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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Cumi Sep 07. 2020

부자가 꿈? 가슴이 답답하다

자꾸 생각나는 책, 주르주 페렉의 <사물들> 

1. 부자가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 

2. 그런 사람은 너무 속물적이라고 불편해하지만, 본인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는 사람

3. 이미 충분히 부자라서 일반인들을 불쌍히 간혹 업신여기며 강렬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4.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인가?

3, 4 번이라면 당신은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1, 2번은 자신이 가진 것과 원하는 것과의 격차로 말미암아 속이 시끄러울 것이다. 소유와 욕망의 불균형은 이들의 행복을 위협할 것이다. 그중에 2번이 좀 더 복잡할 것이다. 그들은 ‘부자’ 이외에 다른 무엇도 되고 싶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돈이 만병통치약처럼 잘 듣는 사람은 오히려 단순해서 건강할지도 모른다. 소독약처럼 강한 돈의 집착이 인생길에서 겪는 희로애락의 끈끈한 향기를 모두 멸균 처리시킬 수도 있다. 


여자1은 샤넬백을 사기위해 거의 1년 간 블로거들의 구매 스토리를 읽고, 현명한 소비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실버와 골드 중 어떤 것이 자신의 피부톤과 어울리는지를 알기위해 유명 컬러리스트를 찾아가 컬러 테스트를 받았다. 그녀의 평소 옷차림은 대부분 캐주얼이기 때문에 샤넬 빈티지 라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것이 더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중고로 팔았을 때 고가로 거래될 것인지를 타진해기 위해, 명품 중고 사이트를 오래도록 관찰했다. 가끔 답답할 땐 소공동 롯데 백화점 매장으로 달려가, 중국인 관광객 코스프레 했다. 짧은 중국어를 구사하며, 백을 거칠게 만져도 보고 매보기도 했다. 드디어 그녀는 몇 달간 모든 돈으로 샤넬백의 주인이 된다. 살 때의 기쁨은 최고조 였다고 말했다. 그 이후 백을 맬 때면 그 만족도는 하강 곡선을 그렸을 것이다. 생각보다 ‘밋밋한 맛’이랄까. 


하지만, 그런 표시를 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구매 과정을 환상적으로 요목조목 기록하여 블로그에 올렸더니, 조회수가 엄청났다. 이것이 가진 자의 행복인가? 


그 후 여자1은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자신이 샤넬백을 산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이나 되는 양, 길고 긴 서사시처럼 이야기한다. 여자1은 모두가 샤넬백을 탐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 상대방이 누구이든, 자신의 어떤 진실된 이야기보다 그 통속적 스토리가 더욱 나눌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 모두가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성토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게 마이크를 넘기지 않고, 오직 샤넬 백 주인공이 된 스토리에 목을 매고 있었다. ‘매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그녀는 소유와 욕망이 오랜 준비 끝에 합일점에 오른 그 순간만을 추억하고 싶은 것이다. 또 사야할 사물들을 출사표처럼 말하면서... 


이 얘길 듣고 있었던 여자2는 이 친구를 계속 만나야할까를 고민했다. 너무 세속적이고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요즘 좀 힘들다고 생각할 때였다. 즉, 사고싶어. 먹고싶어. 가고싶어. 샀잖아. 먹었잖아. 갔었잖아. 좋더라. 간 김에 그것도 샀어야했는데, 담에는 이것도 사와야지. 그럼 얼마가 필요할까. 돈 돈 돈이 문제다! 등등의 대화가 지겨울 때였다. 여자2는 요가를 단순히 운동이 아닌, 철학으로서 존중하며 수행 중이었다. 하지만, 2번 유형으로, 부자가 되고 욕망은 오래된 파편 같아서 몇 개월간의 요가 수행으로 제거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드러낼 수 없는 갈망이 속에서 아프게 했다.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 깊이까지의 집착은 자신의 마음을 점점 복잡하게 만들었다. 깨진 유리 속에서 여러 자아들이 일렁이는 듯, 일그러진 내면은 세상과 부딪히며 계속 까끌 거렸다. 가끔은 여자1처럼 단순한 속물이 맘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돌은 뒹구는 돌이었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법.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살아감에 있어서,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시간이 모호하게 흐른 뒤, 한국 사회는 갭투자 열풍에 1,2 번 유형들은 싱숭생숭해진다. 주변 사람 중 몇 명은 부자의 반열에 들었을 수도 있다. 혹은 벌어들일 예상치를 거론하며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대놓고 부자가 되고픈 욕망덩어리 1번 유형이 갭투자로 수익을 냈다면, 2번 유형은 보여 지는 양심이 숨어있는 욕망을 제어하여 투자를 실천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1번 유형은 그동안의 명품 소유를 위해 종자돈 모을 여력이 없어 부동산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면, 2번 유형은 그동안 자잘한 것들을 참아온 욕망을 큰 건에 쏟아 부었을 수도 있다.  


