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이 아닌, 프랑스식 새해 첫 성찬
‘신년음악회’ 하면 대부분 빈 필하모닉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생화가 장식된 황금홀(무지크페어라인)에서 듣는 슈트라우스 가의 왈츠, 힘찬 박수와 함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마무리하는 이 음악회는 무려 80년이 넘도록 전 세계로 송출되며 새해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신년음악회는 어떤 모습일까?
정형화되지 않은 프랑스의 신년 음악회
프랑스 오케스트라들도 매년 신년음악회를 열지만, 빈의 것만큼 레퍼토리나 방식이 정형화되어 있지는 않다. 사실 새해 첫날 전후로 콘서트를 여는 것 자체가 근 10 년 정도 사이에 생긴 유행이다. 2018년 1월 1일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이 공개적으로 남긴 트윗 “파리에서는 큰 신년 음악회를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연주홀과 훌륭한 음악가들이 있습니다. 멋진 이벤트를 위해 우리의 의지와 야심이 필요한 때입니다”만 보아도 빈에 필적할 신년음악회를 원하는 이곳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프랑스의 신년음악회 역사가 길지 않은 이유로는 먼저 가톨릭 전통인 ‘레베이용(Réveillon)’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레베이용은 성탄절과 신년 자정 무렵 긴 시간 이어지는 세 차례의 미사를 뜻한다. 미사 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성대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동안 저녁 식사와 자정 미사 사이에 악단 신년음악회가 끼어들 틈이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근대 프랑스에 중앙집권 권력이 부재했던 상황을 들 수 있다. 빈의 신년음악회가 시작된 해는 1939년이다. 빈 출신 연주가들이 빈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일종의 ‘애국심 고취’ 목적으로 기획된 이 연주회는 빈 필을 지원한 나치라는 거대한 군부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공화정과 군주정, 혁명 세력이 번갈아 집권하다 세계대전까지 맞았고, 따라서 꾸준히 음악계를 지원할 세력도 부재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궁정 발레가 대중의 춤곡으로 확산되며 지역 축제들의 기반이 되는 등 빈의 왈츠에 대항해 프랑스 춤곡의 장을 열 여지도 많았지만, 이 흐름을 묶어 하나의 완성된 행사로 기획할 주체(혹은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빈 필이 두 번째 신년음악회를 열던 해 프랑스는 나치의 비시 프랑스와 드 골의 자유 프랑스 두 나라로 아예 갈라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신년음악회를 게르만 전통이라며 연주를 꺼린 탓도 있다. 오랜 역사적 앙금과 전후 영향이 크다. 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신년음악회가 악단들의 정기 행사로 자리 잡았다. 클래식 음악이 고급문화라는 콧대를 조금 낮추고, 신년음악회를 대중과 오케스트라, 시민과 음악가 사이의 연결을 강화하는 기회로 본 것이다.
현재의 신년음악회
프랑스식 신년음악회의 선봉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다. 특히 에마뉘엘 크리빈 시절(2017~2020 재임)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목적에 충실했던 신년음악회들은 다음 지휘자 크리스티안 마셀라루(2020 취임~ )가 잇고 있다. 올해 음악회는 ‘오펜바흐와 친구들’이라는 주제로 조성진과 함께 파리와 엑상프로방스 등지를 투어했다. 오펜바흐 작품을 비롯해 샤브리에의 부레, 생상의 하바네라, 라벨의 볼레로 등 춤곡을 위주로 꾸렸다.
라디오 프랑스 필은 지휘자 미코 프랑크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신년음악회 고정 레퍼토리로 삼겠다고 선언한(2016) 이래 꾸준히 이를 이어오는 중이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신년음악회를 좀체 열지 않는다. 파리 필하모니의 올해 신년 연주는 프랑수아 자비에 로트/레 시에클이 꿰찼다. “프랑스식 신년 음악회”라는 타이틀을 위시해 “평화와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레 시에클은 기쁘게 게르만 전통에 희생한다.”는 강력한 서두를 붙였다. 생상스, 구노, 비제부터 뒤부아, 마스네의 춤곡 등 프랑스 춤곡의 황금기였던 제2제정기(1852~1970)부터 20세기 초까지 작품을 다뤘다.
어떤 레퍼토리들이 연주되나
프랑스 신년음악회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작곡가는 오펜바흐다. 독일 태생이지만 파리에 정착한 프랑스 국민 작곡가로, 오페레타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 브로드웨이에 보드빌이, 웨스트엔드에 코믹 오페라가 태동했듯 파리에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오페라 부프)가 대중에게 다가갔다. 신년음악회에는 흥을 돋우기 제격인 그의 춤곡이나 오페레타 서곡들이 주로 올라온다. 우리가 아는 프렌치 캉캉의 멜로디가 있는 ‘천국과 지옥’ 서곡(1858)이 대표적이다. 샹젤리제 극장에서는 신년을 맞아 그의 오페레타 ‘파리지엔느의 삶(La Vie parisienne)’이 상연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1830)이다. 신년에는 왈츠풍의 2악장 ‘무도회(Un bal)’를 떼어 연주한다. ‘환상교향곡’은 표제 교향곡의 효시이자 고정악상의 도입, 자유로운 악기 편성 등 프랑스 근대 관현악법의 역사를 쓴 작품으로, 당시 독일식 교향악에 대항할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작품은 프랑스 악단에 부임한 지휘자들이 거치는 관문으로도 유명하다. 전설적인 샤를 뭉크 지휘의 파리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에도, 지난해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에 부임한 두다멜도 이 곡으로 신고식을 치렀다.
그 외 라벨의 ‘볼레로’나 ‘라 발스’, 구노의 ‘파우스트 왈츠’, 생상스나 폴 뒤카의 춤곡 등이 자주 연주된다. 특히 ‘라 발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로 대변되는 19세기 빈의 호화로운 이미지의 왈츠를 해체해 거칠고 세속적인 세계로 끌어온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신년의 ‘새로운 왈츠’로서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 이 글은 월간객석 2022년 1월호에 실린 기사 <프랑스의 신년음악회>의 원문입니다.
* 메인 사진 : 에마뉘엘 크리빈/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Radio France/Christophe Abramow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