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있었듯이 플라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Akademia)라는 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십대 후반 플라톤의 학교에 입학해서 20년 동안 공부했고, 플라톤이 죽은 후에 자신의 학교를 세워 학문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자신의 책에 언제나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플라톤, 친구보다 진리를 더 사랑해야 한다며 플라톤에 대한 반대 의견을 숨김없이 드러낸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자기 방식으로 뛰어난 제자들이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설계도, 즉 청사진을 그리는 사람이다. 청사진을 그릴 때 처음부터 현실적인 조건들을 일일이 고려하다 보면 상상력이 발동하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룹 토론을 시키면서 ‘이상적인 학교를 구상해보라’고 주문할 때가 있다. 이때 기존의 학교를 염두에 두면 결국 몇 가지를 개선하는 선에서 상상력이 멈추곤 한다. 반면 처음부터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 학교를 구상해보라’고 하면 훨씬 과감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플라톤은 과감하게 상상하는 유형이었다.
현실을 염두에 두는 이들에게 플라톤의 그림은 기이할 뿐이다. 그가 그린 이상적인 폴리스의 모습에도 아테네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들에게 수호자 교육을 시키자, 수호자 집단에서는 사적인 가족을 해체하고 집단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재편성하자는 주장 등이다. 플라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난감해하던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국가>에서도 이런 상황이 반영되었는지, 함께 대화하던 젊은이들이 (플라톤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주장은 정말 우습게 보이겠네요.”(플라톤, <국가>, 5권 452b) 그의 주장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실현 가능성이 없는 몽상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 어떤 것인지 그 본을 그리고서, 그 그림에 모든 걸 충분히 표현해놓은 화가가 그와 같은 인물이 생길 수 있음을 실증해 보여줄 수 없다고 해서 자네는 그를 덜 훌륭한 화가로 생각하는가?”(플라톤, <국가>, 5권 472d)
철학자는 존재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림을 실물로 만들 수 없다고 그림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주장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해달라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자넨 우리가 논의를 통해서 자세히 말한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완전히 실현되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내게 강요하지는 말게나. 그보다는 한 나라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앞서 말한 이상에 가장 가깝게 통치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발견할 수만 있다면 자네의 요구가 만족된 것으로 여기게나.”(플라톤, <국가>, 5권 473a)
이상이 현실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용한 것은 아니다. 이상은 현실이 나아갈 방향을 지시한다. 또 현실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보해가고 있는지 판정하는 척도가 된다. 플라톤은 현실이 가야 할 곳을 손으로 지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논의는 다분히 이론적이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의의 방향을 달리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논의는 다른 논의들처럼 이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탁월성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탐구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 논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행위에 관련된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즉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2장)
이렇게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을 의식하면서 그와 대결하고 있다.
만약 공통적으로 서술되는 어떤 단일한 좋음 혹은 그 자체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어떤 좋음이 있다 해도, 그 좋음은 ‘인간적 행위를 통해 성취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인간적 행위로 성취/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6장)
“공통적으로 서술되는 어떤 단일한 좋음”이라든지 “그 자체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어떤 좋음”이라는 것은 플라톤이 말한 ‘참된 존재’를 가리킨다. 플라톤의 다소 신화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런 참된 존재들은 천상의 세계에 있으며 지상의 사물들은 그러한 것들을 불완전하게 닮았을 뿐이다. 플라톤은 할 수 있는 한 참된 존재를 지향하고 동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의 완전한 좋음이 아니라 지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좋음을 원한다. 플라톤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에 동시에 속한 시민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권은 오직 지상에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실제적인 행위를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뭔가를 행한다. 책을 읽고, 운전을 배우고, 파스타를 만들고, 첼로를 연주하고, 친구를 만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행태는 제각각이지만 이 모든 행위는 ‘뭔가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추구하는 대상은 행위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할 때는 자신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모든 기술과 탐구, 또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은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왔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1장)
요리 기술을 익히는 것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게 좋기 때문이다(기술). 영어를 배우는 것은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게 좋기 때문이다(탐구). 등산을 하는 것은 산이 좋기 때문이다(행위). 짜장면이 아니라 짬뽕을 고르는 것은 국물이 좋기 때문이다(선택). 이렇게 보면 모든 행위는 ‘좋음’이라는 가치를 지향한다.
