절대 언어의 불가능성과 완전한 애도의 불가능성을 한꺼번에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실패의 정치성을 획득한다. 그 실패의 정치성은 미학적 절대의 불가능성 뿐만 아니라 다른 삶의 불가능성까지 발생시키는 언어의 한계와 비극적 현실 인식 속에서 모든 실패의 흔적으로 남는 ‘옆’의 시쓰기로 발현된다. 그 옆은 “이제 검은 돌덩이의 아름다움을 믿어야”(「그럼 이건 누구의 이빨자국이지?」)하는 세월호 사건 이후의 현실이다. 절대 언어의 실현과 완전한 애도가 불가능한 옆의 시쓰기로 직시해야 할 한국의 현실이다. 지금, 시인은 2010년대 한국의 현실을 옆의 시쓰기로 살아낸다. “피아노는 흰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에 하루를 씁니다”(「피아노의 병」)라고 쓴다. 그는 “한번도 열린 적 없는 철문이 열리고//흐느낌처럼 새어나올 빛”(「세그루 나무를 사랑한 한 마리 지빠귀처럼」)을 생각한다. “흐느낌처럼 새어나올 빛”,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것이 안희연의 옆의 시쓰기이며 실패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의 미학과 윤리가 만나는 시의 실천 지점이다. 전복적 상상력과 무한한 자유의 언어가 출현하는 첫 출발점이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삶 전체를 바칠 줄 안다”(「취기의 아침Matinée D’ivresse」, 『일뤼미나시옹』)고 선언하는 날의 “보이지 않는 광선rayon invisible”(「초현실주의 선언(1924)」)이다. 안희연의 ‘옆’은 실패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실존적 위치이자 2010년대 한국시의 상상력이 전개한 미적이면서 정치적인 시의 정직한 성채이다.
3. 총칭의 시쓰기, 리듬의 정치성: 황유원의 시
“화성적이며 건축적인 모든 가능성들이 네 자리 주위에서 요동칠 것이다”
― 아르뛰르 랭보
2013년에 등단한 1982년생 황유원의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2015)의 시적 주체는 질주하는 상상력과 세계의 모든 소리로 사회적 규범의 질서를 교란하고 돌파한다. 그의 시는 법의 언어와 규범적 언어로 작동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음악으로 치닫는다. 시의 전면은 사물의 의미가 재구성되고 시의 배면은 리듬이 질주하며 그 의미를 지운다. 그의 시는 사물의 고정된 의미를 뒤흔들고 부숴버리는 말의 달리는 속도와 리듬으로 충만하다. 황유원의 시는 2010년대 한국시에서 자유시의 ‘자유’ 자체를 극대화하고 음악의 진공을 발명하며 그 진공 속에서 침묵의 언어가 솟아오르게 한다.
빗속에 울리는 종소리
그것을 우중(雨中) 행군이라 총칭한다
모든 것을 총칭하느라 아주 멀리까지 퍼진 종소리가
좍좍 비를 맞으며
불완전 군장으로
판초도 없이 푹
숙이고 간다
속옷까지 젖어 버린 종소리
이 지경까지 헐벗은 행군
종소리는 좌우로 밀착하고 종소리는 불현듯
천둥을 함축한다
…중략…
종은 종 안에 인간을 여기 다 풀어놓기로 한다
종소리는
죽지 않는다 낙오하지 않는다 오직 적멸을 들뿐
―「총칭하는 종소리」 부분(이하 강조도 필자)
「총칭하는 종소리」는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 수록된 다른 장형 자유시들처럼 고유한 미적 특성을 드러내며 세계에 대한 시적 태도와 미학적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총칭하는 종소리」는 2010년대 한국시에서 보기 드문 1연 72행의 장형 자유시인데, 황유원의 자유시가 구현되는 리듬의 전개 양상과 주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가 사물을 모방하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을 명명하는 언어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빗속에 울리는 종소리”에서 촉발된 청각적 이미지의 극대화는 고정된 사물의 분별과 그 의미를 모두 지우며 소리로 집중시킨다. 황유원은 그것을 “우중(雨中) 행군”이라고 “총칭”한다. 총칭(總稱). 전부를 모두 모아서 가리켜 말하는 이름. 총칭. 빗소리와 매개된 종소리가 환기시키는 모든 소리의 울림과 확장이 진행되는 ‘우중(雨中) 행군’을 총칭으로 명명하고 자유시로 전개할 때, 이제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한국어 가운데 ‘총칭’이라는 낱말은 온전히 황유원의 시적 언어로 탄생한다.
