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러니까 살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by 김송희

그러니까 살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common (1).jpg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한 후 "이 영화를 어떻게 봤냐"는 질문이 친구들과의 식사 중 대화 주제로 둥실 떠올랐다. 영화 쪽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장난스레 “그대들, 미야자키의 신작을 어떻게 봤는가"라고 운을 떼면 미처 관람을 못한 누군가는 “어렵고 재미없다던데?”라며 인터넷에서 본 한줄평을 제 것인냥 수저를 얹고, 다행히 영화를 발 빠르게 본 다른 이는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어. 물론 하야오의 최고작은 아니지.”라고 소회를 밝힌다.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그들 각자의 하야오 최고작을 꼽는 것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최고라는 이도 있고, “뭐니뭐니 해도 <모노노케 히메>가 최고지!"라고 외친 친구의 눈앞에는 영화 속 시시가미 숲의 사슴신이 보이는 듯 표정이 아련해진다.


한 지인은 뜬금없이 ”나는 <붉은 돼지>가 이상하게 좋았어. 아마 처음으로 본 애니메이션이어서 그랬나봐.“라며 쓸쓸히 추억 여행을 떠난다. 그러고 보면 각자 꼽는 하야오의 최고작은 모두 어릴 때 본 영화들이다. 지금도 <붉은 돼지>만큼 자신에게 충격을 준 애니메이션은 전무후무하다,고 한숨을 푹 내쉰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보면 진짜 별로인 장면도 많은데 말이야. 미야자키 스스로도 일에 치어서 뇌가 두부가 된 중년 남성들을 위해 만든 영화라고 했잖아요. 그때는 왜 좋았을까. 아마 어른이 되어서 봤더라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누구에게나 처음 접하는 하야오의 영화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될 것인지, 혹은 <미래소년 코난>이나 <이웃집 토토로>, <마녀배달부 키키>인지에 따라 거기서 얻게 될 메시지와 감동,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희망까지도 달라질 것이므로. 그러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하야오 입문작으로 보게 될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작품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보기를 당부하며 이 영화의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common (2).jpg


소년이 잠에서 깼을 때, 밖은 어수선하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이 불에 타고 있다는 소식를 들은 소년은 다급히 2층을 향해 네 걸음으로 달음박질친다. 아이가 오르기 벅찰 정도의 높은 계단, 그리고 그 계단을 힘껏 뛰어올라 마주하게 될 현실 혹은 진실. 미야자키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아이’의 장면, 소년이 목도하는 불에 활활 타오르는 건물까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을 영화는 첫 시퀀스부터 연달아 보여준다. 은퇴를 번복하고 10년 만에 돌아온 감독이 마치 ‘내가 돌아왔다!’고 인장을 쾅쾅 박아넣는 것 같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일본에서 마히토는 폭격으로 어머니를 잃는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조종기 덮개를 만드는 군수 공장의 사장이다. 전쟁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었지만, 아버지가 군수 공장을 운영하는 덕에 전쟁의 빈곤과 고통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나 있는 모순. 소년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년 시절을 많이 닮아있다. 영화의 제목인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에서 비롯했고, 미야자키는 이 책을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작은 소년의 방황과 어른의 답변이 이어지는 철학적인 내용인데, 제목만 빌려왔을 뿐 영화의 각본은 미야자키 감독이 새로 썼다.


마히토는 전쟁이 한창인 복잡한 도시를 떠나 아버지의 공장이 근처에 있는 한적한 시골로 떠난다. 도착하자 새엄마 나츠코가 인력거를 타고 마중 나온다. 마히토는 영화 중반까지 나츠코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아버지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부른다. 사실 나츠코는 엄마의 동생이고 마히토는 어쩐 일인지 시골에 와서 나츠코를 처음 만난다. 마히토에게 금세 친근하게 굴던 나츠코는 자신의 배를 만지게 하며 “여기 동생이 있다”고 임신 사실을 명랑하게 알린다. 마히토가 도착한 아버지의 별장은 서양식과 일본식이 교묘하게 뒤섞인 공간으로 마히토는 이곳에 도착하자 또 다시 여러 계단을 오르내려 자기 방에 어렵게 당도한다.

