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드림> <패스트 라이브즈>
너를 사랑했어, 지금은 비록 우리가 헤어졌지만
<로봇 드림> <패스트 라이브즈>
타인과 이토록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다니, 어떤 순간이 너무 달콤하고 충만할 때 '이건 어젯밤 잠자리에 든 내가 꾸는 꿈은 아닐까' 싶다. 그 꿈에서 되도록 느리게 깨고 싶어서, 이 감미롭고 포근한 시간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어서 계속 눈을 감고만 있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 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어느 느긋한 오후와는 다른 감각이다. 비로소 외롭지 않다는 것, 있는 지도 몰랐던 내 반쪽을 드디어 만난 것 같다는 기쁨과 환희, 헛헛했던 마음이 다른 이로 인해 이토록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다니 놀라운 발견이다. 이렇듯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줄 것 같다는 기대는 새 친구를 사귈 때마다 가졌던 이루어지지 못할 기대와도 같다.
생각해 보면 신기하지 않은가. 수억명의 지구인 중에서 어쩌다 우리가 비슷한 지역, 동시대에 태어나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배정되는 동급생이라는 관계 역시 그렇다. 어쩌다 한 반이 되는 인연을 맺은 후에는 강제성에 의해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긴 시간 1년 동안 같은 시간표에 의해 움직여야 하고 중간 중간 생기는 학내 이벤트를 통해 우정이라 이름 붙여진 감정을 쌓게 된다. 학기 초에는 다소 어색하게 거리를 유지하지만 친밀감을 가지고 친구가 되는 이 '인연'은 졸업 후에도 생각보다 오래 이어진다. 사랑, 우정 그리고 인연은 한국에만 있는 말이 아니지만 이를 한국적 정서로 영화 속에 풀어내자 해외 관객들은 '인연'이라는 말의 울림을 동양적 신비로 이해하기도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24년의 간격을 두고 뉴욕에서 다시 만난 첫사랑 남녀의 조우를 그린 영화다. 열두 살 나영(그레타 리)은 부모님을 따라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다. 매일 등하교 길을 함께 걷던 나영의 같은 반 친구 해성(유태오)은 나영이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무룩해진다. 해성은 나영을, 나영은 해성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 감정을 '사랑'으로 인지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부모의 결정으로 떠나는 것이지만, 나영 역시 친구들에게 자신이 이민을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 꿈은 노벨문학상인데 한국은 너무 작은 나라거든. 노라라는 영어 이름을 새로 갖게 된 나영이 이별을 너무 아쉬워하지 않는 것이 어린 해성은 섭섭하기만 하다. 열 두살에 고백이나 어떤 이별의 징표도 주고받지 못한 두 아이는 그렇게 헤어지고, 12년 후 노라는 해성이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찾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다. SNS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낮과 밤이 바뀐 시차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서울에서 영상 통화를 하며 서로의 감정이 여전히 애틋하게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의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지게 되고 그로부터 또 12년이 흘러 노라는 뉴욕으로 이주해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해 극작가로 살고 있다. 서울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는 해성은 긴 휴가를 받고 나영을 만나러 뉴욕에 오겠다는 연락을 해오고 둘은 그렇게 24년 만에 진짜로 만나게 된다.
열 두살에 헤어지고 30대가 되어 뉴욕에서 만나게 된 나영과 해성이 처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말이 있다. 해성- 와, 나영- 와, 해성 -와, 나영-와...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신기해 하며 '와'라는 감탄사만 여섯 번 반복한다. 정확히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아도 "와"라는 한 마디에는 여러 가지 말이 숨어 있는 듯 하다. 와, 네가 정말 여기에 와 있네? 내 앞에 네가 있네. 그래, 우리 정말 여기에 같이 있네.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넘버3>의 송능한 감독의 딸인 셀린 송 감독은 열두 살이 부모님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했고 뉴욕에서 극작가로 일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친구가 뉴욕에 놀러 와서 남편과 함께 셋이 바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 자신에게 매우 특이하게 느껴졌고, 그 장면에서 출발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탄생했다. 해성과 노라, 아서가 나란히 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이 영화의 오피닝 시퀀스이기도 하다. 한국어만 할 줄 아는 남자와 그와는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여자, 그리고 옆에 있는 미국인과는 영어로 대화를 하고 두 남자 사이의 접점은 한 여자 노라다. 두 남자와 과거와 현재를 공유하고 있는 노라의 복잡한 감정을 이 영화는 전생과 인연이라는 동양적인 단어로 설명한다.