갭투자는 불법적이진 않지만 편법적인 방법이며, ‘현명한 투자’ 라기 보다 ‘부도덕한 투기’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주택 매매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란 전제 하에서 벌어지는 방식이므로, 집값이 하락하여 갭투자가 실패하면, 전세금 미상환 대란이 우려되며 그것은 고스란히 세입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 하지만, 갭투자가 성공(?) 했을 때도 문제다. 이 사회에서 사람은 ‘주택소유 유무, 주택소유 개수’ 등의 기준에 따라 삶의 질이 규정되고, 부자와 빈자 계층의 격차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집 없는 설움과 고통은 깊어지며, ‘집’은 더 이상 안락함의 기호가 아닌,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말로 전락한다.


더욱 피부로 와 닿는 문제는 여자1, 2와 같은 보통 시민들의 의식이다. 갭투자가 부도덕함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것에 뛰어들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식당 옆 테이블에서 몇 명의 수다를 엿들었다. 


“걔는 갭투자로 20억을 벌었대” “진짜? 나랑 친한데... 나도 좀 알려주지” “(손뼉치며) 나도 할 껄. 내가 겁이 많아서. 그 때 시작할 돈도 있었는데” “난 그런 거에 잼병이잖아. 그럼 좀 남편이라도 좀 해주지” “맞아맞아. 남편은 도움이 안돼”  “하하하하” “암튼 했어야 해!” 


솔직히, 듣는 나 또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상황과 딱 어울리는 책 한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 자본주의적 욕망을 그린 사실주의 소설 <사물들>이다. 


2013년 독서 노트 중에서

이 책이 나를 자꾸 따라다닌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가 있다. 곱슬 머리의 조르주 페렉 얼굴 사진이 크게 담긴 <사물들, 세계사, 1996년 출간 >이 오랫동안 내 책장에 꽂혀있었는데, 어느덧 사라졌다가, 2013년, 이 책이 읽고 싶어져, 펭귄 클래식에서 나온 판본으로 구매했다. 감명 깊게 읽고 서평도 쓰고, 메모도 하고, 마인드맵까지 정리해두었다. 그러나 또 잊혀졌다. 


그리고 2020년, 내가 진행하는 책토크쇼 <책잡히는 라디오 ‘독감’>의 출연자가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출연자는 온라인으로 진행된 대학원 수업에서 친해진 단 한명의 인연이었다. 그녀도 역시 책을 좋아하는 결의 사람이었고, 나는 책추천을 받았다. <사물들>이었다. 



그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막연히 부자가 되길 희망하며 자유롭게 사는 1960년대 프랑스 젊은 커플의 이야기이다. 그저 그런 집안과 학벌의 ‘제롬’와 ‘실비’는 사회 심리조사원이 되면서 사회에 물든다. 그 당시 사회 심리조사원은 광고계에서 뜨고 있는 신종직업이었다. 그들은 프리랜서였고, 일을 하면 할수록 돈을 벌어들였다. 체스터필드 소파를 사고, ‘엑스프레스’ 잡지를 읽고, 두툼한 목욕가운을 입고서, 와인과 영화를 즐겼다. 

허나, 그들은 임시직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안정된 위치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은 피할 수 없었다. 알제리독립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을 때, 오히려 그 불안감을 줄어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도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튀니지로 건너가 학교 선생님이 된다. 제롬은 소피와 떨어져 있기 싫어 직장을 포기하고 기꺼이 여자가 벌어다준 돈으로 도서관 생활을 영위한다. 그들에겐 어떤 희망, 미래가 있을까? 조르주 페렉은 희망적인 에필로그를 쓰며 끝을 맺는다.

두 가지 결말이 있다. 제롬은 번듯한 직장을 얻게 되고, 커플은 튀니지에서 안정된 삶을 얻을 것이다.

혹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예전에 알았던 인맥으로 광고회사의 정규직이 될 것이다. 보르도 지방에 있는 지사의 책임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일등칸을 타고 떠날 것이다. 호화스런 식당 칸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고, 그 맛은 ‘생각보다 밋밋할 것이다.’ 


