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요즘 나는 약빨 때문인지 충동감이 확실히 안 들고 있다. 그럼에도 일요일 밤 갑작스러운 약속을 잡았다. 심심하거나 재미있을 거 같아서는 아니었고, 그냥 일요일에도 일 때문에 출근을 했는데 가볍게 맥주 한 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맥주를 마시자는 상대가 있었다.
상대는 내가 여고, 여대를 나왔을 것 같다고 했다. 무슨 맥락인지가 분명한 말이었다. (사실 나는 상대를 보자마자 아무런 성적 호감을 느끼지 못했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런 바이브가 더 나왔을 것이다. 나도 나를 긴장하게 하는 이 앞에서는 당연히 다른 반응을 한다. 그게 충분히 여성적으로 어필되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ㅁ^) 자기는 작고 귀여운 연하를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키도 너무 크고 어깨가 넓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눈이 너무 높을 것 같다'고도.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이런 일을 뭐 한 두 번 경험한 것도 아니고, 너무나 '일반적이고 평범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술이나 마시다가 가자는 마인드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리스트가 나와 동일해서 신이 났다. 상대는 술을 더 마시자고 했고, 나도 응했다. 나는 술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에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연기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배우로서"라는 말을 했는데, 상대가 "배웈ㅋㅋㅋㅋㅋㅋ"라고 하면서 엄청 웃었다. 그 뉘앙스와 맥락이 확실히 불쾌했다. 나는 웃어넘기지 않고 똑바로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존나 배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임? '예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임?"
"아니.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계속 웃으며) 왜? 너는 네가 예쁘다고 생각 안 해?"
이 질문은 마치 자신은 아무런 의도가 없었는데 내가 어떤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로 비겁하게 느껴졌다.
"아니,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상대는 내가 아까와는 달리 너무 진지하고 공격적이라고 했다. 아까는 왜 이렇게 나이에 맞지 않게 실없는 얘기만 하나,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가볍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은 너무 진지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왜 나에게 화를 내냐고.
나는 사과를 했고, 자리를 떴다. (상대는 나에게 더 같이 있자고 했다.)
상대를 욕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 아니고 내가 느낀 바를 남겨놓기 위해 적는다.
연기 (이야기)를 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가 드러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게 남들 눈에도 보인다는 게 인상 깊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크다. 어떨 때는 그게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너무 진지하고 공격적'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 최선을 다해 숨기려고 한다. 실제로 숨겨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진짜 노력한다. 내가 헛소리를 많이 하고, 많이 웃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런데 연기 (이야기)를 하면 그걸 숨기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냥 '어쩌라고'가 된다.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연기'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볼품없는 것이다. 자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엄청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우울감이나 체중에 대한 강박도 사실 연기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떨쳐냈을 것이다. 오디션 보러 오라는 연락도 없고, 뭐 하나 자신 있게 해내지도 못한다. 도대체 왜 연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너 성향에는 연출이나 글 쓰는 게 더 맞다는 말도 숱하게 듣는다.
그런 내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니!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 나는 실제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남들 눈에는 그게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여기는 내가 속할 수 있는 그룹일까? 이 정도는? 나는 그럼 어떤 캐릭터를 맡아야 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까? 내 레퍼런스는 누구고, 내 경쟁 그룹은 누구일까? 나는 이런 역할까지는 가능할까? 나는 어떤 감정에 특화되어 있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건 뭘까? 그러면 자꾸 작아진다. 당연히 중요하고 필요한 질문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생존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있는 그대로의 나이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비대면 오디션 영상을 보내면서 '~에 도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다가 '도전하고 싶고 자신 있습니다.'라고 고쳐 보냈다.
추가로, 이제는 불필요한 만남을 할 필요가 없음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어떤 긴장감, 재미, 호기심, 즐거움, 설렘 어쩌고 저쩌고를 기대하며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실제로 재미도 있었고, 즐거웠다. 그렇지만 그 일이 나에게 자부심을 주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