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의 조언 ‘욕망 자체를 설계하는 힘’
알록달록 마치 색상환처럼 빛나는 넓은 주름치마. 이것이 엄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우리는 화곡동 시장 근처에 살았는데, 엄마는 가끔씩 장난감 가게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볼래? 하나 사줄게!”
이 기쁜 제안에 아이는 혼란에 빠지곤 했다. 하나를 고르기엔 다른 것도 눈에 들어왔고, 두 개 사 달라고 떼쓰기엔 피차 피곤한 일이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만약 영특한 아이였다면 제일 비싼 걸 골랐겠지만, 아이는 많이 가지고 싶은 큰 욕망이 별로 없는 타입이다.
우물쭈물, 아이의 선택 시간이 길어지면 엄마는 가장 화려해 보이는 걸로 하나 집어주고 계산을 마치곤 했다. 하지만, 그 날, 엄마의 그 폭넓은 치마가 행차한 그 날은 달랐다. ‘원하는 거 없음 관둬라’ 하며 획~ 돌아 나오려는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엄마의 치마를 잡았다. 치마는 눈앞에서 공작새처럼 펴졌다. 영화 속에서 여자 주인공이 첫 등장할 때 들리는 묘한 효과음처럼, 슬로비디오처럼, 아이는 그 장면을 기억한다. 그 아름다운 치마의 펼침 속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모두 다 가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강렬한 욕망은 어떤 자극이나 낯선 영감을 통해 촉발되는 에너지였다. 평소에 가진 욕망의 크기는 작은 건전지 AA 수준이지만,
욕망이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이다. 철학적으로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욕망이란 ‘결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 정의하였고, 그 후 많은 후세 철학자들, 경험철학의 로크, 관념주의 데카르트 등 에게 영향을 끼쳤다. 욕망이론으로 이름을 알린 정신분석학자 라캉 또한 인간의 욕망은 ‘타자(Atre)에 대한,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였다. 즉, 타자를 욕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도 모두 포함한다. 반면, 니체는 욕망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는 의욕(wollen)을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창조적 에너지라 여겼다.
‘의욕은 해방시킨다. 의욕은 자신 자신의 비애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감옥을 비웃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청하, 최승자역, 182P)
원래 철학은 굉장히 추상적인 입장의 논의라서 내가 궁금해 하는 수준인, 왜 어떤 사람은 적은 욕망, 의욕을 타고 나는지에 대한 세부적 이야기는 철학적 관점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럼 서점으로 눈을 돌려 자기계발 코너로 가보자. 자기안의 거대한 욕망을 깨우라는 메시지들, 의욕을 불태워 지속적으로 강한 의지력으로 성취하는 방법들을 주장하는 책들로 즐비하다. 자신 내면의 힘을 극대화시켜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이 경쟁하듯 책 속에서 웃고 있는 거 같다. 반면, 욕망의 덧없음을 강조하며, 허황된 욕망들은 제어되고 절제되어야한다는 시각도 있다. 비대해진 욕망은 행복을 좀 먹는 말썽쟁이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인간은 누구나 본디 위대한 잠재력과 강한 욕망을 타고 났다고 전제하고 있지, 나처럼 작고 미비한 욕망을 탑재한 경우도 있다고 좀처럼 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확실히 가지고, 강렬한 욕망을 드려내고 있는 건 아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뭘 해야 할 지 잘 몰라 선택의 어려움을 느끼며, 이것저것에 호기심을 부리고 기웃대고 헤매는 부류의 친구들인데 말이다. (나는 후자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많은 경험을 하니까)
예를 들어, 그 폭넓은 치마를 입은 엄마는 15년 쯤 뒤 아이를 대학에 진학시키면서도 ‘마음에 드는 전공을 골라봐’ 라고 말한다. 아이는 또 우물쭈물, 자신이 뭘 공부하고 싶은지 모른다. 엄마는 적당한 성적에 맞춰 아이가 되었으면 좋을 직업을 꿈꾸며 ‘법학과’을 선택해줬다. 아이는 그 딱딱하고 네모난 법전의 모양에 도통 맞출 수가 없었다. 엄마의 선택으로 4년이 성실하게 갔고, 아이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음이 한탄스러웠다.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른다. 내가 그때 진짜 무엇을 원했어야 맞는지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혹은 하고 싶은 게 너무 여러 가지여서 뭘 우선순위로 해야 할 지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내부의 진짜 욕망을 찾지 못해서 일까? 도대체 나한텐 태어날 적부터 없었던 거 같은데, 성공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욕망, 의욕, 의지는 어디서 찾아야할까?