common (3).jpg


열 두살 남짓의 소년이 갑작스레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전쟁에 대한 반감, 그런 전쟁에 일조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을 깊이 숨기고 낯선 곳에서 새엄마의 임신 사실까지 들었으니 마음이 편할리 없다. 마히토는 꿈에서도 화마에 휩싸인 엄마를 만나고, 집을 배회하는 불길한 왜가리와 마주친다. 전학 간 학교의 동급생들은 도시에서 온 도련님인 마히토를 적대시하고, 하교길에 아이들과 크게 다툰 마히토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제 손으로 돌을 들어 자기 머리를 찍어 버린다. 마히토의 머리에서는 피가 펑펑 쏟아지고, 이때 찢어진 상처 밖으로 밀려 나오는 피는 불가항력적인 무언가--뒤에 마히토가 생선의 배를 가르고 내장이 쏟아지는 장면과 동일--로 표현된다. 그저 내성적이고 순응적인 소년으로 보였던 마히토는 이 장면을 기점으로 기이한 일을 겪고 관객들은 이때부터 마히토가 조용하고 착한 아이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머리를 다쳐 앓아누운 마히토는 그때부터 환영처럼 왜가리를 보기 시작한다. 왜가리는 말을 할 뿐 아니라 갑자기 아저씨의 얼굴을 한 채 마히토를 공격한다. 마히토는 왜가리를 무찌르기 위해 직접 화살을 만드는데, 왜가리는 어째서인지 마히토를 향해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모시겠다”며 유인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갑자기 부모가 돼지로 변하고 낯선 온천장에 떨어졌던 치히로를 그 세계의 마녀 유바바에게 인도한 것이 잘생긴 소년 하쿠였던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낯선 세계는 신비롭고 아름답기보다는 정체불명이고 불길한 인상을 준다. 그 길의 안내자인 왜가리 역시 작화조차 비호감으로 그려져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이 영화 개봉 후 굿즈 판매를 염두에 뒀다면 분명 극 중 분량이 큰 왜가리를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렸어야 마땅하건만,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가리를 향해 ‘기분 나쁘게 생겼다’고 평한다.

common (4).jpg


이 영화가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마히토가 갑자기 이세계로 뛰어들고 그곳에서도 여러 차례의 공간 이동을 하는데 그 동선이 한눈에 잡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긴 어떤 곳이고 너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이동해야 한다, 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동행자조차 없다. 펠리칸, 대형앵무새 등 악당들은 뜬금없이 등장하고 왜인지 마히토를 잡아 먹으려 든다. 마히토에게도, 관객에게도 충분한 설명 없이 갑작스러운 운명이 마구 들이닥치는 것이다. 또한, 수동적인 아이처럼 보였던 마히토는 그 집의 지박령같은 현명한 노파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제 선택으로 큰할아버지의 탑으로 기어 들어간다. 다만, 직접 무기를 만들어 기꺼이 모험에 뛰어드는 것치고 우리의 주인공 마히토는 어쩐지 매사 덤덤하고 놀라지도 않는다. 갑자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커다란 펠리칸이 도끼를 들고 쫓아와 목숨이 위험해도 마히토는 남의 게임방송을 시청하듯 덤덤하다.


이러한 마히토의 태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와는 사뭇 다르다.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하쿠가 준 밥을 와구와구 먹으며 삶의 의지를 보이는 것과 달리 마히토는 모험 중에도 주체성을 보이지 않는다. 마히토가 현실 세계에 있을 때, 전쟁 중이라는 실제 배경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게 그려진다. 음악 사용조차 극도로 줄이고, 마히토 동네의 푸른 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강물, 조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영화가 응시하고 있기에 관객들은 풍경에 지쳐 마히토의 모험을 기다린다. 이윽고 모험이 시작되어도 마히토의 표정은 평온하다. 그것은 마히토에게 생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common (5).jpg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꿈과 광기의 왕국>(2013)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서 미야자키는 갈수록 나빠지는 세상에 대해(특히 전쟁과 환경파괴)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다. 그가 긍정하는 것은 오직 아직 가능성이 많은 어린이 뿐이다.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타겟 관객의 연령대를 정한다.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연령대는 아주 어린 아이들일 때도 있고 고연령의 청소년일 때도 있다. 아이들이 본다고 해서 이해가 쉽고 단순한 구조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고, 갈수록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한탄이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한다. “머리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네. 그렇지만 보고선 모르겠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알려고 하는 걸 포기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이 영화를 무턱대고 난해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서일 지도 모르겠다.


