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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Sep 25. 2023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시작될 것이다, 여행이, 여정이, 모험이 (희곡 <파랑새> 중

연극을 본다는 것의 의미: 지금 무언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실 연극 자체를 열렬하게 좋아하진 않는다. 연극을 하면서 재미있었던 적, 솔직히 별로 없다. 그렇지만 좋았을 땐 강렬하게 좋았어서 그 기억들은 몸에 각인되어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연극은 누군가의 '몸'처럼 느껴진다. 일단 저기 배우가 '있다.' 배우가 걸어 나온다. 저 배우는 저렇게 걷는구나. 어, 저 사람 지금 좀 긴장한 것 같은데, 싶으면 어김없이 삐끗거리기까지 하는.


그리고 또 언어도 있다. 배우는 그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실어 나른다. 진짜 비가 내리지 않아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도 배우는 그것들을 무대에서 구현해 낸다. 연극이 일종의 놀이(상징)라는 걸 모두가 아니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 비워두는 방식을 채택하거나(양손 프로젝트- '이거 어차피 가짜다'),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극단 신세계- '그런데 이건 진짜다') 보여주는 공연을 좋아한다.




연극을 ‘한다는 것’의 의미: 관객이 공연자를 보고 있다. 공연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덕분에 내가 생각보다 공연을 더 좋아한다는 걸 문득 느꼈다. 관객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그 현장감과 이건 한 번뿐이라는 긴장감. 그리고 ‘갑자기’ 현실에 선을 긋는 무대와 조명이라는 오브제를 나는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작은 낭독극에 참여하고 나서 적어놓은 메모이다. 공연장은 그 학교의 교실이었다. 무대와 관객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꽤 가까웠다. 한 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고 시간이 되자 조명이 무대와 무대 아닌 곳을 구분해 주었다. 갑자기 현실에 선이 그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관객의 부스럭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연극에서 관객은 꽤나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몸과 몸이 만나 발생하는 에너지를 주고받을 터이니 당연하다. 거기다 관객은 연극을 볼 때, 보다 더 능동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클로즈업도 편집점도 없는 무대를 눈앞에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엇을 볼 것인지 결정할 수 있고, 흘러가버리는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어떤 예술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그래서 그런지 연극은 관객이 완성해 내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라보는 시선이 무대를 '임시적으로' 만들어내고, 휘발되는 무언가를 포착하여 관객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니까. 그리고 의미를 부여받을 때, 공연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이미지로부터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젠더도 나이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시, 연극을 ‘본다는 것’의 의미: 그런데 공연자도 관객을 보고 있다



그렇대도 연극에 대한 기대, 더 이상 크지 않다. 연극은 여러모로 좀 많이 불리한 싸움이고, 그걸 극복해 내기 쉽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 실망했고, 국립극단급이 되어야 만들어내는 보통의 공연도 너무 많이 봐버렸다. 이제 뭘 봐도 그저 그런 나이까지 되어버렸다. (눈물)

이런 마음으로 좋아하는 팀의 오랜만의 신작 <파랑새> 공연을 보러 갔다. 선생님의 공연이니 퀄리티는 보장될 것이고, 나는 그냥 잘 보고(관람하고) 오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텅 빈 무대, 의자 두 개.

관객들에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걸어나오는 배우 둘.

약간의 멋쩍음과 기대감.

두 배우 분이 주고 받으며 쌓아가는 말과 리듬.

이 장면을 보고있자니 뭔가,


그러다 “시작될 것이다, 여행이 여정이 모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옆에 있던 친구가 보고 식겁했다고 한다. “뭐지, 이 새끼?“ 싶었다고.)


뭐지?

왜 운 거지?


공연 예술하는 사람의 설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설렘이 관객석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다 느껴졌다. 아, 연극은 이런 거구나. 저기, 무대에 서 있는 배우도 지금 뭔가를 보고 있구나. 만나고 있구나.


마침 그 공연을 하신 배우 분께서 이런 글을 남기셨다.


“어떤 연극스승이 말하기를 '연극의 기본재료는 배우, 공간, 텍스트가 아니라 관객의 주의, 시선, 경청, 사유이다'라고 말한 것을 새겨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을 하면서 이 말이 계속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만큼 크게 다가온 것은 공연자의 주의, 시선, 경청, 사유이기도 합니다. 배우가 극장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경청하는 일, 무대에 선 자가 관객을 경청하는 일, 이것을 지금보다 더 잘 해내고 싶다고 다짐해 봅니다.”



공연자도 관객을 보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관객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


“7월의 어느 날 오후, 두 남자가 38번가의 한 건물에 기대 서 있었다. 둘 다 대머리에 입에는 시가를 물고, 목줄을 맨 작은 개를 한 마리씩 데리고 있었다. (…)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본 두 남자가 씩 웃었다. 그들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번졌다. 그들은 공연을 했고, 나는 그 공연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혼돈 속에서 그냥 증발해 버렸을지도 모를 그 주고받음에 내 웃음이 형태를 부여해 주었다. (…) 나는 그 거리가 꽤 자주 나를 위한 작품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반짝이는 경험의 빛을 탄생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을 일을 내게 해준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는 거다. 공연자도 관객을 보고 있으니, 관객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대는 열려 있고, 관객은 자신의 시선을 결정할 수 있다. 관객이 의미를 부여하여 형태를 만든다는 점에서 저마다의 공연을 ‘만들어낸다.' 시선은 관객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심지어 역전될 수 있기까지 하다. 몇 개의 공연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이내 사라지는 것. 멋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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