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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한량 Aug 12. 2022

너 때문이야

당신 생각으로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당신으로 써내려 가기로 했다.

나의 지난 모든 일들이 내 서랍장의 빛바랜 사진들로 되었을 때부터 나의 삶은 무채색이 되었다. 한동안은 방 안에서 게임만 하면서 지냈다. 아무런 미래도 과거도 가지지 않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사놓고 어디다 둔 건지 까먹은 종이인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잊힌 채 살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아니었다. 매일매일이 항상 즐거웠고 행복했다. 무채색치고는 너무 환했나. 그럼 가정통신문이 쓰이는 누런 똥 종이 정도가 좋겠다. 그래도 나이가 있었기에 밥벌이는 해야 했다. 부모님들은 방안에 박힌 나에게 크게 뭐라 말하시진 않으셨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우연히 집 근처에 전기학원이 있다길래 그냥 전기를 배웠다. 그리고 갖가지 과정들을 수료했고 전기일을 했다.


여전히 나의 그 모든 삶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다만 이직을 했고 나 혼자 살고 있다는 것. 이제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과 게임을 그만두었다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은 즐거웠지만 매일 잠이 들기 전 눈을 감으면 괴로웠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삶을 계속 살아갈 이유가 고작 게임이 되는 것은 내가 프로게이머가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내가 생각한 어느 정도의 목표치를 달성한 이후에 난 방 안에서 나왔다.


게임이 사라진 자리의 공허함은 생각보다 컸다. 저녁이 있는 삶. 며칠은 그 시간의 공허함에 유영하며 지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그 여유를 만끽하며 이틀 정도를 지내다 다시 나를 채우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동안 잘 듣지 않았던 음악들을 찾아 들으며 다시 나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예전부터 보려 했던 영화 리스트를 꺼내보았다. 그 중 하나를 택하곤 보기 시작했는데 항상 유튜브로 넘기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2시간이 되는 상영시간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결국 다 미처 보지 못하고 꺼버렸다. 나는 그 사이 영화 한 편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실망감에 꽤나 혼란스러웠다. 자극적이지 않은 시간은 오직 지루함으로 인식되어버린 오작동하는 감각을 어떻게 원상복귀시킬까 고민하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문장들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이윽고 도착하는, 그 기나긴 여정을 하다 보면 다시 나의 고장 난 감각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하지만 나의 책 읽기는 금세 무너지고 말았는데, 그건 소개팅 실패의 여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 속에서 난 옛 기억 속의 한 장면과 조우했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조우한 그녀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있어야 했다. 나의 어지러운 마음은 오롯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어 '유민'으로 발산되어야 했다. 하지만 난 또 며칠째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내 마음의 물줄기가 이미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앞으로 쓰일 이 모든 것은 당신 생각으로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당신으로 써내려 가기로 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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