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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송희 Jun 18. 2024

스스로 행복한 어른이 되려면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

스스로 행복한 어른이 되려면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



언제 내가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까 고민했다. 드디어 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나서 주민등록증을 손에 쥐던 때? 술집에서 당당하게 술을 주문하던 때? 이번에는 도저히 마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한 때? (물론 이 원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첫 월급으로 부모님 선물을 사던 때? 목에 사원증을 건 채 아메리카노를 들고 거리를 걸을 때? 내 이름이 적힌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때?

자신을 어른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 너 자신을 어른이라고 느끼냐?’라고 물었다. 대다수는 바로 답하지 못했고, 한참 뒤에 돌아온 이런저런 답안들 가운데는 위에 적은 내용도 있다. ‘집 계약서에 사인할 때’,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무사히 재웠을 때’ 등등이었다. 정리하자면 대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 냈을 때 자신을 어른스럽다고 느끼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른이라는 명사를 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유미의 여러 가지 세포들

독립해 혼자만의 공간을 꾸리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알콩달콩 사내연애를 해도 ‘이게 정말 어릴 때 내가 원하던 삶일까?’를 가늠해 보면 머리를 갸웃하게 될지 모른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2015~2020)을 애니메이션영화로 제작한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는 웹툰 줄거리 가운데 유미가 바비와 안정적인 연애를 하면서도 자신의 직업에 의구심을 품고 퇴사를 고민하는 구간을 툭 베어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약 6년간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한 〈유미의 세포들〉을 전부 읽지 않은 관객이라도 얼마든지 유미의 일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입부부터 평범한 직장인 유미와 유미의 ‘세포들’을 빠르게 소개하며 영화의 문이 열린다. TVING 오리지널 시리즈와 tvN 드라마로 방영한 〈유미의 세포들〉(2021~2022)에서 세포 등장 부분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은 김다희 감독이 연출한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는 원작을 충실히 따른다. 


〈유미의 세포들〉은 유미의 연애담을 담은 로맨스물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미의 내적 성장과 자기 일을 찾아 가는 과정을 그려 낸 드라마 장르다. 〈인사이드 아웃〉(2015)에서 열한 살 라일리가 낯선 곳으로 이사한 뒤 사춘기를 겪으며 관계의 변화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다섯 가지 감정(기쁨, 까칠, 버럭, 소심, 슬픔)으로써 표현한 것과 달리 〈유미의 세포들〉에는 수많은 세포가 등장한다. 거기에는 감정을 주관하는 세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린고비 세포’, ‘명탐정 세포’, ‘스케줄 세포’ 등 유미의 자잘한 습관과 행동에 관여하는 세포들도 포함이다. 어떤 세포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유미의 세포들〉은 다양한 장르로 나아갈 여지가 있는 셈이다. 드라마에서 강조한 것이 사랑 세포라면, 영화에는 불안 세포와 작가 세포가 전면에 등장해 사랑 세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어느새 훌쩍 어른이 돼 버린 나

팀장의 횡포에 억지로 야근하고서야 겨우 퇴근하는 유미. 그에겐 퇴근길마다 반복 재생하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있다. 유미가 연습장에 쓴 소설을 반 아이들이 재미있게 돌려 보며 포스트잇에 감상을 남겨 주던 장면이다. ‘유미 작가님 잘 읽었어요. 다음 편 기대할게요!’ 작가 세포는 추억 세포에게 그 장면을 재생해 달라고 요청한다. 데이트까지 취소하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낸 뒤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유미에게는 기쁜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유미의 묻어 둔 꿈을 상기시키는 추억이다. 


연애도 지금의 유미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지만, 유미가 힘들 때 꺼내 보는 것은 결국 고등학생 유미의 가장 즐겁던 순간이다. 작가라는 꿈을 맘껏 펼치며 로맨스 소설을 써서 친구들에게 보여 주던 과거. 이때를 떠올리며 유미 안의 작가 세포는 다시 힘을 내고 싶어 한다. 물론 작가 세포가 나설 때마다 자린고비 세포가 유미의 통장잔고를 들이밀며 퇴사를 말린다. 세포들은 이처럼 누구 하나가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칠 때 또 다른 세포가 나타나 그를 말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춰 낸다. 


그러나 결국 일이 터진다. 오랜 시간 밤까지 새우며 준비한 프로젝트의 발표를 채 간 팀장은 유미의 아이디어가 자기 것인 양 사장 앞에서 거짓말한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칭찬을 듣는 팀장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유미는 당장 팀장에게 사직서를 날리고 싶다. 유미의 마음속에서 세포들은 ‘퇴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법정다툼을 벌이기 시작하고, 본심 세포가 나타나 외친다. “때려치워!” 

