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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Dec 24. 2021

가슴을 연다는 표현은 너무 서정적이라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욕심



가슴을 연다는 표현은

너무 서정적이라


 수요일이면 습관처럼 틀어놓고 보던 TV 프로그램에서 심장 수술을 세 번이나 할 정도로 심장이 약했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 어느 게스트의 마른 얼굴을 보게 됐다. MC 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 열 살배기가 받기엔 너무도 대형 수술이었던 개흉 수술에 대한 내용이 게스트의 어린 시절 사진 위에 천천히 자막으로 오버랩됐다.


전신마취를 하고 가슴을 여는 수술을 받았다.
사실 가슴을 연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서정적이다.


 화면이 전환되고, 수술실 현장 사진 위에 떠오른 자막은 그 짤막한 일이 초의 순간 내 심장을 몇 센티는 아래로 떨어뜨렸다. 뒤이어 뜬 자막의 내용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실상은 흉골을 톱으로 썬 다음, 갈비뼈를 좌우로 젖혀서 심장을 들여다보며 잘못된 곳을 바로잡는 7시간의 긴 수술이었다.


 ‘실상은 흉골을 톱으로 썬 다음, 갈비뼈를 좌우로 젖혀서’. 화면은 계속 전환되고 이내 게스트와 진행자의 풀 샷이 떴다가, 발화자를 따라 바스트 샷으로 바뀌었다가 하는데 나는 한참을 그 문장의 잔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 번이고 곱씹었다. 가슴을 연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서정적이다, 실상은 흉골을 톱으로 썬 다음, 갈비뼈를 좌우로 젖혀서……. 개흉 수술이라는 것과 한 번도 가까이 있어 본 적 없는 내 순수한 무지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직접 겪어본 사람이 그렇게 낱낱이 풀어헤쳐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도 나에겐 개흉 수술이란 그저 엉성한 질감에 불과할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숨겨지고 뭉개져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겪지 않았던 모든 일들은. 누군가의 끝나지 않는 괴롭고 잔인한 아침을 단순히 ‘우울증’이라고 칭해버리거나, 실패와 포기가 일상인 나날들을 살아야 하는 어느 가정의 궁핍함을 ‘가난’이라고 단순히 불러버리는 식으로. 악의를 곁들이지는 않더라도 고통에 베일을 씌워 실체를 은폐하는 방식으로.

 그건 어떤 깨달음이기도 했다. 추상적인, 또는 기하학적인 어떤 상(象)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무언가를 해체하고 실체화하는 힘은 경험에만 있다고. 겪지 않은 무언가는 결코 함부로 크기를 재단하거나 질감을 가늠해볼 수 없으리라는.


 스스로를 약자라고 제한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약자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동양인이고, 여자이고, 부자가 아닌. 그중 특히 여자로 살아가는 일은 나를 수많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 동양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동양권에서는 나쁜 요인이 아니며, 부자가 아니더라도 나보다 덜 부자인 사람과 견주면 그만이지만 여자이기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지구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은 사람은 없지만, 여자로 사는 일의 일부를 설명해보겠다. 여자로 사는 일이란 이런 일들을 내포한다. 뒤따라오는 발걸음에 낮에도 밤에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 자칫 불리한 입장이 될까 봐 질 낮고 불쾌한 농담을 못 들은 척하는 일. 여자인 친구를 만나면 꼭 헤어질 때 친구가 타고 가는 택시 번호를 찍어서 메시지를 남겨야만 안심이 되는 일. 택시를 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긴장하는 일. 남자가 사는 집처럼 보이기 위해 수령인의 이름을 도용하고, 택배 박스에 붙어 있는 운송장을 치밀하게 도려내는 일……. 이 모든 자질구레하고도 무시할 수 없는 일상을 고작 ‘여자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 정도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슴을 연다’라는 표현이 개흉 수술을 경험한 자에겐 너무도 서정적인 표현이 되어버리듯이.


 여자로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만으로도 허탈해지는 순간도 가끔 찾아온다. 이런 일을 이해시키는 일로 누군가와 싸워야 할 때가 있고, 때로 그 누군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다. 제법 잦은 빈도로 개흉 수술 그거 그냥 가슴을 여는 수술 아니냐는 식으로 대충 어림잡는 발언을 들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내 모든 연약함과 아픔과 절망은 한 번도 세밀하게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대충 아파본 적 없고 대강 처참했던 적 없었다.


 누구와 싸우고 싶은 게 아니다. 마치 그것만이 목표인 것만 같은 절망적인 순간들도 여러 차례 맞닥뜨려보았지만, 그걸 원하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 진창을 누군가 가만히 들여다봐 주었으면 한다. 타인의 고통을 가까이서 관찰하려는 그런 집요한 의지로. 남성에게는 체득되지 않는 여성의 불안과 고통의 언어를 습득하려는. 덜 가난한 쪽으로서 조금 더 가난한 쪽의 궁핍함을 이해하려는, 더 행복한 쪽이 불행한 누군가의 슬픔을 헤아리려는. 장애가 없는 누군가가 장애가 있는 사람의 불편한 일상을 더듬어보려는. 귀찮더라도 내가 모르는 타인을 알아가려는 노력과 의지만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몰라도 되는 것을 알려는 일은 몹시 피곤한 일이므로 굉장한 욕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우리는, 그런 욕심을 내지 않고서는 입도 뻥긋할 자신이 없다. 이해받지 못할 세상에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지니까. 나는 입을 앙다문 채 나의 심리적 경계를 조금씩 녹여줄 사람을 기다린다. 마음에 안경을 쓰고 다가와 세상이 납작하고 밋밋하게 읽어온 문장을 정교한 언어로 다시 읽어줄 그런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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