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그런데 영혼의 탁월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이성을 지닌 부분(logon echōn)과 이성이 없는 부분(alogon)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영혼의 탁월성도 두 종류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물론 두 탁월함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뿐 실제 활동에서는 보완 관계다.
탁월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적 탁월성(aretē dianoētikē)이며, 다른 하나는 성격적 탁월성(aretē ēthikē)이다. 지적 탁월성은 그 기원과 성장을 주로 가르침에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편 성격적 탁월성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이런 이유로 [성격을 뜻하는] ‘에토스’(ēthos)라는 말도 [습관을 뜻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약간 변형되어 생겨난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1장)
지적 탁월성은 영혼의 이성적 부분에 속하는 탁월함이다. 이것은 곧 생각을 탁월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탁월함을 기르기 위해서는 생각의 능력을 연마할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성격적 탁월성은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속하는 탁월함이다. 이것은 생각을 통해 발휘되는 탁월함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습관에서 비롯한 탁월함이다. 즉 지적 탁월성이란 ‘머리가 좋은 것’이고 성격적 탁월성이란 ‘성격이 좋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의 탁월성을 모두 지닌 사람, 즉 머리도 잘 쓰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라야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머리가 좋다는 것과 성격이 좋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 분명치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머리를 잘 쓴다는 건 무얼 말할까? 우선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사태를 잘 파악한다는 것은 단편적인 현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를 읽어낼 줄 안다는 말이다. 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자처럼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능한 사람들만 머리가 좋다고 하지는 않는다. 업무 현장에서 일처리가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들도 머리를 잘 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어진 업무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수해낼 수 있는 영리함을 갖추었다. 즉 머리가 좋다는 것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서 이성을 지닌 부분을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중 하나는 학문적 인식의 부분(epistēmonikon), 다른 하나는 합리적으로 헤아리는 부분(logistikon)이다.
학문적 인식의 부분은 필연적 사태를 탐구한다. 필연적인 사태란 ‘그럴 수밖에 없는 사태’다. 가령 4×7은 필연적으로 28이지 상황에 따라 26이 되거나 31이 될 수 없다. 이렇듯 수학적 인식은 필연적인 사태를 다룬다. 자연법칙도 마찬가지다.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있다가 컵을 뒤집으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쏟아진다. 물이 위로 올라가거나 공중에 떠 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인식도 필연적인 사태를 다루는 인식이다. 이렇게 필연적인 사태를 탐구하는 데 필요한 지적 탁월함을 이론적 지혜(소피아, sophia)라고 한다.
이에 반해, 합리적으로 헤아리는 부분은 우연적 사태를 성찰한다. 우연적인 사태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태’다. 어느 쪽이 됐든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답이 한 가지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대학원에 진학해야 할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나의 정치적 이념과 가장 유사한 후보에게 투표해야 할까,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 중 그나마 나은 쪽에 투표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어떤 경우에 합리적 헤아림이 필요할까? 목적은 정해졌는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할지 선택할 경우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좋을까? 고속버스를 탈까, 기차를 탈까? 결정하는 데 이동시간, 비용, 도착 후 일정 등 고려할 요소가 많고,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수단이 달라진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실제 행위는 목적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과정을 현명하게 숙고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합리적 헤아림의 지혜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기술적 지혜(테크네, technē), 다른 하나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phronēsis)다. 기술적 지혜란 일차적으로는 어떤 제작물을 만들어낼 때 필요한 지혜다. 이를테면 찌개를 끓일 때 어떤 재료를 사용할지, 어떤 방식으로 손질해서 어떤 순서로 넣을지, 어느 정도 끓일지 등을 실행하는 데 필요하다. 실천적 지혜란 좋은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지혜다. 하루에 몇 시간 자야 좋은지,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의금을 얼마 내야 하는지, 월급의 몇 퍼센트를 저축해야 좋은지 등을 결정해서 실행하는 데 필요하다.
기술적 지혜든 실천적 지혜든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 무엇인지 숙고할 때 필요하다. 최적의 수단은 행위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합리적 헤아림은 우연적인 사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술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의 차이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술적 지혜는 특정한 제작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지혜로 일회적이고 부분적인 수단을 찾아내는 지혜다. 반면 실천적 지혜는 삶 전체의 방향성과 연관된다.
