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풍경감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현진 Mar 04. 2024

평소보다 짙은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학교 화장실에는 그리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얀 전등이 천장에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 평범한 회색 가벽이 화장실 두 칸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가벽과, 가벽에 붙은 화장지,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여러 개로 어수선하게 흩어져 보였다. 그런데 그날 밤 가벽과 바닥 사이의 한 뼘이 채 되지 않는 그 틈에는, 여러 개의 그림자가 모여 만든 검고 선명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휴대폰을 쥔 손이 불쑥 튀어나와 찰칵하고 셔터 소리를 냈다.


설계스튜디오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다음날까지 결과물을 제출해야 했고, 그래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환하게 불이 켜진 설계실에는 과제를 하는 동기들이 모여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가벽 아래로 손을 뻗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였는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모른다. 혹시라도 해코지를 할까 무서워 따지기는커녕 누구인지 확인조차 못했고, 옆 칸에 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간 뒤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낯선 화장실에 갈 때면, 바닥과 가벽 사이의 틈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길게 늘어져 흐늘거리는 휴지 그림자 위로,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쥔 낯선 손이 불쑥 솟아오를 것 같아서다. 10cm도 되지 않을 그 틈을 막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손이 닿을 듯한 낮은 높이의 가벽도, 그리고 벽면의 크고 작은 구멍도 전부 신경 쓰인다. 오래전 짙은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야 할 화살을 작은 틈에 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막아주는 매끈하고도 완전한 벽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월간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에 2022년 11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