첫사랑을 만나러 미국까지 날아와 함께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뉴욕 거리를 걸으며 노라는 해성에게 묻는다.
"그때 왜 나를 찾았어?" 해성은 "그냥 군대에서 니가 생각났어."
라고 한국어로 대사를 주고 받는데, 이러한 해성과 노라의 장면은 한국 바깥의 관객들에게는 이국적인 감상을 만들어 내는 모양이다. 해성이 나영에게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많은 '만약에'들을 가정한다면, 나영에게 중요한 것은 생기지도 않은 'IF'들이 아니라 스스로 내린 선택이다. 이민을 가면서 '난 노벨문학상을 받으러 외국으로 갈거야!'라고 결정했던 어린 나영, 꿈을 이루기 위해 해성과의 영상 통화를 끝내던 20대의 노라, 그리고 아서와 결혼해서 뉴욕에 살며 작가로 사는 삶을 선택한 지금의 노라. 이 모든 지금을 과정에서 해성을 선택하지 않은 것 역시 노라의 결정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적인 '8겹의 인연'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영화임과 동시에 실은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지금은 내 삶에 현존하지 않을지라도) 그 모든 인연이 의미가 없지 않으며 결국 생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연, 인연이 아니라 나의 선택임을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사는 지구에서 너를 만난 게 기적이"라고 설파하는 영화가 아니라 실은 스쳐 지나가고 결실을 맺지 못한 인연이라도 과거의 나 속에 모두 영향을 주었으며 또 살아가며 마주치는 인연은 결국 인간의 선택 안에서 소중하다는 것을 노라는 이렇게 말한다. "너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20년 전에, 난 그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거야." 라고.
<로봇 드림> 이것은 누가 꾸는 꿈입니까
애니메이션 버전의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평을 듣기도 한 <로봇 드림>에는 위와 같은 대사가 없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사는 개가 로봇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고 불가항력에 의해 헤어지게 된다. 로봇은 꿈속에서 계속 떠난 개를 그리며 개와 행복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개의 뉴욕의 일상과 로봇의 상상은 오직 사운드와 2D 애니메이션만으로 그려지는데, 이 영화는 조금도 정적이지 않다. 끝없이 움직이는 뉴욕이라는 도시 속에서 개와 로봇에게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생생한 활력을 가져온다. 영화의 주인공은 개와 로봇, 그리고 뉴욕과 음악이다. 특히나 영화 속에서도 개와 로봇이 함께 디스코를 출 때 등장하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는 굉장히 흥을 돋우는 곡임에도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는 마냥 신나게 들을 수 없게 된다.
사랑하고 함께 살기를 선택하고, 서로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며 활력을 주었던 관계도 모종의 이유로 갑자기 끝나버릴 수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부른다. 개도, 로봇도 이별을 원치 않았지만 로봇은 해변에 남을 수 밖에 없고 개는 로봇을 구할 수가 없다. 불가항력적인 이별 속에서 개는 자신의 삶으로 홀로 돌아가 로봇을 대체하는 존재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역시 쉽지 않다. 로봇은 고장난 채로 움직일 수가 없어, 해변에 계속 누워 눈만 깜빡인다. 움직일 수 없는 고장난 로봇이 주인공임에도 로봇이 행복한 꿈을 꾸고, 다음 장면에서는 꿈과는 정반대되는 잔혹한 로봇의 현실을 이어붙여 보여줌으로서 큰 감정적 진폭을 자아내는 것이 이 영화의 연출법이다.
