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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Apr 26. 2017

17 몸으로 하는 철학의 탄생, 안티스테네스: 퀴니코스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가난한 부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가운데 플라톤보다 서너 살 많은 크세노폰이라는 사람이 있다. 철학적 재능은 플라톤에 미치지 못했지만 글 솜씨가 좋아 많은 글을 썼고 중요한 작품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크세노폰의 작품 가운데 <향연>이라는 책이 있다. 플라톤도 같은 제목의 책을 썼는데, ‘향연’은 당시 희랍인들이 식사 후에 둘러 앉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풍습인 ‘쉼포시온’(symposion)을 가리킨다. 크세노폰의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칼리아스라는 부자 집에 모여서 각자 자기가 무엇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지 이야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중 소크라테스와 어울려 다니는 안티스테네스라는 사람이 독특한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안티스테네스여,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무슨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가?” 안티스테네스가 대답했다. “그야 부유함에 대해서죠.” 그러자 헤르모게네스는 안티스테네스가 돈이 많은지 물었다. 그러나 안티스테네스는 자신이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맹세했다.(크세노폰, <향연>, 3:8)     


헤로모게네스는 ‘그럼 땅을 많이 갖고 있느냐’고 재차 묻지만 안티스테네스는 역시 고개를 젓는다. 한 푼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부유함을 자랑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안티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저는 사람들이 부유함이나 가난함을 그들의 재산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노고도 마다않고 위험도 무릅쓰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 저는 이런 사람들이 매우 심한 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들을 동정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연상 먹으면서도 결코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지요.”(크세노폰, <향연>, 4:34-37)     


안티스테네스는 부유함과 가난함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가진 게 없다, 더 가져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가난하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병이다. 나아가 불의와 악이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마련이다. 작게는 남의 집을 터는 도둑부터 크게는 “모든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무더기로 살해하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도시 전체를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독재자들”에 이르기까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다.      


“저는 충분히 넉넉히 가지고 있으므로, 배고프지 않을 만큼 먹고 목마르지 않을 만큼 마실 수 있으며, 여기에 함께 자리한 부자 양반 칼리아스보다 추위에 더 떨지 않을 정도로 옷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크세노폰, <향연>, 4:37)       


마찬가지로 부유함도 마음에 달렸다. 안티스테네스는 자신이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추위에 떨고 있지 않기에 “충분히 넉넉히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한 사람이 자신의 것을 강탈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일도 없다.      


“저의 부유함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소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라고 판단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제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을 저로부터 빼앗더라도, 저는 제가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형편없는 직업은 없다고 봅니다.”(크세노폰, <향연>, 4:40)     


안티스테네스는 누군가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 있으면 문제없다고 한다. 또 남에게 불의를 행할 일도 없다. 자신의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남에게 관대하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 버는 삶이 ‘강제된 삶’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돈을 적게 필요로 할수록 덜 강제된 삶을 살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삶이 아닌가. 안티스테네스는 돈을 갖지 않는 대신, 돈 버는 사람들에게 없는 ‘여유’를 갖는다.   

   

“당신들은 저에게 항상 여유가 넉넉히 있음을 보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볼 만한 것이 있으면 가서 보고, 들을 만한 것은 듣고, 더구나 유유자적하며 하루 종일 소크라테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값지게 생각합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이분도 금전을 가장 값진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들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시간을 보내지요.”(크세노폰, <향연>, 4:44)     


여기서 안티스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언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말을 마무리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의 방식을 소크라테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몸으로 하는 철학   


안티스테네스는 본래 유명한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게 연설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를 만난 후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다. 안티스테네스는 아테네 외곽에 있는 항구 피레우스 근방에 살았는데,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매일같이 7~8킬로미터를 걸어 시내까지 왕복을 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그토록 열심히 배웠을까?     


철학에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기 자신과 사귀는 능력이다’라고 대답했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6권 6장)     


이것은 ‘너 자신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달리 말한 것이다. 안티스테네스가 ‘자기 자신과 사귀는 능력’을 배웠노라 말할 때 그는 거창한 철학 체계를 구상하기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소박한 자아 탐색의 정신에 더 몰두한다. 플라톤은 질문과 대답, 토론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기술에 강한 인상을 받아 이를 기초로 철학적 인식론을 기획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의의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두 거장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학문으로서의 철학 체계’를 다듬어갔다면 안티스테네스는 이런 기획이 자칫 놓칠 수 있는 것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내면의 덕에 몰두하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었다. 

‘자기를 돌본다는 것’, ‘자기 자신과 사귄다는 것’은 외면적인 것을 가벼이 여김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종종 가게에 진열된 많은 물건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나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앞의 책, 2권 25장)  이렇듯 외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유에 대한 자연적인 욕망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것들을 영혼의 좋음, 신체의 좋음, 외적인 좋음으로 구분하고, 영혼의 좋음이 으뜸이긴 하지만 신체의 좋음이나 외적인 좋음도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런 좋은 것들에 대한 욕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고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유에 관한 안티스테네스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에 따르면 행복해지는 것은 덕만으로 충분하고 소크라테스적인 강함 이외에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앞의 책, 6권 11장)    

  

안티스테네스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는 자연적 욕망의 자리를 열어둘 때 집착의 싹이 자라난다고 생각했다. 덕을 밀어내고 윗자리에 들어앉을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은 애초에 제거해버릴 것. 물론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고 덕을 가꾸는 데만 힘쓴다는 것은 자연스런 욕망을 거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인 강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안티스테네스는 옷을 간소하게 입는 것부터 음식을 절제하는 것까지 일상생활의 수련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로써 머리보다 몸이 중요한 철학이 시작된다.         


덕은 실행 가운데 있는 것이고 많은 언어도 학문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앞의 책, 6권 11장)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어느 때 그에게 노트를 잃어버렸다고 울상이 되어서 말하자 ‘종이 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했어야 했다’고 그는 말했다.(앞의 책, 6권 5장)     


몸으로 하는 철학.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게서 안티스테네스를 통해 뻗어나간 또 다른 줄기의 철학이다. 안티스테네스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후대의 철학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에서 안티스테네스의 행적을 전한다.  

     

소크라테스로부터 ‘가난을 견디는 것’을 배우거나 또 ‘정념에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을 보고 배우거나 해서 그는 ‘퀴니코스적인 삶의 방식’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앞의 책, 6권 2장)     


이렇게 해서 훗날 ‘퀴니코스 학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퀴니코스 학파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처럼 특정한 커리큘럼이나 뚜렷한 계보를 갖춘 학문 공동체라기보다 ‘퀴니코스적인 삶의 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루 칭하는 느슨한 이름이다. ‘퀴니코스’(kynikos)는 ‘개 같은’(dog-like)이라는 말이다. 퀴니코스적인 삶의 방식은 곧 자연을 따르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 사이에서 쟁점이 되었던 자연본성(physis)과 사회규범(nomos)의 충돌이 안티스테네스에 의해 다시 실천적 문제로 떠오른다. 자연 본래의 가치와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 어느 쪽을 추구할 것인가? 안티스테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연 본래의 가치’를 택했다.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좋은 것들’은 오히려 행복한 삶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태도를 상징하는 이름이 바로 ‘퀴니코스’였다. 불필요한 것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살아가는 불행한 인간이 되느니 몸뚱이 하나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개가 되자! 이것이 퀴니코스 학파의 기본 태도다. 이 태도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이가 바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 디오게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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