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불 속에서 적군을 구하지 마라

샘 멘더스 감독. 1917

by 백승권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는 막중함 임무를 안고 먼 길을 떠난다. 독일군을 향한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서를 전달해야 했다.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1600여 명의 아군이 전사할 수 있었다. 이 막대한 피해 예상치 안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었다. 블레이크는 이 임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전쟁에서 지더라도 형의 목숨은 구해야 했으니까.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적의 비행기가 격추된다. 적의 비행기는 추락해 조종사와 함께 불타고 있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달려가 조종사의 목숨을 구한다. 전시 상황, 인간의 도리로서 목숨은 구해줬지만, 스코필드는 이만 놔두고 떠나자고 한다. 블레이크는 이 부상당한 조종사에게 먹일 물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다. 스코필드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블레이크는 조종사의 칼에 죽는다. 1차 세계 대전을 그린 1917을 보며 이 장면이 나머지 모든 장면보다 파장이 깊었다.


여러 전제와 선택에 따른 예상 결과의 경우의 수를 뒤섞어봤지만 모두 가정일 뿐, 되돌릴 수 있는 죽음은 없었다. 여기서 임무를 포기한다면, 1600명이 죽는다. 블레이크는 이미 죽었다. 여기서 임무를 진행한다면, 1600명이 안 죽을 수 있다, 블레이크는 이미 죽었다. 남은 건 유언뿐이었다. 죽은 전우의 형에게 유품을 전해주고 죽은 전우의 어머니께 편지를 쓰는 것. 스코필드에게 임무의 명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먼저 죽은 자를 위해 기필코 산 자가 되어 명령을 이행해야 했다.


이후의 명령을 전달하기까지의 고행들은 마치 며칠 동안의 꿈만 같았다. 피로와 광기가 뒤섞여 모두가 한 방향의 죽음으로 달려가는 전장을 가로지르며 스코필드는 생과 사를 가를 결정과 책임을 지닌 권력자에게 명령서를 전달한다. 당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당신보다 더 높은 권력을 지닌 자들로부터 이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전달받았고 이에 전달한다. 전쟁과 전투의 승패보다 더 높은 압박으로 전군과 전장을 지배하는 암묵적 룰이었다. 박수와 인사는 없었지만 피바람은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전장만큼 악행을 정당화시켜주는 곳이 있을까. 적의와 경계를 허문 따스한 일화가 후대에까지 오래 떠돌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판단력을 상실한 살육에 대한 강압과 만행이 깔려 있었다. 목숨을 구해준 자의 목숨을 단숨에 빼앗을 정도로 이성이 망각되는 곳. 겨우 몇 미터 너비의 땅을 사이에 두고 수없이 죽고 죽이는 곳. 살의가 생존본능이 되는 곳,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곳, 죽임과 죽음이 전부가 되는 곳,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전쟁을 겪은 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이런 영화들을 학습하며 각성하게 된다. 지난 죽음을 기억하며 새로운 죽음을 막아야 한다고. 이건 결국 스코필드가 이루고자 했던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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