마히토가 이세계의 창조자인 큰할아버지에게 가까워질 때, 문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을 것이다’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전 세대로부터 배우지 말고, 너희는 너희의 세상을 새로이 창조해가라는 직설적인 메시지임과 동시에 하야오 스스로 현시대에 대해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조적 대목이다. 이 영화를 장난스레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잔소리> 보고 왔어요.” 제목이 다음 세대에게 가르침을 주는 듯한 뉘앙스라 그런지 82세 할아버지의 한탄과 잔소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작화,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주인공 뒤로 히사이시 조의 풍성한 음악이 들리는 영화 속에서도 하야오는 늘 비관주의의 톤을 구사해왔다.

common (6).jpg

각본을 쓰지 않고 그림콘티로 전체 내용을 그리는 하야오는 본인도 그리는 동안은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고 밝힌 바 있다. 미야자키의 동료이자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의 책 <지브리의 천재들>에는 미야자키가 스즈키의 조언에 따라 캐릭터의 내용을 밝게 바꾸거나 인물을 죽이지 않았던 사례들이 등장한다. 대중의지지, 흥행을 위해 그리지 않는다. 기획이 먼저 주어지고 마음 속에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이야기를 끝끝내 그려보이고 마는 것이다. 지브리 스튜디오 에는 직원들일 하는 동안 보육을 돕는 어린이집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매일 그곳의 어린이들을 향해 인사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다음 세대, 특히 어린이를 사랑하는 하야오가 비관하는 것은 어른들이 이미 망가트려 버린 지금 사회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일본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제작비와 7년의 제작 기간이 소요됐다. 전작인 <바람이 분다>는 개봉한 해 일본 흥행성적 1위로 120억 엔의 흥행 수입을 올렸음에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하야오는 그 말을 듣고 경악했다고 한다. “한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를 만드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게 된 건 사실입니다.” 하야오의 스승이자 함께 지브리를 이끌어 갔던 고 다카하타 이사오는 "우리 다음의 연출가나 애니메이터들은 새 작품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함께 걱정한다.(<지브리의 천재들> 중)


비관적인 하야오의 분신이기도 한 마히토는 그렇다면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이세계에서 찾았을까. 이미 망가져 버린 현실 세계 대신 안정적인 이세계를 물려주겠다는 큰할아버지의 청을 거절한 마히토는 모험 중 처음으로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한다. 그것은 다시 돌아가, 살아보겠다는 결정이다. 이번 퀘스트를 깨도 또 다른 역경이 닥치고, 겨우 최종 괴물을 물리친 줄 알았건만 또 다른 최종장이 펼쳐진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인생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일본 포스터 카피는 “살아라!”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카피는 “살아가는 힘을 깨워라”였다. <바람이 분다>에서 주인공 지로가 아내에게 들었던 가장 소중한 말도 “당신은 살아야만 해”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러니 어떻게 보다 ‘살’에 방점이 찍혀 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살아내라고, 그것 밖에 없다고 82세 할아버지는 말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큐멘터리에는 그가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불행하다고 외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행복과 삶에 대한 말을 덧붙이며 끝내려 한다. “인간 개개인의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고 하잖아요. 평소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런 걸 목적으로 산다는 게 이해가 안돼.(중략)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중요하죠. 죽을 힘을 다해야 겨우 살아남는 게 삶입니다. 괴로워도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면 그걸로 족해요.”(꿈과 광기의 왕국 중)


*고교독서평설에 실린 글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왜 남의 고통을 껴안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