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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펄펙 Oct 18. 2023

설거지하다 문득 죽고 싶어졌다

흔한 워킹맘의 이불킥 각 새벽 글


나는 대가리 꽃밭 ENFP이다.

‘대가리’와 ‘꽃밭’을 단순하게 합친 말이다.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MBTI 중 ENFP는 낙천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지며 머리에 든 게 없다고 평가받는다. 큰 걱정이 없고 깊은 생각 없이 어떤 일을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맑고 순진하며 천진난만한 타입의 사람을 칭하는 요즘 은어이자 속어 일종의 밈(meme)이다.

나의 천성은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 긍정의 끝판 왕이자 위기 대처, 극복의 고수이다.


이런 나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딸, 아들 금메달! 잘 나가는 남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섯 살 딸아이와 돌이 갓 지난 푸바오같이 귀여운 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남편은 프로 야구 트레이너입니다. 멋지죠? 네, 멋집니다. 제 삼자로 봤을 때 멋지고 훌륭해요. 하지만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에게 그의 직업은 어떤 의미인지 아세요? "프로 야구팀"에서 일한다는 건 야구 일정에 따라 원정 경기를 다녀야 해서 집에 못 들어오는 날이 있다는 뜻이고요. "트레이너"라는 직업은 선수들이 부상 없이 또는 부상을 딛고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게 돕는 게 주 업무인데요. 그렇다 보니 선수들의 부상 및 건강 문제에 따라 갑자기 집에 못 들어오는 날도 생기고, 쉬는 날을 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정에 어떤 상황에서 시간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면 남편의 스케줄을 고려하기란 어렵습니다. 예측이 불가능하니까요. 첫째 아이를 출산하러 산부인과에 갈 때도 큰 가방 싸 짊어지고 혼자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시는 관리인께서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을 때 혼자서 "애 낳으러 왔는데요"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맞벌이 부부,

사업하는 엄마는 최악의 옵션인가


    저희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저는 학원에서 주로 성인들을 가르치는 영어 강사였는데,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우연한 계기로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학원 강사로서 일하면서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게 버거워서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경제적 자유", "디지털 노마드"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의 아랫단에는 디지털 노가다가 존재합니다. 그 사실을 간과한 과거의 나 새끼 덕분에 거의 매일 밤새가며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 쳐내지 못해 클레임도 들어오고요, 스스로 자괴감도 들어요. 내가 이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허허...



누가 안 도와주셔?


    하나님은 저희 엄마를 너무 사랑하셨는지 일찍 곁으로 가그러셨어요. 너무 감사하게도 결혼 후 시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십니다. 제가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한 당사자는 남편이지만 시어머니와 거의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가.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힘든 점이 그리 많진 않습니다. 상대는 불편하고 미움이 있을지언정 (사실) 제가 사는 제 세상에서 전... 크게 불편한 것도 미움도 없어요. 네, 저 대가리 꽃밭이라 불리는 ENFP에요.




남들도 다 하는데...


"아이 둘 육아?" 다들 애 키우고 사는데 못할 거 뭐람

"충성 직원인 남편?" 남편이 돈벌이 열심히 하겠다는데 감사한 거 아닌가

"밤샘 작업?" 어떤 일에 몰입할 땐 다 일정 기간 그렇게 할애하고 그러는 거지

"시어머니의 육아 동참?" 육아에 도움 줄 사람이 곁에 없어서 난리인데 땡큐지


이 정도로 생각하며 살았어요. 나에게 집중된 집안일도 그러려니 하며 해냈어요. 남편은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적일뿐더러 우리 부모 세대가 아들들에게는 집안일을 하는 습관을 길러주지 못한 탓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식들에게 나름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일이라곤 거의 해본 적 없던 그를 그대로 인정하기도 했고요.




   거실에서 까르르 웃는 가족들을 등지고
설거지하다가 문득 죽어버릴까 생각했습니다.



밥풀이 안 떼어 져서 우는 거야


    아이들과 남편, 우리 가족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어느 드문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식사 후 남편이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 전 바로 설거지를 해버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새벽녘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아 그 시간에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바쁜 아침에 쌓인 설거지통을 보고 한숨지을 게 뻔하니까요. 그리고 가끔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에어팟 꽂고 유튜브를 보며 혼자 설거지하는 시간이 오히려 더 좋을 때도 있고요. 먼저 물을 쏴아 틀고 낮부터 쌓여있던 그릇들과 방금 먹고 치운 식기들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정리부터 해야 했습니다. 정리를 하다가 카레가 묻어 노랗게 착색된 그릇에 잠깐 멈췄어요. "아이 참, 그릇에 보기 싫게 노랗게 물이 들었잖아?" 다시 그릇을 정리하다가 밥풀떼기가 눌어붙어 떼어지지 않는 밥그릇이 있어 정리를 멈추고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낮부터 있던 그릇도 아니고, 방금 식사에서 나온 그릇이었어요. 딸아이가 놀며 이야기해 가며 오랫동안 밥을 먹어서인지 금방 내놓은 그릇에 붙은 그 밥알 두어 개가 그렇게 안 떼 졌어요.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나요. '이깟 별 거 아닌 작은 일 하나도 내 맘대로 안돼' 죽어버릴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니, 사실은 죽을 용기는 없어서 내가 증발해 버렸으면... 지구가 소멸해 버렸으면... 말도 안되는 공상을 했습니다.



역치가 높으면 뻘 한 데서 터진다


    사실 성인이 되고 몸살을 해 본 적이 두어 번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워낙에 체력이 좋기도 한데, 열이 나다못해 40도를 찍고 펄펄 끓어도 '오늘은 왜 그런지 좀 힘드네' 정도 생각하는, 역치가 평균보다 좀 더 높은 사람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복잡한 일이 많았는데, 워낙 많은 세균성 바이러스에 시달리면 골골 끝에 울트라 항체가 생겨버리는 것처럼 웬만한 일에도, 질병에도 끄떡하지 않게 됐나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늘 사소한 것들이에요. 부비동염으로 감행했던 코 수술보다도 코를 계속 간지럽히는 뭔가 엄청 작은 그 이물질에 오히려 더 괴로워요. 고속도로에서 난 전복사고에서 목숨을 건지고도 병원 서류 작성하다가 종이에 손이 베어 너무 아프고 서러웠습니다. 그릇에 들어붙은 밥풀이 그런 것이었을까요?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떼어낼 때까지 너무 괴로웠어요. 죽고 싶었어요. 이렇게 힘들 거면 안 하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없던 것들로 되돌리고 싶다 온갖 생각이 다 들지 뭐에요.






글을 쓰기로 했다


    순간 두려웠습니다. 내 생각이 ‘죽고 싶다’까지 미치다니... 정신병인가도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부터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제 감정에 배출구가 없어서요. 글로 배설을 하겠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어쩌면 처음엔 배설하듯 휘갈기고 난 후에 다듬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저를 좀 더 들여다보고 돌봐주고 다독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기록하기로 했어요. 이런 제 글이 뜻밖에 그 누군가에게도 힘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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