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걸로 무엇을 만들게 될지 두고 보세요” 14P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이유는... 한 백만 가지. 그 중 유독 도드라져 돌아 누워있는 등에게 물어보니, ‘무엇을 쓸지 몰라서’ 랜다. 써야할 거리를 찾을 때까지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겠네라고 대꾸하자,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런 날들이 무수히 흘렸고, 나도 거의 누워서 퍼져버렸다. 그런데 마침내, 한 페이지를 만났다. 돌아누운 등이 반응했다. 우리는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훌훌 털고 일어난 등짝은 얼굴을 보였고, 그건 알다시피 내 얼굴, 나와 내가 정면으로 마주한 사건.
이러한 내적 영감으로 가득 채워진 사건은 꽤나 많았던 걸로 기억되지만, 우리는 이제 각성의 시간 이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의 글은 그 후를 담아낼 것이다.
솔직히 책을 읽다가 자신의 꿈과 욕망에 배반한 채 등 돌아 누운 지 꽤 된 그 녀석을 일깨우는 문장을 마주친 적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 때를 기억하고 당장 무엇이든 뜯어고치고 행동했더라면 얼마나 내 삶이 풍요롭고 내 정신이 건강해졌을까? 그 행운의 순간. 기적과 같은 에너지가 샘솟는 그 순간을 잊지 말자 하면서도 책장을 덮으면 미끄럼틀타고 내려와 원래 집에 들어가듯 책과 삶은 분리된다. 그러면서도 또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그리고 잊는다. 그 반복의 과정에서 하나의 깨달음이 번뜩였을 것이다. 읽으면서 옳다고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따라 실천해 옮겨보는 게 어때. 좋아하는 페이지를 따라가 보면 무엇이 나올까.
바로 방식, 그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우리가 쓰고 싶은 것.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이다.
여러분들은 이미 궁금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책의 무슨 페이지에서 홀딱 빠졌는지?
이제, 그 책은 두 손에 꼭 주먹이 쥐도록 하게 하는, 내게 첫 삽 같은 책이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별글 / 한수민 옮김)
2020년 3월 초, 코로나 바이러스 19 발병이 전세계를 퍼져나가고 있을 때, 지인의 추천으로 <페스트>를 다시 읽었다. 절망에 익숙해져 갈 때, 비슷한 절망을 그린 작품을 찾게 되는 것을 미디어학에서는 단순 쾌락(헤도닉hedonic)이 아닌 의미심장한 즐김(유다이모닉eudaimonic)을 추구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즉, 나의 절망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를 소설작품을 읽으면서 곱씹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절망, 고통을 볼 때는 강력한 ‘공명효과’가 작용한다. 그래서 2020년 봄, 나의 페스트 읽기는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로 온 정신이 이동한 듯한 완전한 몰입, 공감 상태에서 평화 시기에 읽었을 때의 두, 세배만큼 강력했다.
카뮈의 대표작 <페스트>는 1947년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프랑스 전역에 퍼졌다. 그 당시 이 책은 하나의 신드롬처럼 빅히트를 쳤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 어수선한 사회에서 그 후유증은 아직 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 중 누군가를 잃었고 다시 딛고 일어서기까지 시간만이 빽빽하게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페스트는 절망한 자들에게 더욱 좋은 가독성을 지닌, 약이 되는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주요 캐릭터는?
-알제리 오랑 시에 발발한 페스트, 그 재앙의 연대기를 쓰는 서술자
-주인공 의사 베르나르 리외, 페스트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진단하고 보건대를 이끈다. (나중에 리외가 서술자로 밝혀지기도 한다).
-휴머니스트 이방인, 장 타루, 자원 보건대의 조직을 제안하고 리외 함께 페스트와 싸운다.
