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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Cumi Apr 17. 2020

관계의 덫, 없음

'독수리'의 고립 or '섬에 있는 서점' 의  열쇠

언젠가 쓴 메모를 요 며칠 전에 발견한다.


“ 호불호가 강한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고급 취향이 아니라, 맥주 맛도 잘 모르는 듯, 그 참 맛을 모르는 듯. 또 다른 불감증이다. 

호불호가 강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샘을 낸다. 질투를 한다. ”


5년 전  2월 27일의 불만 가득한 글씨.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눈을 감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본다.

아마... 그럴 수도... 그럴 껄... 그랬을 거야. 

어렴풋함에서 시작한 장면은 시방 한 사람을 기억해낸다.

그녀 때문에 이 걸 썼던 거야.  음. 냐.  그녀는 지금쯤 뭘 할까? 


이상하게 그녀의 좋고 싫음은 내게 거슬리는 언사였다. 그 외에도 껄끄러운 게 많았지만 글로 남기기 싫은 수준이다. 그 당시 우리는 같은 모임에서 만나는 사이라서 내가 그녀와 멀리하고 싶으면 모임 전체를 잃게 된다. 이러한 역학 때문에 한동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아. 증말 . 인간관계는 딜레마의 연속이다. 

나는 왜 모든 사람을 품지 못할까, 라는 도덕군자적 성찰은 이 딜레마를 푸는 실마리가 못된다. 모두 다 사랑하리 정신으로 타인들에게 맞춰 주다보면, 타인은 ‘지옥’으로 변한다. 


(이미 사르트르가 ‘닫힌 방’이란 희곡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걸 몰랐을 때부터 타인은 지옥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타인은 나를 쳐다보고 있고, 나는 그 시선에 갇혀 나로서! 나답게~ 내 꼴로 ㅜ 존재하지 못한다. 상대에게 맞춰 주다보면 난 늘어지고 헐거워져 늘어난 싸구려 팬티 고무줄처럼 후져진다. 그렇게 사는 게 지옥이 아니고 뭐겠는가?!) 


근데 아는가? ( You know... )

지옥에서 읽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시집이라는 거...


잔인하기 위해

말을 안 하기로 했다.

소통은 정신을 죽인다.


성대가 없는 독수리 한 마리.

눈 다시 밝히고 겨울을 휘돌지만

사방의 추위에 얼어가는 하늘


완강한 체념의 흉터 자국을.

소리 없는 살생의 비명을

벼랑 끝에서 토해낸다.


수만 개의 바람이 얼굴을 치고 가고

유배된 곳에 성근 집을 튼다.


씹어 삼킨 성대의 물비린내.

긴 햇수에 전 냄새가 역겹다.

벌써 찢어지는 바람의 겉장, 둘째 장. 


언어의 연한 껍질을 버리기로 한다.

네가 주는 성대를 목에 넣으면

해어진 숨결을 만날 수 있을까.


소리 내지 않고 살아낸

독수리의 빈 가슴 쪽으로

멍에를 도저히 버리지 못한

바람의 셋째 장, 그리고 넷째 장......


 - 마종기의 ‘독수리’ 전문 (문학과 지성 시인선 376 ‘하늘의 맨살’  16, 17P)


나는 사람이 싫을 때마다 잔인하기 위해 말을 안 하기로 했다소통은 정신을 죽인다.” 이 시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말없이 잔인해진다. 내 주변에 해자를 둘러치고, ‘closed’ 팻말을 입는다. 그리고 고독 속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숨는다고 표현할지 모르지만, 이건 비폭력적 공격이다. 관계의 덫을 이빨로 끊고서 침묵하는 뚝심. 그렇게 바람의 다섯째 장, 여섯째 장, 일곱째 장.... 이 벗겨질 때, 고립은 문을 열고 나간다. 


때론 극단적인 처사가 더할 수 없이 나이스 샷이다. 

중간이 되면, 덧없어진다. 

open or closed. 둘 중 하나다. 때론 열던지, 닫던지. 

일관성 따위를 포기하면,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일관성이라니?! 

