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의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구한말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때(1897.10.12.)부터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경술국치(1910.8.29.)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자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성행한 제국주의 시대와 겹친다.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바탕으로 한 침략주의적 경향이 세상을 지배하던 때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 각국은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전되었고,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강대국들은 침략적 방법으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산업적으로 저개발 지역인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주요 대상이었다. 일찍이 공업화를 추진한 영국과 프랑스가 저만치 앞서 나갔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소련 등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한제국 전후는 우리 민족에게도 피해 갈 수 없는 격랑의 시기였고, 짧은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한반도를 두고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급급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나라와 인물들을 내세웠다. 주인공들은 고초를 겪고, 또한 갖은 노력을 다 해보지만, 결국은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여인의 생애
임오군란(1882)은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흥선대원군은 텐진으로 끌려갔다. 이 일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일본은 텐진 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침입했다. 청일전쟁(1894) 이후 일본은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주한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낭인들을 고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이 벌어진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를 맞아 1995년 초연을 했다. 코로나 19와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으로 공연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최근 25주년 공연을 성료 했다. 그간 한국적인 노래와 군무 화려한 무대의상과 회전무대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국내 창작 뮤지컬로 유래 없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명성황후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가는 늘 따라붙었다.
뮤지컬의 성공은 드라마와 영화 제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2001년 드라마 <명성황후>가 제작되었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나 가거든’이 OST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은 명성황후 ‘민자영’과 호위무사 ‘무명’의 사랑을 내세웠다. 역사적 인물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흥행요소인 멜로와 무협을 아우르고자 했다.
<잃어버린 얼굴, 1985>(2021)은 2013년 초연을 한 창작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임오군란 당시 어머니를 잃은 휘는 사진관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한성순보 기자인 기구치는 암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왕비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구하고자 한다. 얼굴이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왕비는 사진을 찍기를 계속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은 모두 구설수를 각오해야 한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시아버지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하고, 온갖 미신에 빠져 국고를 탕진한 민비와 탁월한 여성정치가이자 국권침탈에 대항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아관파천과 헤이그 밀사 파견
을미사변 이후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갔다. 아관파천 1년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국호는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정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환구단(사적 157호)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을 원칙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 했다.
<가비>(2012)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대한제국을 준비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에서 커피와 금괴를 훔치던 일리치와 따냐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의 음모로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일리치는 일본군 스파이로, 따냐는 바리스타로 활동을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인 ‘가비’는 커피를 부르던 옛말이다. 고종이 커피 애호가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무한도전 <궁 밀리어네어> 편을 보면 고종을 위한 진상품으로 캔커피를 준비했다. '양탕국' 즉 '가비'였다. 또한 마지막 퀴즈의 정답은 고종이 외국 외교관들과 연회를 열고, 커피를 마시던 ‘정관헌’이었다.
전창근 감독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은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을 그렸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을사조약이 체결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다. 평안도에 살던 안중근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항일투쟁에 뛰어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저격한다.
나라 잃은 슬픔과 민초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한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은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에 러일전쟁(1904)이 발발했다.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협약(1905.7)을 체결하여 일본의 지배를 승인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으로 러일간에 포츠머스 조약(1905.9)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1905.11) 이후 일본 제국에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YMCA 야구단>(2002)은 구한말의 선비 호창이 주인공이다. 과거시험을 준비했으나 과거제가 폐지되어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우연히 야구를 접하게 된 호창은 친구들과 함께 ‘YMCA 야구단’을 결성한다. 그러던 중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YMCA 야구단의 연습장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바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 클럽팀 성남 구락부와 대결하게 된다.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황성 YMCA 야구단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이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영국에서 고된 업무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청년들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믿음을 통한 수양과 신체활동에서 대안을 찾던 이들은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가 스포츠를 매개로 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황성 기독교 청년회는 1903년에 설립되어 서구의 많은 구기 종목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했다. 한국 스포츠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야구를 국내에 최초로 도입한 인물은 선교사 필립 질레트였다. 영화에서처럼 YMCA 야구단은 1910년에서 1912년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야구팀이 되어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선 내 일본인 야구팀들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조선총독부는 애국계몽운동가를 탄압하고, 신민회를 제거하기 위해 신민회 회원 105명을 대거 체포하는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한다. 야구단을 창단했던 질레트 선교사는 이 일로 인해 추방 당했고, 이후 야구단은 해체되었다.
<자산어보>(2019)는 신미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 등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조선은 강하게 천주교를 탄압했고, 쇄국정책을 굳건하게 밀어붙였다. 조선 후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서양문화 도입에 기여했다.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의 교육시설과 광혜원 같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설립되었다.
마지막 황녀의 기구한 삶
을사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후, 정미7조약(1907)으로 군대가 해산되었다. 기유각서(1909)로 사법권과 감옥 사무(교도행정)까지 잃게 되었다. 일본의 육군 대신 데라우치가 3대 통감에 취임하면서 식민지 작업은 더욱 빠르게 추진되었다. 친일파 총리대신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은 한일병합조약(1910)으로 일본제국에 강제 병합되었다.
영화 <덕혜옹주>(2016)는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를 원작으로 한 팩션 작품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다뤘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로 고종의 사랑을 받았다.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유학으로 포장되어 일본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정략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 정신병원에서 머물다가 말년에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삶을 마무리했다.
덕혜옹주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오히려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영화 속 덕혜옹주는 이우 왕자와 함께 조선인 모임을 열어 조선인 노동자들을 도우려 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상해 망명 작전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한다. 정혼을 약속했던 장한은 일본군 장교가 되어 덕혜옹주의 망명을 돕다가 부상을 입었다. 훗날 기자가 되어 덕혜의 입국을 돕는다. 일본은 결국 패망하고, 덕혜옹주는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이승만 정부에 의해 왕족의 입국이 거부되었다. 반면 친일파들은 환대를 받고 승선하는 것을 보며 정신을 놓아버린다.
덕혜옹주가 살아온 실제의 삶과 영화 속 설정 간에는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애국 마케팅을 했다는 평과 구 황실에 대한 미화가 많다는 지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일제와 친일파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으로 떠난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해방된 조국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망국의 한을 표현하는 가장 극적인 인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