시의 인용 부분에서 강조한 시어들을 조금만 낭독해보면, ‘ㅈ’과 ‘ㅊ’만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어보면 「총칭하는 종소리」는, 가히 구개음(口蓋音) 예사소리 ‘ㅈ’과 거센소리 ‘ㅊ’이 번갈아 일으키는 빗소리와 종소리가 어우러져서 멈추지 않는 행군의 발자국 리듬 행진곡으로 들려온다. 그 리듬 속에서 “불현듯/천둥을 함축”하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ㅈ’과 ‘ㅊ’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강세(accént)의 규칙과 불규칙의 반복에서 발생하는 리듬은 「총칭하는 종소리」의 시적 의미가 생성되는 지점이다. 멈추지 않는 ‘우중(雨中) 행군’의 리듬은 “고층 빌딩의 견고함”(「바람 부는 날」), 그 현실의 억압에 대해 굴종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죽지 않는다 낙오하지 않는다 오직 적멸에 들뿐”이라는 시적 태도와 다르지 않다. “븅 븅” “븅 븅 븅” “부우웅븅븅 븅 븅”(「풍차의 육체미」)처럼 사물의 고정된 이름과 삶의 인습적 의미를 모두 지워버리는 ‘우중(雨中) 행군’의 모든 소리와 그 리듬의 극대화는 ‘총칭의 시쓰기’라고 부를 만하다. 총칭의 시쓰기는 ‘종(鐘)’ 안에 인간이라는 ‘종(種)’ 전체를 풀어놓는다. “인간은 하나의 소음”(「레코드의 회전」)이며 “지구 전체가 온갖 소리들의 녹음실로 밝혀졌을 때 그 이후의 삶이란 더 많은 재생 버튼을 찾아 그것들을 모두 눌러 주는 일”(「시베리아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사운드트랙」)이 황유원의 총칭의 시쓰기이다. 사회적 규범과 현실의 억압이 구속하는 삶을 세계의 모든 소리로 지워버리고 “불가능을 진동시키며 오로지 웅웅거림으로써만 기능”(「총칭하는 종소리」)하도록 현실의 삶을 정지시키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성시킨다는 점에서 황유원의 리듬은 정치적이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중략…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중략…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 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 본 적 있니!
―「세상의 모든 최대화」 부분
「세상의 모든 최대화」의 시적 주체는 리듬의 정치성을 길고 긴 자유시로 적극 표명한다. 세상의 모든 억압과 사회 체제에 짓눌린 삶의 관계를 아찔한 속도로 질주하는 화물 기차와 그 기차에 짓눌린 철로의 알레고리로 구현한다. 질주하는 기차의 거리와 무게와 시간만큼 짓눌린 철로는 현실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근대의 표상인 기차가 질주하는 거리와 무게와 시간만큼 짓밟히고 짓눌리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는 철로는 황유원 시의 윤리와 미학이 만나는 접점이며 리듬의 진원지이다.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이라는 진술은 현실에 저항하는 황유원 시의 리듬의 정치성을 발현한 선언이다. 그 리듬의 정치적 선언은 현실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억압하는 현실의 강도와 지속만큼 끝까지 저항하면서 그 현실을 초과하는 초현실에 근접하고 현실을 돌파하는 현실주의자의 시적 윤리와 미학을 압축한다.