이 질문은 오랜 기간 지속된 것이었는데, 어느 초봄, 636p의 두꺼운 책을 거의 다 읽고 있을 때, 화들짝 깨닫게 되었다. ‘나의 그 질문 자체가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책은 바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이다.
사피엔스는 알다시피 굉장한 책이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혁명이란 심플하고 명확한 전개로 인류사를 꿰뚫었다. 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새로운 욕구와 욕망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사를 욕망의 진화로 보고, 그 결과 인류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여러 차례 잃었으며, 이대로 가다간 멸망으로 향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진화는 자연선택되어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다. 자연선택설은 강하고 우수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양육강식’으로 오해되었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가장 훌륭한 개체들이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가장 생존하기에 유리한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이 생존하여 자손을 남기는 시스템이다. 이는 다윈이 자연선택을 ‘수정된 상속(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 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수정된 내용들이 바로 인류의 진화적 사실인데, 그 방향이 모두에게 행복한 쪽이 아니라, 점점 소수만이 행복한 방식으로 전체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며 급속도로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저자가 책 끝부분에 제안한 짧은 글귀가 있다. 이것이 바로 내 허벅지를 치게 했던, 나의 욕망에 관한 생각을 전환시킨 페이지다.
"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p586, 사피엔스, 김영사, 조현욱 역)
" The only thing we can try to do is to influence the direction scientists are taking. But since we might soon be able to engineer our desire too, the real question facing us is not ‘What do we want to became?’, but ‘What do we want to want?’ Those who are not spooked by this question probably haven’t given it enough thought. (Sapiens, Random House. 464P) "
물론 이 페이지는 매크로적인 관점에서 인류 전체의 욕망에 대한 코멘트이다. 저자는 우리가 되고 싶은 존재는 바로 신이라고 가정한다. 불멸을 꿈꾸는 길가메시처럼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신이 된다손 쳐도 만족할 줄 모르는, 더욱이 책임감도 없는 신이라는 것이 문제다. 이제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을 원하고 싶은 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한다고 전환시킨다. 욕망을 통째로 어떻게 욕망할 것인지를 생각하랜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본래 주어진 틀 속에 가두지 않는다. 태초부터 타고난 근원적 욕망의 속성을 해방시키고, 욕망 자체를 창조의 대상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렇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바대로, 이제 우리 인간은 본능이라고 믿는 욕망에 갇혀, 살던 대로 살 때가 아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싶은지? 메타적으로 욕망에 대한 욕망의 기원을 만들 때 같다. 우리는 책임감 있고 모두가 행복한 쪽의 선택을 해야하는 욕망을 만들 기회를 가져야한다는 뜻이다.
인류를 향해 ‘욕망을 다시 설계하라’ 라는 제안을 나는 아이처럼 개인의 이야기로 적용하며 읽었다. 인류 문제도 중요하지만 제 손 밑의 가시가 더 거슬리는 법이니까.
그동안 나의 질문은 본래 욕망이 실존적으로 우리들에게 던져진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왜 그것을 발견 혹은 계발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남들보다 적은가? 왜 가끔 의욕이 바닥나 죽음과 같은 지경에 이를까? 왜 유독 욕망이 불타오르는 분야가 없을까? 왜 나는 고만고만한 행복을 원하고 거기에 만족할까?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축적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어린시절 화곡동 시장에서 엄마의 총천연색 치마가 펼쳐진 순간 울려 퍼졌던 음악,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듯한 그 영롱한 소리들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충만하고 차오른 욕망의 한 컷. 그것이 나의 순수한 욕망의 원형이고,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복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문득문득 진짜 우리 엄마가 그렇게 총천연색 치마를 입었을까? 하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왜 나는 필사적으로 치마를 붙잡고 늘어져 원하는 장난감을 얻지 못했는가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양보하고 미끄러지면서 나는 원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What do we want to want?) , 이 글귀는 나의 오래된 자책성 질문들을 해체시켰다. 나는 이제 다르게 질문하기로 했다. ‘왜 나는 주어진 욕망이 미비할까?’ 가 아니라, ‘그래서 나는 무슨 욕망을 만들고 싶은가?’ 이다. 이미 낡고 닳아 없어졌으면, 새로 만들어라. 원하는 게 필요한테 지금 없으면 다시 만들어라. 라는 말처럼 쉽고 편리하게까지 들린다.
