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끝낼까 해

찰리 코프먼 감독. 이제 그만 끝낼까 해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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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얼마나 특별하고 남다른지 스스로만 안다면 삶과 세상은 얼마나 외로울까. 이걸 해결하지 못해 인류는 아직도 연애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기 원한다. 곁에서 칭찬해주기 원한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원한다. 내가 이토록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기 원한다. 내 불안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편들어주기 원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이 웅성대는 곳을 찾는다. 식당 또는 술집 또는 어디든. 주변으로 마구 신호를 보낸다. 크게 몸을 흔들지 않아도 보내지는 신호도 있다. 그중 하나라도 반응이 온다면 낯선 사람을 마주 볼 수 있다. 이야기할 수 있다. 반복할 수 있다. 고백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이어질 수 있다.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갈증 같은 외로움에 물을 줄 수 있다. 싹을 틔울 수 있다. 하지만 문득 깨달을 때도 있다. 침묵이 빨리 찾아올 때. 침묵이 싫은 데 할 말이 없을 때. 할 말이 없는 데 같이 있을 때. 같이 있지만 혼자 있는 것보다 더 고립된 것 같을 때.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같은 차에 앉아 같은 방향을 보며 가고 있는데 서로 다른 교도소의 독방에 갇힌 죄수처럼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한쪽은 어쩔 줄을 모르고 한쪽은 확신할 때. 그 확신이 끝일 째. 그 확신이 이별일 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하루든 일주일이든 일 년이든 그 이상이든, 일정 시간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어느 정도 정보량은 갖춘 상태니까. 상대가 말을 하면 맞장구를 칠 수 있다. 어떤 맞장구냐에 따라 서로에 대한 관심의 농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내가 과묵하다고 너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라는 신호, 허세, 의외성.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이미 끝낸 관계의 단락을 다시 펼칠 수 없다. 이미 닫힌 가게 문을 다시 열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식당에 다시 들를 수 없다. 늘 혼자였고 겨우 둘이 되었지만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한다. 나도 상대도 혼자로 돌아가야 한다. 이별의 가해자가 되기 싫어서 먼저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목적지로 당신의 부모님까지 만나러 간다. 이건 분명 당일치기여야 한다고 수천번 약속하며. 남자에겐 들린다. 여자의 모든 신호가 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남자는 평생 외롭고 누군가 곁에 있어주길 바랐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차를 멈추지 않는다. 그 어렵고 낯선 곳으로 기어이 데려간다. 외로움의 근원을 보여주려고. 내가 이런 사람들에게 길러져서 내가 지금 이런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더 나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 난 복잡하고 어려운 사람이지만 한편 연약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야. 당신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침묵과 부동으로 애걸한다. 여자는 따른다. 언제 끝낼지 타이밍을 노리며.


세상엔 이상한 집과 어른이 많지만 이 남자의 집과 부모님 또한 그러하다. 왜 이 먼 시골집으로 나를 데려와 살이 썩어 벌레가 파먹으며 죽어간 돼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현장을 보여주는 걸까. 어린 시절의 불우함을 전시하고 싶어서? 조금 이상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고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래 같이 있긴 버거운 이 사람의 부모님들. 점점 나빠지는 날씨. 돌아가고 싶은 마음. 끝내자고 말하고 싶어 달짝 거리는 입술. 조금 이해할 수도 있겠지. 이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자라왔는지 조금 알게 된다면.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이 사람의 심연, 두려움의 근원, 어린 시절의 동선들을 다시 따라간다고 해도, 다양한 추측이 환상적으로 시각화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의 아픈 부모님을 오래된 집에 두고 오더라도, 다시 떠나야 한다. 전시된 상황을 둘러보며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정보는 늘어날 수 있겠지만, 난 당신의 인생을 구원하려고 당신과 만나려 했던 게 아냐. 그리고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지. 어서 도시로 돌아가 내 일상과 일정을 되찾고 연구과제를 매듭짓고 싶다. 물론 당신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하고.


생각이 많다고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더 많이 안다고 더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곁에 앉아 있다고 모두가 체온을 나누고 껴안고 입 맞추는 것도 아니다. 내면에서 끝이 선언되는 순간, 모든 물리적 활동이 영향받는다. 무의식의 외로움이 다시 고갤 들어 모든 중력을 동원해 이별을 막으려 해도 눈보라가 멈춰도 헤어진다. 헤어진다. 헤어진다. 만약 마지막 장면이 (환상이 아닌) 실제라면, 남자는 성공했다. 남은 생애 내내 연인을 떠나보내지 않고 곁에서 자신의 특별한 외로움을 이해시킬 수 있었으니. 하지만 여자의 삶은, 저대로 끝나도 되는 건가. 영화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갈등 해소의 단계들을 초현실적 움직임과 시각적 장치들로 채우고 찬란하고 비장한 고백의 낭독으로 매듭짓는다. 그래서 둘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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