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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Jan 25. 2023

음악 애호가의 눈으로 본 칸 영화제

제75회 칸 영화제 취재기 ②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제75회 칸 영화제(2022.5.17~5.28) 취재기 ②편


- 영화는 ‘보는’ 만큼 ‘듣는’ 것이기도 하다

- 영화음악의 전설, 가브리엘 야레드의 음악 수업

- “영화는 현대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

- 유일한 러시아팀 진출작 ‘차이콥스키의 아내’

- 아내의 눈으로 보는 차이콥스키

- 러시아 문화 보이콧에 대한 키릴의 답변

- 완벽한 미장센의 표본 ‘헤어질 결심’

- 강렬하게 기억될 말러 교향곡 5번




영화는 ‘보는’ 만큼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음악 애호가들에게 칸 영화제는 음악상 수여가 없어 예측의 재미는 덜하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곳곳에 즐길거리들이 있다. 특히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영화음악들을 최초로 듣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경쟁 부문에서는, 당나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이랴’(EO)의, 가장 미약한 존재에 가장 우주적인 음악을 병치한 감각이 놀라웠다.(음악 Paweł Mykietyn)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아마겟돈 타임’의 회상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음악 Christopher Spelman)이나 아르노 데스플레생 ‘형제자매’의 위태로운 피아니즘(음악 Grégoire Hetzel)에 매료될 만했다.


‘이랴(EO)’
‘아마게돈 타임’
‘형제자매’


비경쟁 부문에는 무려 3편의 음악 영화가 상영됐다. ‘물랑루즈’로 잘 알려진 바즈 루어만의 ‘엘비스’, 피아노 스타일 로큰롤의 대명사 ‘제리 리 루이스’의 자취를 좇은 이선 코엔의 동명 다큐멘터리, 데이비드 보위를 다룬 영화이자 현지의 열렬한 호평을 받은 ‘문에이지 데이드림’이다.


(좌) ‘제리 리 루이스’ (우) ‘엘비스’
‘문에이지 데이드림’


영화음악의 전설, 가브리엘 야레드의 음악 수업

24일에는 영화음악 작곡가 가브리엘 야레드의 강의가 있었다. 야레드의 영화음악 경력 50년을 축하하며 그에게 오스카 상을 안긴 ‘잉글리시 페이션트’ 부터 올해 감독 주간에 초청된 ‘스칼렛’까지, 클래식 음악에 바탕한 그의 작업들을 작곡가 본인과 평론가의 대화 형식으로 돌아봤다.


대위법을 통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 ‘리플리’의 도입부, 미니멀리즘 음악을 요구한 자비에 돌란 감독에게 “세상에서 가장 미니멀한 음악은 바흐”라며 결국 바흐풍 음악으로 선회시킨 ‘단지 세상의 끝’ 엔딩 장면, 올해 칸 영화들 중 가장 고전적으로 아름다웠던 ‘스칼렛’의 음악 작업 과정 등,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들이었다.


가브리엘 야레드의 음악 수업 © Yoonhye Jeon
영상과 음악 모두 고전미가 빛난 감독 주간 상영작 ‘스칼렛’. 야레드가 음악을 담당했다


“영화는 현대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

앞선 22일 저녁 레드 카펫에는 야레드를 비롯해 ‘클로즈’의 발랑탱 아자즈, 개막작 ‘파이널 컷’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등 영화음악 작곡가 30명이 함께 계단을 오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아자즈는 “영화는 현대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라며 “칸에 영화음악상이 없는 것은 오래전부터 논쟁거리다. 음악상을 제정한다면 또한 다른 분야에도 상을 제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번번이 옆으로 제쳐지는 작곡가들의 공로는 분명히 조명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정교와 정치 체제를 비판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스튜던트’(2016)

유일한 러시아팀 진출작 ‘차이콥스키의 아내’

러시아 감독·연출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여러모로 이슈였다. 첫째, 러시아 작품인 것.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공개적으로 반전을 지지하는 감독의 작품이자 전쟁 전에 제작을 끝났기에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둘째, 키릴의 가택 연금이 올해 해제되어, 6년 만에 칸에 돌아온 것. 모스크바 고골 센터의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는 유럽 연극·오페라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가진 연출가다. 2017년 푸틴은 그를 가택연금시켰다. 표면적 죄목은 ‘고골 센터의 공금 횡령’이지만, 실상은 영화 ‘스튜던트’(2016)에서 러시아 정교와 기성 체제를 비판한 이유로 푸틴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 중론이다.


(좌) ‘레토’ 포스터 (우) 가택연금으로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한 세레브렌니코프를 대신해 그의 이름표를 들고 오른 배우들 © ALBERTO PIZZOLI / AFP

때문에 전작 ‘레토’(2018) ‘페트로프의 플루’(2021)가 칸 경쟁 부문에 초청됐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유태오를 비롯한 ‘레토’의 주연 배우들은 항의의 표시로 그의 이름이 적힌 패널을 들고 레드카펫을 올랐다. 키릴은 연금 동안 두 편의 영화를 감독하고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나부코’, 빈 슈타츠오퍼의 ‘파르지팔’ 등을 원격으로 연출했다. 올 초 구금은 해제됐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연출의 오페라들. (좌) 취리히 오페라 ‘코지 판 투테’ (우) 베를린 코미셰 오퍼 ‘세빌리아의 이발사’


