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모든 게 두려웠다.
밤새 고민하며 잠을 설치다가 아침 해가 불그스름하게 비치는걸 보고서야 잠깐 잠이 들었다. 침대에서 이불 하나 걷어내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져 하루 온종일 침대와 일체형이 되어있기로 했다. 아니, 내 의지가 아니고 침대의 의지였다고 치자.
그때 나는 스물여덟인지 스물아홉인지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던,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와 대학 동기들은 한창 멋지게 일하며 꽃단장을 하고 소개팅을 줄줄이 하면서 싸이월드에 남자 친구와 연애스토리들을 올리기 바쁜 때였다.
한국이 아닌 외국 땅, 직항기는 커녕 1번만 스탑 오버하는 항공편도 많지 않아서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 이상은 더 걸려야만 도착하는 중남미 '코스타리카'라는 땅에 서 있었다. 안 그래도 여름이면 새까맣게 잘 타는 내 피부는 화장기라곤 하나 없는 민낯에 햇볕을 200%는 흡수해 버린 듯 남미 여성만큼이나 까무잡잡한 피부였다. 긴 머리는 관리가 잘 안 되니 돌돌돌돌 말아 올리거나 아프리칸 친구가 소개한 작은 헤어숍에서 땋아둔 레게머리로 질끈 묶은 상태였다.
"내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건가.?"
처음에 낯선 땅에 도착해서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라고 부르는 그 '에스파뇰'로 하숙집 아주머니랑 손짓 발짓하며 몸을 적응해나가기 바빴고, 학교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의 반 이상은 미국 학생들이거나 개도국 출신의 동기들은 모두 모국에서 교수 출신 내지는 제 분야의 specialist들이라 하니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기도 바빴고, 모국어가 아닌 7cm 이상의 두꺼운 전공서적들을 이해하기는커녕 읽어재끼기만도 바빴고, 한국의 장마에 나름 익숙해져 있다 생각했는데 처음 맞이한 현지 우기철의 열대성 스콜은 마치 하늘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듯이 지독스러워 온 몸으로 적응하기 바빴다.
그렇게 저렇게 몇 개월 적응하기 바쁜 시간들을 지나 보내고 나니 그때부턴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문득문득 급습해 이게 외로움인지 뭔지 모를 무기력증으로 바뀌는 듯 느껴졌다.
내 첫 석사 유학을 떠올리면 저런 감정들이다.
결국 10여 년이 지난 지금 되돌려 생각해보면 그때 밤새가며 연구하고 공부하고 머릿속에 채워 넣으려 발버둥 쳤던 '지식'이라 불리는 것들은 흔적조차 없다. 어디 갔니. 다만 그때 느꼈던 두려움, 불안함, 초조함,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수십 번 다짐했던 마음들, 조급 해지는 마음이 닥칠 때마다 뛰었던 코스타리카 씨우다꼴론의 시골마을 구석구석, 그 흙냄새들, 잡생각으로 가득 차 잠을 설칠 때면 새벽 일찍 나가 오르던 등산길, 자기 전마다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던 시간들, 처절하게 싸워내야 했던 외로움, 가슴을 콕콕 찌르던 찬양의 가사들, 제때 걸어가지 못하고 매번 한 템포씩 뒤쳐지고 늦어지는 듯한 초조함, 부모님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 같은 미안함, 환율 이 자식은 왜 자꾸 치솟고 오두방정인지 허공에 대고 해 대는 분노의 발길질이며, 이 깜깜해 보이는 시간들이 나중에 값어치를 할런지 나는 밥값은 하고 살런지 의문투성이.. 어찌 보면 힘들고 어렵게 간 20대 후반의 유학시절은 애초부터 특정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이유들로 난 항상 '100억을 줘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는 안 돌아가. 과거로 돌아가도 난 똑같은 선택들을 했을 거고 매번 처절했을 거야. 해보고 후회, 안 해보고 후회하는 거라면 난 무조건 해보고 후회한 전자를 택해왔기 때문에 더 해볼 것도 없고 결국 과거로 돌아가도 의미가 없어. 쓰리기만 해.
과거보다 오늘이 좋고, 오늘보다 내일이 좋을 거야.'
유학을 통해 내 머리가 공부머리는 아니라는 걸 겸손히 깨닫고 박사는 내가 지금 당장 도전할 범주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석사 유학과 유럽 인스브루크에서 평화학 교환학생 과정까지 다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교육기관에서 인턴경험도 쌓고 경력을 좀 쌓은 어느 때인가. 아프리카 A 국가에 2년간 첫 삽을 뜨게 될 교육사업담당자를 첫 파견한다는 공고가 어느 공신력 있는 International NGO에서 나왔다. '젊을 때 온몸으로 열정을 불살라 일 할 곳이라면 땅끝 어디든 가리'라는 무모한(?) 마음가짐의 패기 왕성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문을 두드렸다. 서류를 통과하고 운 좋게 시험까지 본 후, 최종 면접날이었다.
"아프리카에 2년간 파견되어 일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우린 현지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며 오지에서 함께 일 할 사람이 필요한데 석사학위까지 마치신 분이 시원한 오피스 안에서 일하는 게 더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석사학위든 학사학위든 중요한 건 최종학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위 하나 얻으려고 석사 공부한 게 아니고 이렇게 일하려고 공부한 겁니다. 제대로 일하기 위해 쌓은 지식들이니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는 만큼 충분히 쏟아낼 수 있습니다."
"아니요!
아는 만큼 보이고 쏟아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는 것만 보일 겁니다.
어찌 보면 그게 고학력자들에게 쥐약일 수 있거든요."
나는 보기 좋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충격이었다. 선발되지 못하고 떨어져서 충격인 게 아니라 면접관이 내게 해주고 싶으셨던 말이 무섭도록 정확해 충격이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그분이 내게 던지며 하신 말씀과 더불어 그때 그분의 표정과 태도까지도.
당시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고 되려 치욕적이기까지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 말은 나를 긴장시킨다.
힘겹고 어렵게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시간과 경력과 지식과 관계가 늘어갈수록 되묻게 된다.
과연 제대로 쌓아 올리며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말 그대로
'쌓아 올린' 것들 안에서만 내가 점점 갇혀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아는 만큼이라도 보고 있는 건지,
내가 아는 것만 겨우 보고 있는 건지,
한 끗 차이의 어감으로 뜻이 달라지지만
앞으로 일평생 내게 물어보며 스스로를 점검할 좋은 질문 하나를 얻은 셈이다.
나를 그때 불합격시켜주시고 대신 좋은 질문을 선물해주신 그 면접관 분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