자신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들과 관련해서 잘 숙고할 수 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건강이나 체력과 같은 부분적인 것에서 무엇이 좋은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과 관련해서 무엇이 좋고 유익한지 잘 숙고한다는 뜻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5장)
어떻게 하면 식스팩을 만들 수 있을까? 쇼팽을 잘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어를 효과적으로 배울 수는 없나? 이런 문제는 눈에 보이는 제작물을 생산하는 일과 관계가 없다. 하지만 삶에 주어진 부분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구한다는 점에서 기술적 지혜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삶 전체의 방향성과 관련되지만 보편적인 원리를 정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쓰이는 지혜가 곧 실천적 지혜다.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자신의 목적지를 뚜렷하게 인식하며, 어떤 수단으로 목적에 이를 수 있는지 잘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목적도 선명하고, 그에 이르는 수단도 분명한데 행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점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견해를 검토하면서 그들이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좋은 것을 알면 행위는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도 가장 좋은 것을 파악하면서 그것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는 않으며, 오직 무지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2장)
소크라테스가 앎을 강조한 것은 많은 사람이 스스로의 앎을 과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메시지는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 좋은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삶에는 건강한 앎이 필요하다는 소크라테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알면 행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자전거 타는 법은 간단하다.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면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돌린다’는 공식만 알면 된다. 그런데 자전거를 처음 탄 날 나는 꽤 애를 먹었다.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자 나도 모르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운전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배운 그대로만 하면 내게 이롭다는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타자마자 허둥대다가 넘어졌다. 운전법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비된 신체의 부분들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려고 해도 실제로는 그 반대인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과 똑같은 일이 영혼에도 일어난다.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충동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니까.(<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13장)
윤리적인 이유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던 무렵, 어떤 회식 자리에서 한 사람이 ‘채식의 윤리성’을 화제에 올렸다. 그는 동물권(animal rights)이나 도살 과정의 야만적 실태 등을 설명하면서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점에서 윤리적인지 이야기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이 삼겹살 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삼겹살을 드세요?” 하고 묻자 ‘이론적 채식주의자’가 말했다. “저는 채식이 윤리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시작을 못 하고 있어요.” 그 역시 핸들을 왼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알았지만 아직 몸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만 하면, 그가 부정의한 사람이기를 그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병든 사람이 단지 바란다고 해서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니까.(<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 5장)
인간이 온전한 이성적 동물이라면 생각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영혼에는 비이성적인 측면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으면 훌륭한 행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천은 앎이 아니라 성격의 문제다. 그런데 성격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성격에 대해 말할 때는 보통 ‘성격이 좋다’, ‘성격이 이상하다’라는 식으로 가치 평가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치 평가는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에 적합한가’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성격(에토스, ēthos)이란 가치 평가 이전에 일차적으로는 개인이 지닌 고유성을 뜻한다. “사람 성격은 쉽게 안 바뀌지”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한 개인이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갖는 성질이 성격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격은 개인이 지닌 고유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등장인물이 뚜렷한 캐릭터를 갖는 경우가 많다. 가령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렇다. 예를 들면 챈들러는 쉴 새 없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고, 모니카는 강박적인 승부욕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캐릭터는 등장인물이 가진 고정적이고 일관된 특성이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인물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회사 면접을 보러 간 챈들러는 ‘진중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면접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가 결국 실없는 농담을 하리라고 예상한다. 왜? 그게 챈들러이기 때문이다. 모니카는 사소한 내기를 하다가 챈들러 일행에게 자기 아파트를 넘겨주고 만다. 아파트를 걸고 내기를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니카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모니카는 그렇게 했다. 왜? 모니카니까. 한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그의 계산과 판단보다 오히려 캐릭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좋은 행위를 하고 싶다면 좋은 생각이나 좋은 판단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좋은 캐릭터, 좋은 성격을 지녀야 한다.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용감한 성격을 지녀야 한다.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부지런한 성격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성격을 지닐 수 있을까?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에토스, ēthos)이라는 말과 습관(에토스, ethos)이라는 말이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격은 습관에서 비롯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쌓여 아침형 인간이 되고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습관이 쌓여 올빼미족이 되듯이, 몸에 배어든 습관이 그 사람의 캐릭터를 만든다. 그런데 습관은 어떻게 해서 쌓이는가? 그것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다.
