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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진 Mar 18. 2024

풍경 도둑


나의 산책 코스는 동네 아파트 단지였다. 곳곳에 조성해 놓은 작은 쪽문을 통해 들어서면 산수유길, 조팝나무길 같은 작은 산책로가 있었고, 이 길들은 크고 작은 정원과 어린이놀이터, 연못과 인공 실개천, 광장, 테니스장으로 연결되었다.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재잘거리는 아이들, 비 오는 날의 개구리 소리와 우비 입힌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우비 입은 사람. 무해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지난봄부터 이곳으로 발길을 끊었다.


산수유가 지고 조팝나무꽃이 하얗게 피던 때, 아파트 단지 외곽에는 진회색 울타리가 들어섰고, 누구나 드나들던 쪽문에는 입주자 카드나 비밀번호 없이는 열리지 않는 문이 설치되었다. 낯선 인기척에 잠 못 이루는 이가 있었던 걸까? 소음, 보안, 그리고 코로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짐작 가는 원인은 여럿이다. 여전히 경비원이 상주하는 정문과 배달 차량 출입로는 열려있지만, 이젠 풍경을 도둑질하는 기분이라 들어갈 수 없다.


닫힌 문 앞에는 손수레를 손에 쥔 할머니들이 서성이곤 했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시장에 다니시던 분들인데, 입주자가 지나갈 때 열린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시는 듯했다. 나는 이제 먼 곳으로 작업실을 옮긴다. 내가 다른 산책 코스를 만드는 동안, 그 아파트의 문들은 계속 잠겨 있을까? 할머니들은 계속 기다릴까? 아니면 장본 것을 끌고 빙 돌아 집으로 돌아갈까? 아무튼 봄이 오면, 진회색 울타리 안에 노란 산수유와 하얀 조팝나무꽃이 필 거다. 


*월간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에 2023년 3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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