황유원은 현실의 자리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한계로 치달아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리듬'이 정치적임을 안다. 황유원은 묻는다. 질주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견뎌”본 적 있는가를 묻는다. 그 리듬은 억압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가, 라는 정치적 물음이며 죽음으로 치닫는 삶의 속도를 직시하는 현실주의자의 성찰이다. 그 리듬의 정치적 물음과 성찰은 현실에 짓눌린 삶을 초과해서 “부서지는 문자들의 빛나는 꼭짓점”(「새처럼 우는 성(聖)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과 “물바다, 거대한 선박이 항해할 때 동반되는/소리의 커다란 모호함”(「halo」)에 도달한다. “투명하게/무음으로/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세상은 거의 사라”(「일체감」)지는 침묵에 도달한다. 그 침묵은 다른 삶의 가능성이 생성되는 진공이며 “영원한 영”(「항구의 겨울)」이다. 침묵에 도달하기 위한 무기는 백지에 ‘무한한 문형(文型)’을 출격시킬 수 있는 언어의 자유이다.
우리에게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최대한 많은 문형(文型)의 운용 능력과
지독한 어휘력
살면서 더러운 꼴을 당하면 당할수록
백지 위로 더 많은 예문들을 출격시킬 수 있는 자유
―「극치의 수피즘」
시인의 무기는 법의 언어와 규범적 언어, “사회적 통념의 확대재생산/기껏해야 자기 위안으로서의 이론적 지식들”(「변신 자라」)을 넘어서는 리듬의 정치적 글쓰기이며 사회 체제의 언어들을 리듬으로 소거하는 음악이다. 그 음악이 현실의 억압을 넘어서는 한계 지점에서 세계는 침묵하면서 “세계는 확장되고” “세계는 재구성되고”(「인식의 힘―Note on blindness」) 다른 삶과 다른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일단 사진으로 찍으면 정지.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 지금 막
펼쳐지려 하는 힘들이 만들어 내는
그대들의 온갖 선(線)들도
그대로 정지.
그러나 찍기 전까지는 선회,
찍고 난 후에도 선회,
둥글고 둥글게 사과를 깎는 것처럼
공중의 껍질을 밀어내듯 부드러운 과도(果刀)의 동작으로 선회
새들이 선회한 자리에선 사과 향기가 나고
더 큰 원을 그려 봐야 원은 끊어지지 않아
다만 바닥에 떨어지는 사과 껍질처럼 착지할 뿐
―「새들의 선회 연구―한 장의 사진」 부분
「새들의 선회연구―한 장의 사진」은 하늘에서 선회하는 새들을 한 장의 사진으로 찍은 순간에 대한 시적 사유를 전개한다. 무엇보다 “정지/착지”와 “선회”의 각운(脚韻)을 계산한 시의 리듬은 정지한 ‘영(零)’의 속도와 선회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하는 중단과 지속, 추락과 비상의 심리적 효과를 생산하고 비상하는 새와 대비되는 현실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적 의미를 암시한다. 중단 없는 새의 비상과 선회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 정지된 상태의 침묵으로 멈춘다. 하늘을 가르는 새의 비상과 선회는 청각을 자극하는 바람소리를 들려주지만 찍힌 사진 속에서 새의 정지는 완전한 침묵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삶의 지속과 방향 전환은 소음을 발생시키지만 아름다움은 죽음에 근접한 삶의 정지된 침묵 속에 있다는 황유원의 시적 인식이다.
