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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평제 Apr 14. 2017

#3.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무거운 그 말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들이 바뀌기도 하며 그 생각의 틀에 대해서 이해를 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이 부분이 왜 당연한지에 대해서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험들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면 그 생각에 도달하거나, 깨달을 때까지의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만, 또 어떤 경험들은 반대로 생각한다면 다른 것들에 비해 혹은 다른 가지지 않는 사람에 비해 생각보다 빨리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문득 그 깨달음의 생각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는 우리는 아무도 그 순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정확히 인지하였을 때는, 그 대상이 혹은 그 생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다고만 느껴왔다는 것을


엄마가 된다는 것. 말로만이 아닌 정말 엄마가 된다는 것. 어느 순간 이 말이 정말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어느 날, 큰누나가 결혼을 하였다. 그때까지는 별 감정이 없었다. 집 안 남매 중에서 나와 작은누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나에게 언제나 쓴소리를 하며 묵묵히 장녀의 역할을 했던 누나이다. 나와는 7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어릴 때까지만 해도 "큰누나는 왜 나에게 맨날 쓴소리만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누나와 정말 많이 싸웠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히 기억이 난다. 군대에 있을 때 큰누나가 나를 너무 많이 챙겨주더라.

그만큼 미운 정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늦둥이 남동생이 군대를 가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또한,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받았다.


다시 돌아와, 항상 집에 술을 먹고 들어오거나 친구들과 커피 한잔을 하며 늦은 시간에 귀가를 했을 때 큰누나는 항상 집이었다. 일을 한다고 평일에는 일찍 자고 주말에는 바이오리듬 깨진다는 둥 뭐라는 둥 일찍 자고 내가 일찍 들어오는 날이 없으면 누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은 정말 적었다. 그런 누나가 막상 결혼을 하고 집 밖에 나가니 큰누나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작은누나는 부산이 아닌 경남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집에는 오히려 엄마, 아빠와 큰누나와 나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형제가 얼굴을 보기가 참 힘들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형제끼리 보기가 힘들다는 게 정말 자연스레 아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


갑작스레 찾아온 전화. "제야, 누나 임신했다."아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냐고? 내 인생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니까.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나에게 있어서 큰누나는 버팀목이긴 했지만, 그저 친구 같이 편한 가족이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된다니 그 당시 나는 24살이었다.


첫 조카가 태어나고 조카를 본다는 게 너무나 어색한 일이었다. 평소 아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족이니까 조금 더 조심스러웠을뿐더러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큰누나 또한 처음에는 초보 엄마이다 보니 엄마에게 전화 와서

"엄마, 협이 자꾸 우는데 어떡하는데?"라는 말을 할 때마다 누나가 고생을 하는 모습이 보였고 그때 까지만 해도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 아이가 있는 큰누나로만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 첫째 조카는 두 살이 되고 그를 다루는 큰누나의 모습은 점점 엄마 같이 느껴졌다. 아니, 엄마였다. 정말 아이가 있는 누나가 아닌, 한 아이의 엄마였다. 옆에서 그런 누나를 바라보면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구나 라는 생각과 더불어 누나는 한 발짝 어른이 더 되어 가네 라는 생각만 들뿐이다. 그렇게 큰누나는 엄마가 되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엄청난 시간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옆에서 간접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육아에 대해서 힘이 든다는 것을 그때부터 깨달았고, 문득 드는 생각은 "어? 엄마는 우리 셋이나 키웠네..."

얼마나 헌신적인 사랑을 우리 형제들에게 주었을까? 큰누나가 한 아이를 키우는데 저렇게 벅차 하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자라고 삐뚤어지지 않게끔 잘 인도를 하려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상상을 하면 너무나 엄마의 존재는 크게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지극히 독신주의자였다. 운명이라는 것은 믿지만, 영원한 사랑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연애를 하면서도 그런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꺼려졌고 정말 싫었다. 큰누나의 결혼과 아이가 생겼을 때 그런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 순간 대학교 수업도 부모 관련된 수업을 듣고 있던 나였고, 아이 육아 관련된 수업을 통해서 그 정보를 어느 순간 큰누나에게 공유를 하기 시작했다. "누나 아기들이 이때는 이렇더라 그러니까 조심해."라고 말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가 된다는 것과 내 아이가 있다는 것에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결혼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빨리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계기를 통해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당연하다는 것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 그 생각들이 도달할 때까지의 그 명제는 엄청난 과정이 숨어있다는 것을.


갑작스레 집으로 전화가 왔다. 첫째 조카가 집에서 놀다가 코뼈를 심하게 다쳤다. 겨우 두 살짜리 애기가 말이다. 큰누나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찰나에 소중한 핏덩이가 그런 다치는 모습을 막지를 못했다. 큰누나가 울면서 이야기를 한다. "내 새끼 다쳐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이다." 그렇게 큰누나는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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