어차피 우리는 한명으로 살긴 틀렸다. 현실세계에서, 혹은 사이버 세상에서, 이미 수많은 자아가 분양되었고 우린 자기 주소도 모른 채 여러 집에서 기거 중 아닌가? 


문제는 들어갈 방들이 많은 탓에 고립이 고립을 낳을 때, 자꾸만 방 속 방 속 방 구석을 파고들 때가 있다는 것이다. 고립이 문을 열고 나가도 밖이 아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듯.


그럴 때 펼치고 싶은 페이지를 소개한다. 

내가 미국에 산다면 펜클럽 만들고 싶은 작가, 개브리얼 제빈(Gabrielle Zevin)의 소설책 ‘섬에 있는 서점(The Storied Life of A. J. Fikry)’ 의 명문장!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은밀한 두려움이 우리를 고립시킨다. 하지만 고립이야말로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다. 언젠가. 언제일지 모르는 어느 날, 당신은 차를 몰고 길을 가리라. 그리고 언젠가. 언제일지 모르는 어느 날. 그가 혹은 그녀가 거기에 있으리라. 당신은 사랑받을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결코 혼자가 아니기에. 혼자가 아니기를 선택했기에.”  ( 196P , 섬에 있는 서점, 루페, 엄일녀 옮김) 


“It is the secret fear that we are unlovable that isolates us,” the passage goes, ‘but it is only because we are isolated that we think we are unlovable. Someday, you do not know when, you will be driving down a road. And someday, you do not know when, he, or indeed she, will be there. You will be loved because for the first time in you life, you will truly not be alone. You will have chosen to not be alone.” ( 157P , The Storied Life of A. J. Fikry )


이 페이지는 소설의 중요 장면이다. 남주 ‘에이제이’와 여주 ‘어밀리아’의 결혼식 날, ‘늦게 핀 꽃’이란 책(원래 있는 책이 아닌, 극중에서 소재가 된 책)에서 발췌한 이 글귀가 낭독된다. 에이제이는 아내를 잃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섬에 있는 서점 주인, 어밀리아는 활발 쾌활긍정적 성격의 출판사 직원이다. 어느 날 서점에 25개월 된 아이 ‘마야’가 버려지고, 졸지에 남의 아이를 키우는 홀아비가 된 에이제이는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 어려운 육아에 대해 쉽게 알려주고 뭐든 도와주려 왔다가 책도 많이 사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생색내지 않는 깊이까지. 게다가 그녀의 사랑까지! 소설 전반에서 풍기는 사람 냄새, 공동체문화는 도시인에게는 낯설고 정겨운 풍경이다. 반면, 이 소설에는 미혼모, 자살, 불륜, 차사고, 도난사건 등 탐정 추리소설의 플롯도 갖추고 있다. 이 혼합 구성에서 흐르는 선율은 역시나 사랑이다. 


 이 196페이지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한정되어 읽힐 수도 있지만, 고립의 문을 열게 하는 마법적 요소가 있다. 고립이란 녀석의 폐부를 찌르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고립의 원인 중에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유일한 원인은 고립이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고립이 아픔, 상처, 두려움 등으로 인한 결과적 사건이라 치부해왔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난 뒤 난 완전 고립된 거지’. 

허나 그런 흐름보다는 고립 자체가 두려움의 절대적인 원인이라는 거, 그 인과관계가 더 강력하다는 거다. ‘문을 잠그고 있으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지’ 

원인이 아픔, 상처, 두려움이면 우리는 제거할 방법이 막막하고 어렵지만, 원인이 고립이라면 제거할 방법이 바로 떠오른다. 문을 박차고 다시 나가보는 것이다. 


상상해보라. 누군가 이 글귀를 읽은 뒤, 그간 무겁게 드리웠던 닻을 들어 올리고  밧줄을 풀고 자신의 배를 출정하는 모습을. 하얗고 푸른 돛을 펼치고, 바다로 나아가는 바람을. 

매일매일 실패해도 내일 성공하는 것이 인생이니까, 일단 나가보는 거지. 

다시 시작. ‘We’re open‘. 

전보를 친다. 나 여기 있다고. 


우리가 고립을 통해 성장한다면, 소통을 통해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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