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습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한량 Oct 04. 2022

트럭

Drop the beat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밤이었다. 아무것도 쓰려하지 않았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던 밤이기도 했다. 그런 밤엔 언젠가부터 산책을 하게 되었다. 귀엔 이어폰을 꽂고 늘 그렇듯 길을 나선다. 나의 재생목록에는 추천 영상으로 올라온 13일 전 영상이 있었다. 처서가 지난 지 2주 정도 지난 무렵에야 가을은 훌쩍 다가왔다. 한 플레이 리스트 유튜버가 알려주는 24절기 때문에 절기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1년 12달에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서 오늘이 몇 월인지 며칠인지 생각 안 하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무심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 무서워 이젠 절기 정도도 알고 있었야겠다 마음먹었다. 12번 생각하던걸 24번 생각하게 되면 조금은 더 허투루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24절기가 뭐가 있는지도 모르기는 했다. 난 이제 처음으로 처서를 맞이 해보았으니까, 그다음 절기는 이다음에 오면 만나면서 친해져야겠다 싶다. 그 모든 절기를 알게 되고 수없이 마주해서 이제 친구처럼 절기를 대할 때가 되면, 난 비로소 시간의 흐름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면 그 모든 나날들에 웃으며 알록달록 색을 칠해줄 수 있을까.


뜨겁던 계절이 지나가고 다시 차분해지는 계절. 기분 좋은 청명함으로 가득 찬 밤의 공기에 취해 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밤은 끝나 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나의 하루기에, 반대로 나의 밤은 이토록 짧다. 그래서 더욱더 소중한 나의 밤은 항상 내 손아귀에서 부서져 없어질 것만 같다. 늦은 시간이 되어도 지칠 줄 모르고 노는 아이처럼. 괜스레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밤거리를 방황하던 그날들처럼. 난 나이를 먹어서도 변하지 않고 거리를 서성였다. 집 앞 골목들을 지나 내가 좋아하는 이름 모를 나무를 지나, 아우토반이라 칭하는 길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주로 산책을 나와 걷는 이 거리는 끝없이 펼쳐진 왕복 4차선의 한적한 도로였다. 산책하는 8-9시경의 이 거리는 걷는 사람은 거의 없고 때때로 지나가는 차들뿐이었다. 난 인적이 드문 아우토반에서 덕분에 밤공기에 취해 자유롭게 노랠 흥얼거리며 산책을 했다.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차들은 쌩쌩 달렸고 난 자연스레 아우토반이라 이름 지었다. 약 1시간이 가량 이어지는 산책길. 중간지점에 다다르면 '길 없음'이란 표지판이 나를 맞이했다. 매번 그 표지판까지만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에 그다음에 뭐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간 나를 지나갔던 수많은 차들은 다 길이 없는 그 끝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이 길은 지하철역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을 따라 이어진 길 밑으로는 웬 기찻길이 있었는데 내가 산책하는 시간에 기차가 지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난 매일 휀스들의 규칙적인 사각형 너머의 철길과 선로들 너머 한없이 펼쳐진 이름 모를 논과 밭들을 지켜보고 그 논과 밭의 한 구석에 흐르는 물길을 보고, 그 물길에 반사된 달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은 그 물길에 비친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찍고 싶었는데 나의 미약한 사진 실력의 앵글로는 그 광경을 차마 담을 수 없어서 포기한 적이 있다. 나의 유약한 산책길의 돌아오는 길 한편에는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수많은 차들이 도로에 정차되어있다. 애초에 교통량이 많지 않은 이 길 한편에 불법 주차된 이 차량의 주인들은 내가 집에 들어가고 잠에 들 때쯤에야 진이 다 빠진 채로 차를 타고 자신들의 집으로 향해갈 테지. 그리고는 내일 아침 나와 같은 시간에 또 집을 나설 테지. 그렇기에 나의 산책로는 슬프고 위태롭다. 누군가에겐 전쟁터로의 시작점이고. 누군가에겐 종전의 마침표였으며 누군가에겐 내일 또 이어질 지겨움이기도 하니 나는 그 앞에서 절로 유약해질 수밖에.


아무것도 쓸 수 없던 밤, 나의 하루는 아우토반에서 기어이 그 공기에 취해 왈칵 한 움큼 쏟아 내렸다. 난 그 길을 질주하며 혼자 앞으로 돌진했다. 나의 깊은 밤 어딘가로. 아니면 나의 내일로. 아니면 당신에게로. 사실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 다시 집으로 향할 뿐이다. 그저 난 그저 오늘도 산책을 나섰을 뿐이다. 출발지점이 있기에 도착지점이 있을 뿐이다. 이 모든 여정에 끝이 있듯이 오늘 나의 질주는 이렇게 끝이 날 것이다.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곤 그냥 침대에 털썩 누운 채 잠이 들었다. 희미하게 이어폰에선 노래가 들려왔다. "난 핸들이 고장 난 8(eight) 톤 트럭.. 내 인생은 언제나 삐딱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