특정한 활동들이 특정한 [성격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것은 어떤 종목이든 경쟁을 위해 훈련 중인 사람들을 보면, 또는 [공연] 행위를 위해 연습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들은 [펀치를 날리든가, 대사를 외우든가] 특정한 활동을 반복한다. 그런데 특정한 활동을 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품성상태(hexis)가 생겨난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몰지각한 사람일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 5장)
행위의 반복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쌓이면 성격이 형성된다. 복싱선수는 반사적이고 습관적으로 움직여서 상대의 공격을 피한다.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일은 그에게 거의 성격처럼 굳어진 일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특성을 지니게 되었을까? 주먹을 피하는 동작을 수십만 번 반복했기 때문이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자기 말을 하듯이’ 대사를 외울 수 있을까? 입이 닳도록 반복했기 때문이다. 성격이 형성되는 방식이 이러하다. 청소를 매일 반복한 사람은 치우는 습관이 붙어서 ‘깔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작은 일이라도 부당한 일에 저항하기를 반복한 사람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 ‘저항하는 인간’이 된다.
행위가 품성을 만든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미처 생각지 못한 훌륭한 삶의 면모를 드러낸다. 즉 ‘훌륭한 삶은 수련을 통해 가능하다.’ 신체적 수련의 반복이 멋진 플레이를 가능케 하듯이, 윤리적 수련의 반복이 훌륭한 행위를 가능케 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들이 집적된 존재이기도 하다. ‘남자도 가사노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쉽지만 가사노동을 거의 해보지 않은, 그래서 습관이 붙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는 ‘옳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옳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왜 생각과 행위가 어긋날까? 나는 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위하지 못할까? 자전거를 탈 때처럼 ‘생각할 틈도 없이’ 몸에 익은 과거의 습성이 나와서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의식적인 행위를 할 때도 얼마든지 있다. 왜 그럴까? 우리의 행위가 정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괴로움을 회피한다. 그런데 내가 좋다고 판단한 행위가 늘 즐거움을 주지도 않는다. 나에게 해로운 행위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피하고 나쁜 것을 추구한다. 정념의 인력(引力)에 끌려 원치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제 행위의 문제는 정념의 문제가 된다. 내 안의 정념을 어떻게 마주할까? 결국 이 문제가 훌륭한 행위의 핵심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억제하기보다 조절해야 한다고 보았다.
성격적 탁월함은 정념과 행동에 관계하고, 이 정념과 행동 속에 과도함과 부족함 및 중용이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대담함, 또 육욕이나 분노 및 연민, 일반적으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일을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할 수 있는데, 양쪽 모두 잘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정념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6장)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한 상황에서 마땅한 방식으로 정념을 갖는 상태를 중용이라고 했다. 즉 중용이란 중간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간은 산술적인 한가운데를 뜻하지 않는다.
대상 자체와 관련된 중간은 양 극단으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와 관련된 중간은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0이 많고 2가 적다면, 대상 자체와 관련된 중간 지점은 6이다. 왜냐하면 6은 2보다 4만큼 많고, 10보다는 똑같이 4만큼 적기 때문이다. 이는 수적인 비례에 따르는 중간이다. 그러나 우리와 관련된 중간은 이런 식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에게 10근의 음식물은 먹기에 많고 2근의 음식물은 적다고 해서, 운동 코치가 모든 사람에게 6근의 음식물을 먹으라고 지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6근도 어떤 이에게는 많고 어떤 이에게는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련한 레슬링 선수인 밀로에게는 적겠지만 운동을 막 시작한 초보자에게는 많을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6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적 중용이란 “수적인 비례에 따르는” 기계적인 한가운데가 아니다. 물체의 무게중심처럼 중용은 움직이는 중간 지점이다. 피자 만드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반죽을 돌리면서 도우를 만들 때, 어느 지점이 무게중심인지는 돌리는 사람 자신만이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중용은 모호한 상태다. 모호하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오직 행위하는 주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전거의 균형이 오직 자전거를 타는 사람 자신이 몸으로 느끼는 감각에 달려 있듯이, 행위의 탁월함은 행위하는 주체 자신의 실천 감각에 달린 문제다. 적절한 실천 감각을 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전거 타기를 반복할 때처럼 수많은 행위의 수련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삶에 대한 플라톤의 시각이 원리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은 실천적이다. 그런데 원리와 실천 모두 행위의 중요한 두 측면이다. 따라서 둘의 관점은 사실상 서로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