다시 그녀가 나에게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볼래? 하나 사줄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엄마 치마 같은 치마를 사 주세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중에, 기존 질문에서 벗어나 본인이 하고 싶은 말로 응수하는 방법이 있듯이, 욕망도 새롭게 지금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고 설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욕망은 과거에 누군가가 숨겨놓은 보물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욕망하고 싶은 것을,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중심에 있다.
무슨 말 장난 같지만, 스스로 선택 불능의 상태가 되어 고뇌가 빠져 본 사람이면 이 사고의 전환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약간 유치할 것 같아 말 안하려다) 덧붙이는 말,
‘What do we want to want?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이 질문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탄조의 질문보다는 미래지향적이며 건설적이다. 나는 실마리를 나의 장점들에서 찾았다.
부끄럽지만, 나의 경우를 예를 들면, 나는 대학시절 딱딱 법전에 짓눌려 공부하는 재미를 못느낀 것이 한이 되었는지, 지금 박사과정에 도전 중이다. 학과를 새로 선택할 때,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욕망해왔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닌, 무엇을 욕망하길 원하나? 나의 장점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보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태도로 고민해서 결정했다. 이 선택에 나는 스스로 만족하며, 꿈꾸고 실천하고 변화하고 성장하려 애쓰고 있다.
솔직히 우리는 자신의 단점을 매몰되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되면, 하고자하는 욕망, 니체식으로 말하면 창조적 해방,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반면,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단점이 아닌, 장점만 주구장창 많이 최대한 오래동안 생각해보라. 원하고 싶은 것들이 마구 떠오를 것이다. 새롭게 엔지니어링되는, 욕망의 새싹들이 고개를 들 것이다. 좀 심한 나르시스트가 되도 좋다. 자신 자신을 한껏 띄워준 뒤 자신의 잠재력, 능력을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의욕적이 되니까 말이다. 스스로를 우쭈쭈 하는 시간이 진짜 필요하다. 특히 나처럼 평소에 의욕이 적은 사람에게는...!
아마 철학책 좀 읽은 분들은 요 때 생각나는 철학자가 있을 것이다. 바로,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
알다시피, 철학의 시작은 ‘너 자신을 알라?’ 이다. 하지만, 난 이 말이 유쾌하지 않다. 반성해! 라는 말과 흡사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은 상대가 얼마나 무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계속 질문으로 몰고 가서, 상대방이 대답을 못하는 막다른 순간, 아포리아(aporia,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의 국면) 에 빠지게 함으로써, 자신의 과오를 인정, 반성하게 하는 화법을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말 인기가 없는 선생으로 최고봉이 아니었던가!
아마 소크라테스는 지적 할 것이다. 너 자신의 장점만 보는 멍청한 짓을 그만 두고, 너의 단점도 깨닫고 반성하며, 너 자신부터 알라고! 하지만, 나는 소크라테스에게 나름의 논리로 설득할 것이다.
나 : 소크라테스님 모든 발명품은 본래의 용도가 있지요?
그것을 그 물건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 그렇지.
나 : 보통의 경우, 그 발명품의 용도는 발명품의 장점에서 나오나요? 단점에서 나오나요?
소크라테스: 장점이지.
나 : 그 발명품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어서, 자신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면,
자신의 장점부터 생각해야할까요? 단점부터 생각해야할까요?
소크라테스: 장점이지.
나 : 그 발명품이 자신을 용도와 목적을 알고 난 뒤, 자신의 단점을 깨닫고 보완해가면 더욱 좋겠죠?
소크라테스: 그렇지
나 : 그렇다면, 우리들이 무엇을 원하고 싶은지, 그 욕망의 설계에 대해서 고민할 때
장점을 생각하는 게 먼저일까요? 단점이 먼저일까요?
소크라테스: 장점이지!
야호! 소크라테스를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