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대 감독. 빛과 철
교통사고 발생. 한쪽은 사망,
다른 한쪽은 의식불명.
남편을 잃은 희주(김시은)의 삶은 그때부터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시작되었고,
언제 눈뜰지 모를 남편을 간병해야 하는
영남(염혜란) 역시 죽은 듯이
죽을 듯이 견디고 있었다.
죽기 위해 노력할 힘이 없다면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이게 살려면 또
이유를 만들어야 해서
희주는 돌아온다.
남편을 잃은 동네로. 공장으로.
그곳에서 죽은 남편이 가해자가 된
교통사고를 다시 파헤친다.
피해자의 가족과 마주한다.
시체처럼 휘청거리며 수소문하다가
믿고 싶은 이야길 듣게 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집는다.
내 남편이 가해자가 아니야.
난 가해자의 유족이 아니야.
남편이 죽은 건 나 때문이 아니야.
남편이 죽인 건 더더욱 나 때문이 아니야.
죽을 때까지 이걸 끌어안고
갈가리 찢겨가며 살아갈 순 없어.
의식불명 환자는 말이 없으니까
희주는 영남을 뒤흔들어야 했다.
당신 남편 잘못이야.
당신 남편이 그날 가해자야.
영남은 욕구가 없었다.
희망도 사랑도 어디에도 쏟을
에너지가 없었다.
영남의 딸 은영(박시후)은
경험을 토대로 믿고 있었다.
아빠는 사고 전에 스스로 죽으려고 시도했고
아빠의 사고는 그 과정의 결과라고.
영남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맞다면 보험금 수급이 불가능했다.
희주의 재조사에 가속이 붙는다.
알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을 진실과도 마주한다.
남편이 사고의 가해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남편의 정신에 해악을 끼친 건 부인일 거라는 기록.
사고 처리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암묵적 합의.
은영과 희주가 마주하고
영남과 희주가 마주한다.
탐정 놀이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살아남으려는 발버둥들이었다.
만물의 적막 속에서도 지옥의
비명으로 귀를 틀어막던 희주는
영남을 추궁하고 주변을 탐문하다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전혀
모르고 있던 타인의 삶과 동석한다.
공장에서 일하다 신체가 절단
당하고 삶이 불구가 된 사람들.
계약관계가 엉키자 고용과 지원을
끊어버린 공장의 운영자들.
후폭풍. 절망. 가난. 자살 충동. 부서진 가족...
희주 남편과 영남 남편의 교통사고는
이미 부서진 인간들의 생명 유지마저 정지시킨
2차 충돌이었다.
희주의 고막을 찢는 소음이 멈추지 않는 건
상황을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려고 과거를 헤집을수록
가해자는 다른 한 명이 아니고 피해자 역시
나뿐이 아니라는 감당하기 힘든 사방의
벽에 겹겹이 부닥쳤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아니었더라도 남편은
자살로 생을 끝내려 했다는 증언,
남은 가족마저 처절하게 연이 끊긴 자멸의 삶.
그때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나.
혼돈과 비극 속에서 다 부서질 때까지
나 혼자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였나.
죄책감을 동력으로 꾸역꾸역 살아남아
과거의 시체를 다시 꺼내 해부했더니
돌아오는 건 결국 그때보다 더한
혼돈과 그때보다 더 많은 비극.
이러다 점점 죄와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기본 모드인 삶이 되는 건가.
내게서 도망치고 진실을 부정하고
타인에게 죄를 묻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어떤
고통도 내려놓지 못하는 삶?
어린 산짐승들이 땅에 내려왔다가
달리는 차에 치어 죽는 동네였다.
아무도 그 죽음을 기꺼이 슬퍼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각자의 슬픔과 고통에 바빴고
짐승들은 앞으로도 빛과
어둠 속에서 급사당할 예정이었다.
다시 묻지 않는다면 한번 덮이고 영영
꺼내지지 않을 진실들.
많은 일들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고 더 다칠까 봐
입 닥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진실만한 지옥이 없다.
무지는 집단의 생존 및 존속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