-파리의 신문 기자, 레몽 랑베르. 페스트 창궐 초반에는 어떻게든 오랑을 떠나려 노력하지만, 오랑에 남아 페스트 보건대 활동을 자처한다. 공감의 힘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시청 말단 서기, 조제프 그랑. 역시 보건대 활동을 하며 홀로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스파이 혹은 범죄자, 코타르. 페스트로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지자, 오히려 사회의 소속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첫 번째 읽었을 때는 베르나르 리외, 장 타루가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페스트와 싸우는 신념 또는 직업적 소명에 대해서 끊임없이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소설의 주제를 설파한다. 함께 바닷가에 뛰어가 수영을 하며 우정을 나누는 감동의 클라이막스를 연출하고 끝내 페스트에 걸려 죽는 장타루의 슬픈 순교적 클라이막스까지 장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조제프 그랑이다. 그는 내게 시지프스와 같은 노동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조그만 삽을 든 노동자 시지프스. 50대인 그랑은 시청의 말단 서기로 20년 넘게 일하고 있는데, 진급도 없이 이상한 계약직 같은 신분이다. 원래는 그렇게 입사한 게 아니었지만, 조직 담당자와 내규가 바뀌면서 그는 어디에다 항의해야할지 모른 채 묵묵히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무력하고 억울한 삶을 살았다. 그는 어떻게 따질지를 몰랐다. 무슨 말로, 그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어떤 언어가 필요한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조제프 그랑이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69p
반복, 단조, 복종적 삶 속에서 조제프 그랑은 밤마다 자신의 언어를 찾으며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목적은 사랑 고백. 떠나간 아내에게 진심으로 돌아와 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이다. 그는 상투성이 가장 큰 특징으로 이뤄진 언어라는 제국과 싸운다. 펜 하나를 들고서, 매일 밤 똑 같은 문장을 10년 씩이나 쓰고 앉았다. 언어가 가진 상징성이 반복되고 고루해지면 상투적이 되고, 그곳엔 진실의 은신처는 없다. 포개서 조그맣게 접어진 단아한 진실. 오랫동안 작아진 빛나는 사랑을 담고 싶어서, 그것을 아름답게 숨기고 싶어서...
“5월의 어느 화창한 날에, 승마복을 입은 한 우아한 여인이 멋진 밤색 암말을 타고, 볼로뉴 숲 속의 꽃 핀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 148P
소설의 첫 구절로 보이는 이 문장이 바로 그랑이 그토록 오래 다듬고 있는 글이다. 접속사, 어조, 낱말들. 예를 들면 ‘화창한’이 맞이 않아서 ‘맑은’ 으로 고친다. 몇 주 후 다시 ‘화창하고 맑은’으로 고친다. 어느 날은 ‘우아한 여인’ 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름다운’으로 고치고, 계속 생각한다. 내가 고친 게 맞나?.
의사 리외와 그랑이 단둘이 있는 장면에서 그랑은 리외에게 자신이 쓴 부분을 은밀하게 높게 낭독해준다. 여전히 자신의 문장들이 완벽하지 않으며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안다고 변명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 바로 이 말이다. 우리를 깨운 것이. 카프카가 말한 책 도끼처럼 날아와 돌아누운 내 등을 찍은 것이.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랑을 하찮게 봤던 거 같다. 불이익을 당하고 항의도 제대로 못한 채 현실 안주한 중년 남자, 아내한테도 버림받고 혼자서 글 나부랭이나 쓰는 놈, 글쓰기도 약간 한심한 수준 같고. 우리는 그랑을 밑으로 내리깔고 닮아서는 안 되는 소설 속 캐릭터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장 하나로 그랑을 사랑하고 지지하게 된다. 이 말은 그랑의 내면 속 힘이 외면으로 일 각 드러난 그 순간이며, 우리가 그 보물같은 순간을 캐치했다는 기쁨도 더해졌다. 열등한 줄만 알았던 그랑이 훌륭하다라고 알게 된 반전의 순간 이랄까.
또한 그랑이 페스트의 진정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랑은 소설 후반에 페스트에 걸린다. 점점 커지는 겨드랑이의 고름들, 몸을 태우는 고열, 끊임없이 몰아닥치는 고통으로 그랑은 그동안 자신을 지탱했던 프레임이 무너져 내림을 인지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이 고통은 너무 오래가고 있어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쩔 수 없죠. 제가 겉으로는 침착해보이겠죠. 하지만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어요. 이제는 너무 힘드네요.” - 372P.