아내의 눈으로 보는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의 아내’ 최초 상영일인 18일 3시 뤼미에르 대극장, 키릴 팀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장했다.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광적인 팬이었던 아내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시선으로, 또 그녀의 비참한 결혼 생활을 통해 차이콥스키의 삶을 들여다본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음악가에 관한 영화지만 오로지 음악에 대한 영화는 아니”라고 했던 키릴의 말처럼, 우리가 ‘차이콥스키’하면 떠올릴 발레 음악이나 교향곡들은 들어가 있지 않다. 안토니나의 사랑을 표현하는 피아노 소품들이 드문드문 연주될 뿐이다. 키릴은 영화를 통해 차이콥스키 천재성의 핵심에는 타고난 재능, 실패한 결혼(아내에 대한 혐오), 성적 취향, 그로 인한 삶의 비극들이 모두 동등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고고히 헤엄치는 백조 같은 차이콥스키의 음악만을 들어온 우리에게,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그 아래 험한 갈퀴질을 보여준 것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컷


작품의 중심이 되는 아내의 광적인 사랑은 오래된 건물과 도구들의 생생한 효과음, 러시아 정교와 아내의 기복 신앙들, 남성 중심 사회의 고압적인 태도 등 19세기 러시아 생활상의 충실한 묘사에 둘러싸여 더욱 증폭되며, 차이콥스키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시간순으로 흘러가는 아내의 이야기를 담기에 2시간 30분의 러닝 타임은 긴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의 무용 신은 집중력을 흩뜨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힘을 여러 갈래로 분산시켜 아쉬웠다.


상영이 끝난 뒤 키릴은 러시아어로 “전쟁을 반대한다”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다음날 저녁 한 여성이 레드카펫 위에서 갑자기 드레스를 벗고 “우크라이나를 강간하는 것을 멈추라”라고 쓴 나체를 드러내며 시위를 벌였다.

(좌) ‘차이콥스키의 아내’ 최초 상영 후의 세레브렌니코프 감독과 배우들 (우) 무거운 분위기의 기자회견 © Yoonhye Jeon


러시아 문화 보이콧에 대한 키릴의 답변

기자회견에서 ‘차이콥스키의 아내’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러시아 문화 보이콧에 대해 아주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러시아 보이콧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들에겐 러시아어가 들린다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를 전면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공기고, 물이고, 구름 같은 것이다. 국적과 무관한 독립적인 요소다. 러시아 예술에 대한 보이콧은 때로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러시아 예술은 언제나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가치, 인간애를 상정하며 약 자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다. 우리에게 도스토옙스키, 체홉, 톨스토이, 차이 콥스키, 음악과 연극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다. 러시아 예술은 언제나 반전(反戰)을 말한다. 문화예술계는, 전쟁으로부터 이러한 인간적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기자회견 중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 Maxence Parey / FDC


완벽한 미장센의 표본 ‘헤어질 결심’

23일 상영된 ‘헤어질 결심’은 완벽하게 조직된, 아름다운 미장센의 표본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스웨덴의 범죄 소설에서 본 배려심 있고 예의도 갖춘 형사”와 “한국가요 ‘안개’를 사용하는 로맨스 영화를 만 들고 싶다는 생각”이 합쳐져 ‘헤어질 결심’이 탄생했고 밝혔다.


모티브가 된 정훈희의 ‘안개’(1967)는 어두운 도시 이포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희뿌옇게 감싼다. 그 모호성은 컬러와 음악에도 녹아 있다. 녹색인 듯 파란색인 듯 보이는 청록색은 해준(박해일 분) 집의 벽지와 서래(탕웨이 분)의 옷, 절의 단청 등에서 끊임없이 눈을 시험한다. 깊지 않게 겹쳐진 현악의 레이어들은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며, 스타카토와 도약들은 가벼우면서도 미스터리하게 안갯속을 뚫고 나올 듯, 고개를 들고 튀어 오를 듯 넘나 든다. 음악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조영욱 음악감독이 맡았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과 포스터

강렬하게 기억될 말러 교향곡 5번

‘올드보이’ 속 비발디 ‘사계’와 ‘친절한 금자씨’의 비발디 칸타타 등 클래식 음악으로 특정 장면을 강렬하게 각인시켜 온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도 그에 필적할 장면을 만들어냈다. 말러 교향곡 5번과 연결한 등산 장면이다.


등산을 즐기는 서래의 전 남편은, 산을 오르며 “말러 5번을 틀고 (등산을) 시작하면 4악장 끝날 때쯤 도착하고, 정상에서 5악장을 듣고 하산하면 완벽하다”라고 말한다. 산의 높이는 계단 층수로, 산행 시간은 음악의 길이로 치환해 ‘등산’이라는 막연한 행위가 단번에 체감되게끔 공감각적으로 완벽하게 설계했다.(이는 해준이 사건의 전말을 깨닫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연 안개 아래 모호한 듯 치밀하게 설계한 작품의 밀도는 직접 극장에서 감상하며 느껴보시길.


기자회견 중인 박찬욱 감독 © CJ ENM

말러 5번을 택한 이유를 물은 필자의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사실 말러 교향곡 5번은 쓰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도망 다녔다. 설정상 서래의 남편이 고전 음악 애호가인데, 그가 등산을 하면서 들을 만한 곡이 무엇일까, 또 등산 시간과, 편집과 어울리는 무드는 무엇일까. 모두를 고려했을 때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말러 5번으로 돌아오게 되더라. 사실 4악장 아다지오는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너무 완벽하게 사용됐기 때문에, 그걸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졌다’ 생각하고 말러로 돌아왔다. ‘말러 5번 4악장은 비스콘티만 쓰란 법 있나?’(웃음) 생각하면서”라고 답했다.


글 전윤혜(프랑스 통신원)


* 이 글은 월간객석 2022년 7월호 ‘3년 만에 돌아온 영화의 전당’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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