감독 파블로 베르헤느는 90년대에 뉴욕에서 유학을 했었고, 그때 사랑에 빠졌던 뉴욕을 애니메이션으로 충실히 재현했다. 개와 로봇이 데이트를 하며 지나가는 뉴욕의 상점가 풍경과 지나가다 사먹는 핫도그, 센트럴파크에서 산책하다 마주치는 동물들, 이스트빌리지의 80년대 비디오 가게와 로봇이 꾸는 꿈에서 재현되는 둘의 행복한 일상은 뉴욕이라는 도시를 여느 영화보다 매력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앞서 소개했던 <패스트 라이브즈>가 뉴욕에서 재회한 남녀의 데이트를 통해 '관광지 뉴욕을 '풍경'으로써 소환했다면 <로봇 드림> 속 뉴욕은 현지인의 생활 속에서 지나가는 뉴욕의 평범한 공간들을 레트로한 풍경으로 살려내면서 마치 내가 90년대에 뉴욕에 살아본 것 같은 기이한 그리움을 자극한다.
<로봇 드림>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뉴욕에 외롭게 혼자 살던 개가 광고를 보고 로봇을 주문하고 함께 살게 된다. 모험심이 강한 로봇 덕분에 둘은 함께 바닷속도 헤엄치고 춤도 추며 즐겁게 우정을 나눈다. 개는 로봇과 함께 하며 더이상 고독하지 않고 둘에게는 즐거운 이벤트만 가득하다. 하지만 해변에 놀러 갔다가 로봇이 고장이 나고, 개가 로봇을 고칠 부품을 가지러 간 사이 해수욕장이 폐장을 해버리고 만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까지는 로봇을 해변에 버려둬야 하는 상황. 뉴욕시에 갖은 청원을 해보지만 개는 로봇을 꺼내올 수 없고, 해변에 누워 있는 로봇은 혼자 개와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계절이 가며 개에게도 여러 사건이 생기고, 누워 있는 로봇 위로는 새들이 머물기도 하고 다른 동물들이 나타나 로봇의 부품을 잘라가기도 한다.
완벽한 반려인과 사랑을 그리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나와 잘 맞는 나의 반쪽, 몰랐던 새 삶의 활력을 가져다 주고 내가 가닿지 못했던 낯선 영역까지 나를 데려가는 사람. 고독을 물리쳐 주고, 영원히 함께 하며 즐겁게 대화 나누며 식사를 같이 할 단 한 사람을 찾는 꿈. 개는 그 꿈을 이루었다 생각했지만 갑자기 그 한 사람을 빼앗긴다. 개가 만들어낸 환상과 같았던 로봇이 사라지고 둘이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모습은 왜 이다지도 슬픈 것일까. 그것은 이들이 개이고 로봇이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충실한 개와 로봇이 버려진 후 하염 없이 연인을 기다리는 슬픈 영화를 이미 여러 개 본 적 있다.(이 분야의 최고작인 <환상의 마로나>와 <월-E>를 함께 추천합니다)
개와 로봇의 우정과 이별을 그린 영화라서 <로봇 드림>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완벽한 연인에 대한 환상, 그리고 서로 사랑함에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별, 서로 한 없이 그리워 하더라도 그 마음을 품고 다른 삶을 기꺼이 살아야만 하는 인생의 역설과 찬란함을 이 영화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설득 해낸다. 그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로봇도, 개도 말이 없고 표정이 다양하지 않음에도 그저 이들의 변화를 묵묵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어느덧 울게 된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고 깊이 애정을 나누고, '다신 이런 사랑, 우정이 없을 것 같아. 내겐 너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느꼈던 그 시간들이 다신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지나간 그 시간이 아무리 내게 의미 있었다고 해도 그 때 너와 나눴던 그 마음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기에. 그러니 이것은 로봇이 꾸는 꿈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나고픈 우리가 꾸는 환상일 지도 모른다.
*고교독서평설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