그랑은 의사 리외에게 자신이 썼던 50페이지 남짓의 글 뭉치를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랑의 많은 밤들을 삼킨 문장들. 모두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밤들의 낱말들. 단, 마지막 페이지에는 ‘나의 사랑스런 아내, 잔’이라 적혀 있다. 리외는 친구의 유언을 들어주듯 모두 태운다. 이렇게 독자들이 그의 죽음에 슬퍼할 차비를 하고 있을 때, 그랑은 살아난다. 약 1년간 기승을 부린 페스트가 영문도 알 수 없이 사그라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승 문까지 열었다가 다시 돌아온 그랑은 사뭇 명랑해졌다. “다시 시작할 거예요. 다 외우고 있거든요. 두고 보십시오"(375P) 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찌릿했다. ‘두고 보십시오’라는 말에.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요건으로 인물의 변화성을 들 수 있다. 이야기 플롯은 ‘주인공이 어떠한 시련을 만나 그것에 어떻게 맞서 어떻게 변화를 겪는가?’로 요약될 수 있다. 페스트의 인물들 중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인물을 선정한다면, 조제프 그랑이라고 생각한다. 의사 리외는 관찰자에 가깝고, 장 타루는 보건대를 자원해서 결성하며 사건을 이끌지만 본인에 대한 변화는 미미하다. 개인적으로 오딧세우스, 단테처럼 죽음까지 갔다와 살아 돌아온 캐릭터들은 고전적으로 강렬한 포스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카뮈 문학의 전문가 김화영씨가 쓴 글을 보니 페스트 캐릭터 중 가장 카뮈와 닮은 인물로 조제프 그랑을 꼽았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저항은 자기 언어로 쉼 없이 쓰는 것.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시간성을 초월해 표현하는 것. 상투성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 문장에서 받은 영감 또한 하나의 발견 같았다. 그랑이 ‘두고 보세요’ 라고 말하는 비장함. 그 심지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과 열망이 들어 있을까? 그랑은 자신이 글을 완성한 뒤 출판업자에게 가져가는 상황, 그곳에서 듣고 싶은 말까지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말이죠. 선생님.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는 날, 출판업자가 그것을 읽고 난 일어나서 사원들에게 ‘여러분, 모자를 벗어시오!’ 라고 말하는 겁니다” 145p.
이 작품은 완벽해야한다면서,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생생히 전달하는 그랑. ‘두고 보세요’하면서. 지금껏 “두고 봐” 라는 레토릭은 잘못 말하면 진짜 밉상이고 싫어하는 사람이 하면 완전 밉상이라 생각했다. 괜한 미움 사기 싫어서 인지 태어나 한 번도 하지 않은 말. 어쩌면 나의 꿈에 확신이 없어서, 노력하고 있지 않아서, 그만큼 열망하지 않아서 일지 모른다. 그렇다! 이제는 대놓고 이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이 바뀐다.
‘뭐하고 있는 거야. 그랑을 따라 우리도 자기만의 프로젝트에 페달을 밝지 그래. 우리도 그랑처럼 완벽한 출판의 꿈을 가지고 있잖아. 그랑처럼 언어를 사용하자!’
우리는 무엇을 쓸지를 몰라서 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쓰지 못한 이유 중 가장 그럴듯한 변명이고, 진짜 이유는 왜 써야하는지를 찾지 못해서에 가깝다. 글쓰기는 돈벌이의 논리가 아닌 다른 쪽 일이라서 강력한 내재적 의도가 필요하다. 외부의 보상 없이 내면에서의 순수한 의지가 받쳐 줘야한다. 우리는 그 의지를 그랑의 그 말에서 느꼈다. 이렇게 책 속의 영감들을 기억해서 실천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를.
우리들이 좋아하는 페이지들. 그 속의 언어들을 일으켜 세워 만들고 싶다.
작고 빛나는 메시지를 아름다운 모자 속에 숨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독서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이 준 선물을 나누고 싶다.
잘 하고 있다고 함께 느끼고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 까뮈가 가장 하고파 했던 말을 덧붙여
“ 페스트는 마치 추상적인 관념처럼 단조로운 것이었다 – 129p. ”
페스트에서 추상성은 우리의 살이 있는 감정과 연민의 불을 꺼트리는 나쁜 모래더미 같은 것이다. 슬픔, 고통, 불행이 추상화 될 때, 그것은 상투적인 신문 기사처럼 매마르고 흔한 사실이 된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없다. 느낄 수가 없어서, 편하다. 어느 정도 무뎌져서 잔인해질 수도 있고 제로썸 게임인 세상에서 착한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고.... 하지만, 카뮈는 그 전에 우리는 페스트로 이미 죽을 거라 경고한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나쁜 전염병 페스트는 이미 내장되어 언제든지 발병할 수 있다고 말이다. 사랑 없이, 공감 없이, 함께 슬퍼함 없이 사는 건, 진짜 죽음이니까 말이다.
희망 없이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 41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