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감독. 승부
좋지 못한 바둑으로 이겨서
선생님께 죄송합니다
정말 이기고 싶었어
내 방식대로
상대가 하고 싶은 대로 냅둡니다
근데, 이 끝나고 나면 바둑이 져가 있어요
칼이 녹슬었어
그렇게 견디다가 이기는 거요
한번 피하기 시작하면
그땐 갈 데가 없습디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게 바둑이다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으니까요
좋은 바둑은 결코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빠르고 날카롭게 회전하며
피부를 뚫고 내장과 근육을 파헤치는
총알이 빗발치고
거대한 화염과 함께
전신을 태우고 고막을 터뜨리고
팔다리를 분리시키고
감지되는 모든 공간을 허물어뜨리는
폭탄이 쏟아지는
갓난아기와
걷지 못하는 노인과
짐이 가득한 부부와
멍하니 서있는 누군가 모두를
한순간 모조리 없애거나
오랫동안 절규 속에 고통받게 하는
전투와 전쟁을
직접 겪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사진과 기록으로
재해석, 재발견된 지식과 정보로
간접 경험한 사람들은
전투와 전쟁을
인생의 단면에 비유한다.
죽고 다치고 피 흘렸다는
타인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롭나.
일찍이 놀이로 만들어 아시아 작은 나라
방 안까지 들어왔고
바둑이라 부른다.
조훈현은 세계 제일의 킬러였다.
그윽한 포즈로 담배를 입에 물고
달달달 다릴 떨며
잘 가라고 노래 부를 때
상대는 모욕감에 치를 떨며
바둑돌을 뒤엎고 나가버렸다.
조훈현은 패자의 그런 뒷모습을 즐겼다.
애써 내가 이겼다고 자부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칭송하고 플래시를 터뜨리고
트로피를 안기고 신문에 대서특필하고
가는 곳마다 시대의 영웅이 되었다.
이런 조훈현 유니버스에서
어린 이창호는 조훈현이 발견한 천재의 불꽃이었다.
최고를 키울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최고의 정의 안에 '조훈현을 뛰어넘는'
최고는 함의되지 않았었다.
모든 씨앗이 품종이 남다르다고
만인이 감탄하는 우수한 과실로 자랄 순 없다.
하지만 이창호는 섞이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세계 제일의 가르침을 고요한 눈빛과 말투로
배반하며 자신의 칼을 길들인다.
그 칼로 스승의 폐부를 깊숙이 찔러 쓰러뜨린다.
프로가 되어 맞붙은 최초 다섯 번의 결승에서
조훈현은 단 한 번도 이창훈을 꺾지 못한다.
이창호 시대의 시작이었고
조훈현은 이제 끝났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게임.
나무판 위에서 두 가지 색 둥근돌이
영역을 채우며 승부를 보는 방식.
조훈현은 애초 천재의 영역으로 정의했고
1위가 아니면 나머지는 의미가 작다고 평했다.
이런 세계에서 자신의 추락을
직접 느끼는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쓸 수도 그릴 수도 옮길 수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조훈현은 녹슨 칼이 되어있었다.
담배를 끊고
플레이 스타일을 바꾼다.
차라리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수술대 위에서 피부를 자르는
전신성형이 더 쉬웠을 것이다.
평생 이겨온 방식을 바꾸는 건
늘 그렇듯 쉬운 이론이지만
과정과 결과에 있어
불가능에 가까운 실행이니까.
시선
손끝
시간
머릿속에서
과다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창훈은
운이 좋은 라이징 스타가 아니었고
자기 객관화에 지독하게 몰두했으며
요란한 퍼포먼스를 '노인'처럼 절제하고
적의 전략을 호흡 하나까지 분석하며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상대의 숨통을 끊는
고요하게 압도하는 승리에 익숙했다.
더구나 그 적이 조훈현이라면.
전부를 쏟아붓고 그 이상의 변수까지
철저히 통제의 영역 안에 가둬야 했다.
서로를 다 안다고 여기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승부였다.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끊임없이 되새겨야
겨우 진정하며 실수를 줄이고
모든 별의 죽음과 탄생의 위치를
기억해내어야 하는, 그 세계 안에서는
더 이상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들끼리의 결투였다.
허름한 실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가볍고 정제된 옷차림
웅성거리는 시선들
작게 째깍거리는 초침
긴장을 누르는 숨소리들
도미노 조각의 위치가
조금만 미세하게 틀어져도
최후의 그림이 펼쳐지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이창호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조훈현의 칼날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 무엇을 놓쳤을까.
이창호는 쓰러지고
조훈현은 역전한다
승부와 일상의 모든 순간
신의 뷰로 냉철하고 따스하게 바라보던
남기철(조우진)이 그토록
멋질 수가 없었다.
남기철은
허기진 이창호(유아인)에게 밥을 사주고
토하는 조훈현(이병헌)에게 우산을 씌우며
승부사들의 제다이가 되어주었다.
단 한순간도 남기철의 칼은 녹슨 적이 없었다.
바둑과 인생을 사랑하던 진정한 승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