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시는 분들의 명단이 사내 메신저를 타고 구석구석 전해진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누군가를 보내버리고 싶은(?) 작은 소망들이 모여 찌라시는 나무 위키처럼업데이트된다.
전에 모셨던 여성 임원이 퇴출 리스트에 있다. 아랫사람들 힘들게 하기로 악명 높지만 사장급에 든든한 줄이 있어서 임원 생활 장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동아줄이 끊긴 건가? 아니면 바로 윗줄이었던 전무급이 사내 정치에서 밀렸다던데 그 영향인가?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분위기 파악을 위해 해당 부서 동기에게 연락해보았다.
"그분 나가는 거 맞아..?"
"몰라. 근데 다들 기도하고 있어. 전화 오기를"
퇴출 통보는 간단히 전화 한 통이다. 사람들은 임원들이 전화를 받을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찌라시는 찌라시일 뿐. 결국 퇴출 전화는 오지 않았고, 그 여성 임원은 살아남았다. 김샜네. 동기는 좌절했다. 찌라시는 누군가에게는 희망고문으로 끝나버렸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퇴출 통보는 짧은 전화 한 통이다. 그리고 바로 짐을 싸서 그날 회사를 나간다. 오후가 되자 누가 누가 퇴출 전화를 받았는지 실제 명단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옆 그룹에 상무님이 그 전화를 받으셨단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는 잠깐 허탈한 표정에 눈물을 글썽였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책상을 정리하셨단다. 그룹원들은 상무님께 숙연한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그렇게 2년간 함께한 시간은 끝났다. 임원이 되는 순간에는 박수와 환호, 축하 화분도 받고, 임원의 각오도 들었지만 나갈 때는 이렇게 조용하고 간소하다. 별이 지는 순간은 이렇게 순식간이구나. 하루 종일 회의하느라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해 마음이 씁쓸했다. 그의 자리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양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치 쇼미더머니를 보는 것 같다. 2차 예선에서 60초간 랩을 선보인 후 심사자들 과반수 이상이 Fail을 선택하면 가차 없이 무대가 불구덩이 속으로 내려앉는다. 왜 탈락인가요?라고 물을 것도 없이 그저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질척거림이 허용되지 않는 짧은 통보.
그래도 ★은 내 가슴에
임원이 임시 직원의 준말이라는 말이 와 닿는 시기다. 또한 만년 부장의 존버가 그깟 순간 반짝이고 말 임원 달기보다 더 나아 보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후한 대접과 맞바꾼 2년마다 찾아오는 고용 불안. 무거워지는 책임감과 실적 압박은 종종 건강도 해쳐 임원 달고 병도 달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일찌감치 임원 되기는 포기하고 100세 시대 가늘고 길게 가자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임원 시켜준다고 하면 마다할 사람은 없을 터, 임원이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1%의 별이 되었다는 자부심, 우러러보는 주변의 시선도 있지만, 무엇보다 연봉이 껑충 뛴다.
부장에서 임원이 될 경우 평균 연봉 인상액은 3억 587만 원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직원의 평균 연봉은 1억, 미등기 임원의 평균 연봉은 6억이라고 하니 직원 → 임원의 계급 이동이 의미하는 바가 와 닿는다. 게다가 개인 비서와, 개인 차량, 운전기사에 비즈니스 클래스에 골프 회원권까지..
그러니 다들 임원이 되기를 갈망한다. 비록 짧게 빛날지라도 임원 스펙은 평생 따라다닐 것이니, 재계약이 두려워서 메이저리거 선수가 되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내가 임원이 될 가능성은?
나의 야망과 역량과 관계없이, 그냥 데이터로만 한 번 따져보자.
우리나라 100대 대기업의 임원 비율은 0.8%이다. 그리고 여성 임원의 비율은 4.5% 라고 한다. 0.8% x 4.5% = 0.036%
2020 입시에서 서울 소재 의대 합격률이 정시 전국 상위 0.03%였다고 한다. 여성 임원이 되기란 서울 소재 의대 들어가는 정도의 경쟁률이라는 것이다. 공부야 공부 머리와 인내심의 변수라 몇 년이고 죽어라 하면 될 수 있겠지만, 회사에서 잘 나가기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순수한 전문성과 실력 외에도 내가 잡고 있는 동아줄의 견고함.. 그리고 현란한 줄타기 기술. 하지만 내 선택과 별개로 내 줄의 그 위 줄, 또 그 위 줄 등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줄들 중 하나라도 끊기면 한순간에 같이 무너질 수 있다. 그런 사태를 막아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운빨... 이렇게 너무 많은 요소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 저 하늘의 별처럼 따기 힘들어서 임원을 별이라 하나보다.
연예인 걱정, 임원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
제 발로 당당하게 걸어 나간 임원들도 있다. 이미 다른 회사로 옮겨가기로 한 경우나, 주식으로 충분한 돈을 벌어 직접 스타트업을 하려고 나가는 경우다. 예상치 못하게 퇴출당하더라도 임원 시절 쌓아놓은 부로 카페나 서점을 차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못다 한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교수가 되기도 하고, 작가나 화가가 되어 예술가로서 제2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래서 연예인 걱정, 임원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나 보다. 반면, 임원이 퇴직한 후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해 택배 기사가 되거나, 치킨집을 차리거나, 경비원을 한다는 뉴스도 종종 접한다.
결국, 임원으로 퇴직하느냐 아니냐 보다, 퇴직하기 전에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느냐의 문제이다.
고등학교 때는 문과 갈까 이과 갈까 고민을 한다. 그 후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한다. 하지만 직장에서도 늘 내 적성인가를 고민한다. 고민은 끝도 없지만 기한이 있다면 퇴직 전이다.직장에 다닐 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파악하고 퇴직 후 방향을 미리미리 설계해야 한다. 100세 인생인데 정년을 짧아진다. 임원이 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임원도 결국 자기 생에 한 점인 기간일 뿐이다. 선택받은 별이 되든 아니든 내가 평생 하면서 행복한 일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