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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Jan 20. 2024

우리는 미로 속을 함께 걸었다

상담 1년  소회!

나는 요즘 상담 전파자가 되었다. 효용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맞는 상담 선생님을 찾기 위해 몇 년을 허비한다고도 하는데 나는 운 좋게 바로 나에게 맞는 선생님을 만난 덕도 있다. 하지만 사실 나도 이 효용을 느끼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병명을 알고 처방약만 먹으면 되지, 상담까지 굳이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내 시기와 진술이 다르기에 병원마다 나의 병명은 조금씩 달랐고, 내 병리적인 증상 역시 경미하다는 것을 나도 알았지만 말이다. 임상가로 일하는 친구는 나에게 약을 먹기보다는 상담을 받아보라는 조언을 꾸준히 해줬기에 시작해 본 것도 크다.


여러 검사지를 앞에 두고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에게 내려진 진단명이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충동성향이 강하고, 성인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적절한 자아와 방어기제가 없다는 게 특징적이긴 하지만 직장 생활을 비롯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장기적인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많고, 글 쓰고 연기를 하는 이상적인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게 그 증거라 했다.


사실 지난 1년 간의 상담은 대부분 선생님의 말에 내가 반박을 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옹호했고, 나는 반박했다. 내 잘못을 고해하면 선생님은 나 대신 내 상황을 대변해 주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어떨 때는 어쩌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나를 보면서 너무 안 됐다며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또 울다가도 금세 냉정한 얼굴로 돌아가 남 탓을 하는 건 유아적인 행동이 아니냐며 나에게 주어진 생소한 위로와 공감에 남고생처럼 머쓱해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나의 '이상함'이 나의 진단명인 '조울증' 등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제야 그것들을 해석해 내기 시작했는데 자꾸 나에게 이상하지 않다고 하니까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럼 그냥 다시 나 개인의 문제로 회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 역시 생략해 버린 맥락과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내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책하면 "요선 씨, 이러이러한 마음에서 그런 거 아니에요?" 하며 빈칸을 채워주었다. 또 냉철한 피드백을 듣고 와 내 문제인 것 같다 하고 있으면 "요선 씨가 그런 피드백을 듣는 이유는 타인에게 그렇게 피드백하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어울리기 때문이에요"라고 짚어주었다.  


한 번은 내가 얼마나 어른스럽지 못한 지를 이야기하다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독일에서 사 온 내 과자를 엄마가 당시에 맡아 키우던 교회 쌍둥이 남자애들에게 말도 없이 전부 주어서 내가 노발대발했다는 어찌 보면 별 거 아닌 이야기였다. 해외 직구를 통해서라도 다시 사주겠다는 엄마에게 새 과자는 필요 없다고, 꼭 그 과자여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 애들한테 다시 뺏어오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처음에 미안해하다가 나에게 정말 질린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생씩이나 됐었는데 유치원 다니는 애들을 상대로 그런 유치한 짓을 했다며 얼마나 내가 미성숙한 사람이냐며 울었다. 그 일이 나에게 상처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면 선생님은 독일에는 왜 갔냐고, 엄마가 그 쌍둥이 친구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대학생 씩이나가 아니라 그래봤자 이십 대 중반 여자애였다고도 짚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여기저기 이사 다니고 남의 집에서 얹혀살아도 보아서 프라이버시가 없었던 기억들, 엄마가 버리거나 망가뜨려놓은 나의 일기장과 핸드폰들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동생들에게 과자 하나 양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소중한 걸 계속 뺏겨왔던 사람이 또 무언가를 뺏겼기에 정당하게 화를 낸 거라고 말해주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화가 날 거라고. 이렇게 선생님과 나는 아주 조금씩 과거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지내다 상담을 빼먹은 적도 있었고, 클럽 가기 전에 부랴부랴 에어비앤비에서 상담을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 이야기 안 하는 내담자는 처음 본다고, 상담을 종결하기를 원하는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한 날도 있었다. 우리는 미로 속을 함께 걸었다. 어떨 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 허허벌판에 함께 서있기도 했다.


상담 1년 차가 된 나는 드디어 내가 예민하고 섬세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은 좀 피곤하고 유아적이고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나를 희화화하고, 하고 나서 후회할 센 농담을 하고, 철없음을 과시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정당하게 나를 방어하지도 못하고 나에 대한 판단을 그냥 수용하는 것도, 모두가 의아하다고 느낄 정도로 생각보다 주장이 없고 남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도.


무엇보다 내가 나를 너무 많이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은근히 어떤 점에서 내가 남들보다 낫다는 생각도,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만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도 줄어들었다. 원래 자기혐오와 나르시시즘은 함께 있는 지라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했었는데 말이다.


결정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나를 좋게 보는 사람들에게도 굳이 굳이 나는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굉장히 철없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건 사실 더 나아지기를 방기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적 허영이라느니 PC 한 척한다느니 남들이랑 달라 보이고 싶어서 특별한 척한다느니 할지라도 (그리고 이건 장담컨대 그런 건 내가 제일 민감하고 내가 제일 싫어한다.)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임을 입증하고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집착하는 등의 수고도 줄었다. (이건 정말 유구한 역사가 있는 일이다ㅎㅎ)


해결하고 짚어나가야 할 일들은 더 남아 있다. 그렇지만 점심 메뉴 하나도 다른 사람이 가자는 대로만 가던 내가 처음으로 돈가스 먹자는 결정을 내린 것만으로 뿌듯했다고 하면 좀 웃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즐길 수 있을지. 나와 타인을 얼마나 많이 신뢰할 수 있게 될 수 있을지. 앞으로의 상담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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