이것(=좋음)은 의술의 경우에는 건강이고, 병법의 경우에는 승리이며, 건축술에서는 집이고, 다른 경우에는 각기 다른 것으로 모든 행위와 선택에서 그 목적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 나머지 일들을 하니까.(<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이것이 행위의 목적(텔로스, telos), 곧 “그것을 위해서 나머지 것들이 행해지는 것”이다. 행위는 목적과 결부될 때, 즉 목적을 위해 행해질 때 ‘좋음’이라는 가치를 부여받는다. 쉽고 단순한 논리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이 간단한 논리조차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플라톤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참됨’을 찾아볼 수 없는 사태가 많다고 했다.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였던 하워드 헨드릭스는 25년간 유지된 한 단체의 이사였다. 헨드릭스는 어느 날 근본적인 회의가 들어 이사회에 이렇게 묻는다. “이 단체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 질문에 답변하려고 테이블에 빙 둘러 앉았지만, 누구 하나 분명하고도 힘 있게 관심을 돋울 만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아, 예, 그럼요. 좋습니다.” “나는 이 모임을 해체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헨드릭스 형제님, 우리는 25년 동안이나 이 단체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내가 이 단체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타당한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나는 이사회를 떠났지만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하여 모임을 갖고 있는데, 무슨 목적으로 회합하는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하워드 헨드릭스, 김의원‧조남수 옮김, <삶을 변화시키는 교사입니까>(아가페문화사, 1993), 70-71쪽)
행위는 목적과 결부되면서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행위는 눈에 쉽게 들어오지만 목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영어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영어를 공부한다’는 행위는 볼 수 있지만 유학, 자막 없이 드라마 보기, 외국인 친구 사귀기, 승진 등 그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볼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사람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식되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위해 행위를 하는지 흐릿하게만 의식된다. 그 때문에 행위가 반복되다 보면 행위 자체가 습관처럼 굳어지고 목적은 점차 의식 밖으로 밀려난다. 목적을 잃고 25년간 유지된 회합처럼 말이다.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목적을 향해야 한다. 그런데 행위의 목적이 될 만한 ‘좋은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뭐가 있나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순식간에 칠판을 가득 채울 만큼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이 많은 좋은 것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목적은 명백히 여럿으로 보이고, 우리는 이 목적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기도 하므로 (예를 들어 부, 피리,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구의 선택) 모든 목적이 다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우리의 ‘목적이 될 만한 것’, 다시 말해 ‘좋은 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윤리적 선택은 진짜와 가짜,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좋은 것과 좋은 것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윤리적 선택의 능력은 이것들 사이에서 질서와 균형을 잡는 능력이다. 그 사이에 어떤 질서가 성립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좋은 것들 사이에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성립한다. 좋은 것과 좋은 것이 만날 때, 하나는 수단으로서 좋은 것이고 하나는 목적으로서 좋은 것이다.
목적으로서 좋은 것은 또 다른 상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좋은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좋은 것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고, 그 다른 목적이 또 다른 목적의 수단이 되며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연쇄가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많은 좋은 것에서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분명 완전한 어떤 것이다. ……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토 아리스톤, to ariston)일 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결국 허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위해 산다고 말할 만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거창하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내놓을 만한 답을 제시한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무엇보다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박정희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철학자 박종홍이 초안을 만든 「국민교육헌장」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이념과 대의를 우리 머리 위에 두려는 시도에 반대하여 오직 이렇게 말할 뿐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결국 우리 삶은 행복하기 위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가 치르는 이 모든 수고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처음 펼쳤을 때는 좀 싱겁다고 생각했다. 모든 행위는 좋은 것을 추구한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그러나 반복해서 읽다 보니 이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해온 행위와 선택 가운데 ‘내가 좋아서’ 한 것이 얼마나 되던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만이 “내 행위는 (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했다.(<형이상학>, 1권 982b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