한 책을 여러 명이 읽고 이야기하다보면, 같은 페이지에서 공감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때가 있다. <사물들>의 경우는, 디제이 두 명과 특별 게스트 한명, 이렇게 세 명 모두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며 체크한 페이지가 있었는데, 바로 63p 이었다.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 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63p. <사물들>, 조르주 페렉, 김명숙 역, 펭귄클래식,)


부자 될 가능성이 열린 자본주의라지만, 쉽게 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나의 무능력을 탓하면 초라해지고, 불평등한 사회를 탓하면 억울해진다. 제롬과 실비처럼, 자신이 원하는 일과 자유를 모두 만끽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은 이들은 이 사회에서 자리 잡기 어렵다. 꿈은 산산이 깨지고 이들은 불만덩어리로 변하기 십상이다. 


 나를 포함해 10년 넘게 비정규직 업무로 연명해온 프리랜서들에게는 숱하게 고민해 이미 각설탕처럼 딱딱해진 생각이 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정년은 누가 정하는 걸까?” “안정된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 길은 이미 막힌 지 오래일까” 돈과 직업, 미래를 생각하며, ‘덫에 걸린 쥐처럼 사방이 막힌 듯하다’(61p) 


하지만 우리는 조직의 정기적 부속품이 아니며, 유니크한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일자리를 갈구하는 ‘취준생’의 다급함이 아닌, 분방한 ‘예술가’의 영혼을 가지길 희망한다. 조직과 연결된 목줄 없는 삶, 매이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기에... 

하지만, 그것도 지친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략)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맞서 싸우고 정복하고 싶었다. 싸워서 그들의 행복을 쟁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싸울 것인가? ...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낯설고 화려했다. 자본주의 문화로 반짝이는 세계, 풍요로움이 감옥 처럼 둘러싸고, 행복이라는 매력적인 덫이 놓인 세계였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79p)


우리가 사회에 순응함으로써,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부스러기’이든 ‘왕건이’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더 큰 부스러기를 가질 것이고, 나는 재수 없게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과 두려움이 들기 때문이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의 원천에 대해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보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지는가? 물질적인 소유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그래프를 보면, 상승곡선이 아닌, 종 모양에 그친다. 즉, 소유로 향하는 기대치로 상승하다가 소유가 성취되면, 만족곡선은 급감하게 된다. 저가품이든 고가품이든 샀을 때 반짝하는 환희가 왔다 갈뿐이며, 오히려 그 낙차가 고가품인 경우가 더 클 뿐이다. 소유의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기란 어렵다. 


그렇게 허무하게, 구멍 숭숭 뚫린 욕망의 그릇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알랭드 보통은 조르주 페렉과 달리 약간의 해결책도 귀뜸을 해준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불안을 물리치기란 불가능하지만, 자신에게 불안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이것의 시작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부터이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부자가 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하면 불안의 늪으로 더욱 빠지는 길이다. 우리는 다른 길로 접어들어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또한 다양한 사람들을 인정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둘 수 있다는 거다.  


조르주 페렉은 알랭드 보통처럼 살아갈 방법에 대한 팁 따위는 주지 않았지만, 더 커다란 것을 내게 안겨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  한권의 얇은 소설책 (139페이지)을 읽고, 세 여자는 라디오 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나누었고, 그 중 한 여자는 이토록 길고 긴 독서 감상문을 쓰고 있지 않은가? 


짧은 독서 그리고 긴 사유 ....


근데,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우리는 쉽게 ‘이게 다 돈 때문이야' 라며 친구들한테 칭얼댄다. 또한,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여행하고 싶은 곳 등의 욕망을 분출한다. 모두 다 소비하는 거에 관해 말하길 좋아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소비자 말고, 다른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떠들어 대는 것은 친구들과 캐주얼한 토크를 하고 싶어서, 공감 받고 싶어서 아닌가? 함께 속물적이면, 부끄럽거나 외롭지 않으니까 말이다. 


알다시피, 우리의 욕망은 물질적 풍요만을 원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을 누리고 싶은 것뿐일 지도 모른다. 혹은 불안이라도 함께 나눌 친구와 사회를 원하는 것. 두려움과 찌질함과 부끄러움, 오만과 허풍과 기쁨을 나눌 친구들 말이다. 


하나의 실마리가 명확하게 잡힌다. 제롬과 실비가 다시 파리에 돌아왔을 때, 그들을 반기는 이는, 친구들뿐 이었다. 앞으로도 그들의 삶을 밝히는 것은 우정일 것이다. 사물들은 하나의 수단일 뿐,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들이 모인 따뜻한 사회를 원한다. 우리가 확실하게 원하는 것은, 좋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자가 되기보다, 좋은 친구가 되길 더욱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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