불현듯 황유원은 그 시적 인식을 증폭시킨다. 새들의 선회를 사과 껍질 깎기라는 상상력의 경이로 전환해내고 “새들이 선회한 자리에선 사과 향기”를 맡는다. 그는 침묵의 아름다운 시각적 이미지에서 ‘사과 향기’의 후각적 이미지로의 비약적 전환과 세계의 확장을 이뤄낸다. 시각이 가시적 세계의 감각이라면 후각은 비가시적 세계의 감각까지 현실의 주체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과 향기’는 “사과의 속살 같은 하늘”, 현실 너머의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실재이다. 그러나 정지된 새의 침묵과 정지된 삶의 순간은 지속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새는 비상하고 선회해야 하며 현실의 삶은 지속되고 전환되어야 한다. 선회한 새는 날아가지만 삶은 사과 껍질처럼 현실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유원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한 바와 같이, 삶의 “원은 끊어지지 않아/다만 바닥에 떨어지는 사과 껍질처럼 착지할 뿐”이라며 시의 윤리와 미학을 견지한다. “내용 없는 오후 같은 너의 언덕”에서 “너처럼 나도 그렇게 항상/네 옆에 있을 것”이며 “함께. 다시 날아오를 것”(「새들의 선회연구―한 장의 사진」)이라고 결의한다.
그런 점에서 황유원의 총칭의 시쓰기는, 세상의 모든 최대화와 현실의 최대화로 현실에 끝까지 저항하는 “화성적이며 건축적인 모든 가능성들이 네 자리 주위에서 요동칠”(「젊음Jeunesse」, 『일뤼미나시옹』) 리듬을 통해 사회 체제와 규범적 언어를 돌파하는 2010년대 한국시의 정치적이며 미학적인 참호이다. 무의식의 해방과 전복적 상상력을 가로막는 한국의 현실에서 ‘전위의 후위(arrière-garde d'avant-garde)’로서 다른 삶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출현시키려는 현실주의자의 “절대적 비순응주의non-conformisme absolu”(「초현실주의 선언(1924)」) 미학이다.
4. 대홍수 뒤에
투시자의 편지에서 “미지의 발명은 새로운 형식을 요청한다”는 랭보의 전언에 2010년대 한국시의 안희연과 황유원은 ‘옆의 시쓰기’와 ‘총칭의 시쓰기’로 답한다. 옆의 시쓰기와 총칭의 시쓰기는 1980년대생 시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201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과 심화된 경제적 불안의 강도와 지속을 보여준다. 안희연의 시가 무한한 절대와 완전한 애도를 지향하지만 실패하는 낭만적 자아의 멜랑꼴리적 시쓰기로 현실을 응시하고 있다면 황유원의 시는 현실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현실의 최대화로 치닫는 현실주의자의 리듬의 정치성으로 현실을 초과하려고 한다. 그들의 시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 체제의 문제를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라는 시의 윤리 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 표현의 차원에서 각자의 미학을 성취하고 있다. 안희연의 낭만적 자아와 황유원의 현실주의자는 자기동일성의 원리 속에서 현실에 대한 시적 주체의 멜랑꼴리와 저항을 각자의 언어로 정립한다. 그들은 미학적 입장이 다르지만 2010년대 한국 사회의 중압감과 현실의 억압을 그만큼 함께 짊어지고 시의 공동체 안에서 시의 윤리로 연대하고 있다. 그들의 시는 2010년대 한국시가 미학적으로 진화한 1980년대생 시인들의 교두보이다. 시는 다시, 그 교두보 너머로 물결치기를 원한다. 멈추지 않는 대홍수를 원한다.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 솟구쳐라, 연못이여, ― 거품이여, 다리 위로, 숲 너머로 굴러라, ― 검은 담요들과 오르간들이여 ― 번개와 천둥이여, 높아져라, 굴러라, ― 물과 슬픔이여, 높아져라, 다시 일으켜라, 대홍수들을.
대홍수가 가라앉은 뒤에, ― 오 묻혀있는 보석들과 피어있는 꽃들이여! ― 그것은 권태일뿐이기에! 그리고 여왕(la Reine)은, 토기에 잉걸불 일으키는 마녀는 자기가 알고 있고 우리가 모르는 것을 결코 우리에게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아르뛰르 랭보, 「대홍수 뒤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