물론 퇴사한다고 해서 당장 작가로 데뷔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꿈을 찾아 퇴사한 유미지만, 글이라는 게 공모전 일정에 맞춰 술술 써지진 않는 법. 모니터 앞에서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작가 세포는 자신이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며 엉엉 운다. 


행복을 위한 아우성

작가 세포와 불안 세포가 또 다른 주인공인 만큼,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유미는 고민하고 흔들리며 계속 불안하다. 작가를 향한 도전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데다가 연인인 바비의 마음도 믿을 수 없어 걱정이 쌓인다. 유미는 어른으로서 살아가지만, 유미의 세포들은 아직 어른스럽지 않다. 바비가 다른 여자에게 흔들리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나쁜 상상을 하면서 세포들도 우왕좌왕한다. 


유미의 세포들이 품은 목표는 오로지 ‘유미의 행복’이다. 타자화하여 표현했지만, 세포들은 결국 유미의 마음속에 사는 존재다.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원하고 믿고, 그를 위한 결정을 해 나가는 것은 유미 자신이란 소리다. ‘유미의 행복을 위한 세포들의 분투와 아우성’이라는 큰 모티브 안에서 유미는 극 안의 다른 인물들과 자신의 불안을 나누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들이 등장해 조언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세포들끼리 충돌하고 대화하고 싸우며 스스로 선택할 뿐이다. 연애조차도 유미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의 앞날을 결정하고, 스스로를 설득해 내고 노력하고 개척해 나가는 주체는 결국 나여야만 하는 것이다. 

혼자가 되는 일이 불안해서 자신을 속여 가며 ‘바비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라고 되뇌는 사랑 세포, 이제 난 어떻게 하냐며 불안해하는 불안 세포에게 유미는 말한다. ‘사랑이의 마음이 나를 웃음 짓게 했고, 불안이의 걱정이 나를 나아가게 했어. 그렇지만 이제는 나를 속이지 않을래.’



주체적으로 삶과 사랑을 찾는 일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와는 조금 다르지만, 불안한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삶과 사랑을 개척한다는 면에서 함께 들여다볼 만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tvN 〈눈물의 여왕〉(2024)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재벌 아내와 그 가족 몰래 이혼을 준비하던 현우(김수현 분), 재벌가 이사로서 영원히 당당하고 도도하게 살 줄 알았으나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해인(김지원 분)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불안해하며,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도 계속 상대를 의심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다. 


현우는 아내 해인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굳이 이혼을 준비하지 않는다. 아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사이’로 가장하여 잘 지내고자 결심한 것. 그러다 현우는 해인을 향한 크나큰 애정을 (갑자기!) 발견하고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 건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는 현우가 지닌 무술 능력과 지략가다운 면모뿐 아니라 한 여자만을 위해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순정을 강조한다. 그가 2회까지 아내의 죽음을 바라며 안전이별을 계획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캐릭터의 성격이 크게 변화한 것이다. 



시청률이나 화제성과는 별개로 이 드라마의 장면들은 작가의 전작을 반복하며, 대부분 장면과 대사는 코믹함만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고 봐도 좋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눈물의 여왕〉에 감정을 이입하는 이유는 배우들의 매력, 그리고 두 주인공이 과거의 상처를 오직 서로를 통해서만 치유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일 테다. 엄마로부터 차별과 학대를 당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 해인은 현우에게 차츰 의지하면서 마음속 아픔을 치유한다. 현우는 재벌가에 들어와 받은 모멸감과 아이의 유산으로 인한 괴로움을 전부 해인 탓이라고 여겼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해인을 향한 사랑을 점점 깨닫는다. 게다가 진정한 사랑을 찾으며 두 사람은 조금씩 어른스러워진다. 특히 해인이 현우에 대한 애정을 키워 가며 회사 직원들의 복지를 챙기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유미의 세포들〉 시리즈에서 유미는 연애에서 사랑과 안정만 얻은 게 아니라, 이별을 통해 성장하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하나씩 깨달아 갔다. 〈눈물의 여왕〉 역시 이별을 준비하다가 다시 시작된 사랑을 통해 현우와 해인 모두 각자 원하는 것을 알아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해인이 그토록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길 원한 이유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사랑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현우 역시 재벌가 퀸즈 상무이사 홍해인이 아니라 홍해인이라는 한 사람과 배우자로서 마주 보고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싶은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 혼자 선술집에서 술과 안주를 시켜 먹으며 ‘나 어른이구나.’ 생각했다고 쓴 글을 봤다. 또 누군가는 어른이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진짜 어른은, 계속 같은 자리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는 태도를 지닐 때 비로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퇴사한 뒤 다른 꿈을 찾아 나아가는 유미처럼,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던 일을 이어 가고 다시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해인처럼.


*고교독서평설 5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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