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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Dec 30. 2022

전대미문의 창조자

파리 필하모니 ‘크세나키스 혁명’전 (2.10~6.26)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지난 5월은 이안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 2001)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20세기 음악사에 독특한 흔적을 남긴 작곡가이 자 건축가·엔지니어·음향학자·컴퓨터음악가… ‘작곡가’로 알려진 크세나키스는 사실 음악만으로 포괄할 수 없는 전방위 예술가다. 그 스스로 “과학과 예술을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음을 클러스터화하고, 악보를 그래픽화해 발전시킨 그의 작품들은 ‘음량’을 통해 ‘음색’ 개념에 혁명을 일으켰다. ‘청각’(소리)을 수학·건축(이론)적 으로 조직해 ‘시각’(악보 및 공간 연출)과 융합한 시도들은 동시대 다원예술의 조상 격이기도 하다. 


자신이 발명한 사운드 합성 장치 UPIC 앞의 크세나키스
크세나키스가 1970년 오사카 엑스포를 위해서 쓴 전자음악 '히비키 하나 마(Hibiki hana Ma)'의 악보 © Famille I Xenakis

프랑스는 그리스에서 망명한 크세나키스의 주 무대였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각별히 많은 행사가 열렸다. 파리 필하모니 음악 박물관 역시 ‘크세나키스 혁명’전으로 그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봤다. 마리 폴린 박물관장은 크세나키스를 “20세기의 자양분이 된 예술가이자, 가장 급진적인 모더니티를 지향한 ‘전대미문의 창조자’였다”고 회상했다. 


20개의 작품과 220여 개의 소장품들로 채워진 전시는 크세나키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요점적으로 짚은 친밀하면서도 함축적인 아카이브였다. 


크세나키스 혁명 전경. 파리 필하모니 박물관에서 작곡가를 다룬 전시는 피에르 불레즈 90세 기념 전시, 피에르 앙리 스튜디오 설치(2019) 이후 세 번째다.


음악, 수학, 건축의 경계를 허물다 

검은 마감의 전시장은 어두웠다. 전시물에만 미약하게 흰 조명이 드리웠다. 30분마다 음악과 조명을 결합한 ‘디아토프’(1978)가 상연되기 때문이다. 약 1,600개의 플래시가 전자음악 ‘에르의 전설’ (1977)에 맞춰 연주되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천장에 일렬로 수정 배치됐다. 불이 완전히 꺼진 뒤 ‘디아토프’가 시작되면 전시장은 마치 시공간 경계가 사라진 5차원의 일부처럼 변한다. 


이처럼 전시장은 그의 아이코닉한 작품들이 재생되는 공연장이기도 했다. 입구에서 재생된 ‘콘크리트 PH’(1952)는 크세나키스가 1952년 브뤼셀 만국 박람회를 위해 설계한 필립스 파빌리온에 쓰인 음악이다. 청중이 입구를 드나들 때마다 작품이 연주되던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좌) 아테네 시절의 크세나키스, 1944년 경 (우) 르 코르뷔지에와 일하는 모습 © Famille Iannis Xenakis


전시는 여섯 장면으로 이루어졌다. 1장은 생의 초반부터 파리로 정착하기까지 여정이다. 루마니아에서의 어린 시절과 건축을 공부한 아테네 대학 시절, 당시 겪은 그리스 내전과 군주제에 대항한 인민 해방군 활동, 그로 인한 숙청 위기와 파리 망명... 해방군 시절의 총격 소음과 날것의 리듬은 훗날 그의 음악어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 정부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선고는 1974년이 되어서야 철회됐다. 해방군 시절의 사진들과 망명을 위한 위조 신분증 등은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 예술가 이전의 사람으로서 크세나키스의 뿌리를 들추었다. 


2장은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건축 스튜디오에서 일할 당시 설계한 ‘필립스 파빌리온’(1952)이다. 거대한 쌍곡선의 파빌리온 안에 바레즈와 325개의 스피커로 사운드를 채워 건축과 음악의 연관성을 실험했다. 파빌리온의 설계도와 실제 모형 및 아이디어 노트들이 생생하다. 그에게 작곡가로서 명성을 안긴 ‘메타스타시스’(1954)의 원본 악보를 보면, 작품의 글리산도 패시지들이 파빌리온의 곡선과 닮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만났던 스승 메시앙과의 기록도 있다. 


(좌) 필립스 파빌리온© Wouter Hagens (아래) ‘메타스타시스’(1954)의 원본 악보 © Famille I Xenakis

3장부터는 작품을 토대로 크세나키스의 실험을 좇는다. 모눈종이에 점을 찍어 음높이를, 점들을 이어 음길이를 나타낸 관현악곡 ‘피토프락타’(1956)의 악보는 자체로 시각 음악이다. 악기마다 생성된 점-선 덩어리들은 실제 음향 클러스터가 어떻게 나아가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피토크락타(Pithoprakta)'가 궁금하다면, 위 영상으로 디지털그래픽화된 악보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 Pierre Carré
청중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테르테크토르' 배치도, 1965  © Famille I Xenakis


4장은 온천탕을 레이저와 증폭된 음향으로 채운 ‘폴리토프’(1974)로 ‘소리와 빛, 공간에 대한 유기적 실험’을, 5장은 관악 주자가 움직이며 연주하는 ‘이온타’(1963), 오케스트라가 청중 속에 흩어져 연주하는 ‘테르테크토르’(1966) 등으로 ‘소리의 공간화에 대한 오케스트레이션적 실험’을 다뤘다. 컬러풀하게 도식화된 악보는 하나의 시각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장은 그가 발명한 사운드 합성 장치 UPIC을 조명했다. 


클뤼니 온천탕(좌)과 퐁피두 센터 앞 천막(우)에서 상연된 폴리토프, 디아토프 모습 © Famille I Xenakis
크세나키스가 발명한 사운드 합성 장치 UPIC © Famille I Xenakis


전시는 수학 이론이 빽빽이 설계된 그의 음악처럼 밀도 높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2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전시장을 나설 수 있었으니. 장면에 맞추어 그의 음악을 재생할 수 있도록 오디오 플레이어가 제공된 덕분에, 비물질인 음악을 건축과 시각 악보로 도식화해 음악을 가시화한 그의 작업을 거꾸로 도식과 악보를 통해 비물질인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어두운 내부 탓인지, 반복되던 ‘디아토프’ 탓인지, 긴 터널 속에서 어떠한 의식을 치르고 나온 듯했다. 마치 음악과 공간, 제의가 결합된 고대 그리스 극장처럼. 그 가운데 크세나키스가 다시 원론을 묻는다. 음이란 무엇인가, 소리는, 공간은 무엇인가? 음악은 무엇인가? 다차원적 융합이 대세인 지금, 그 경계를 선구적으로 허물었던 그가 말이다. 


글 전윤혜(프랑스통신원) 사진 파리 필하모니 


* 이 글은 월간객석 2022년 6월호에 실린 기사 ‘전대미문의 과학-예술가’ 초고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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