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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May 10. 2017

19 자유로운 개: 퀴니코스 학파 2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시노페에서 추방당한 디오게네스

     

안티스테네스는 자발적 가난을 가르치고 몸소 실행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에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낙담한 안티스테네스가 한 번은 지팡이를 휘둘러서 제자들을 모두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제자만 그를 떠나지 않았다. “저를 쫓아낼 만큼 단단한 몽둥이는 구할 수 없을 겁니다.” 안티스테네스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그에게 항복하고 곁에 두었는데, 그가 바로 디오게네스였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6권 21장) 

디오네게스는 안티스테네스에게 절제의 삶을 배웠지만 그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디오게네스야말로 퀴니코스 학파의 실제적인 창시자라고 한다. 디오게네스는 ‘개와 같은’이라는 의미의 ‘퀴니코스’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불행한 운명을 지닌 비극 작품의 주인공들에 빗대어 말하곤 했다.      

조국을 빼앗겨 나라도 없고 집도 없는 자.
일상의 양식을 동냥하고 방황하는 인간.(같은 책, 6권 38장)      


디오게네스는 시노페에서 추방당해 아테네로 온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시노페의 환전상이었고 디오게네스는 화폐를 위조한 죄로 추방을 당했다. ‘아버지가 위조를 했다’, ‘디오게네스 본인이 했다’, ‘디오게네스가 신탁을 받고 한 일이다’ 등등 다양한 설이 전해지는데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이 사건은 디오게네스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해준다. 그가 화폐 위조에 관여했고 고향에서 추방당했다는 것. 

고대 희랍인들에게 폴리스는 삶의 터전이다.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죄인으로 죽었지만 자기가 살던 폴리스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플라톤은 폴리스에 불만을 가졌지만 더 훌륭한 폴리스로 개혁하고자 했다. 반면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폴리스에서 추방당해 삶의 터전이 뿌리째 뽑힌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추방을 오히려 삶의 전환점으로 이해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추방당한 것을 두고 비난하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불쌍한 사람이여,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나는 철학을 하게 된 것이라네.”(같은 책, 6권 49장)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하게 된 철학이라. 대체 그에게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철학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자 그는 “다른 것은 접어두고라도, 적어도 어떤 운명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대답했다.(같은 책, 6권 63장)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다고 하는 그에게는 추방조차 수동적으로 당한 사건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택한 결과였다. 그래서 누군가 “시노페 사람들이 그대에게 추방형을 선고한 것이군” 하자 디오게네스는 “내가 그자들에게 체류형을 선고한 것이지”라고 받아쳤다.(같은 책, 6권 49장) 심지어 “그대는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는 물음에 “나는 세계시민이다”라고 답했다.(같은 책, 6권 63장)

디오게네스에게 철학은 책을 읽고 뜻풀이나 하는 유희가 아니었다. 그는 공부 한다는 사람들이 호메로스를 읽으면서 오뒷세우스의 결함이 무엇인지 토론하면서 정작 자신의 결함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헤게시아스라는 철학자가 책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마른 무화과를 먹고 싶다면 그림 속의 무화과가 아니라 진짜 무화과를 원할 것 아닌가? 그런데 공부에 대해서는 진짜를 원하지 않고 종이에 적힌 것을 원하다니!”(같은 책, 6권 48장) 

디오게네스에게 철학은 삶의 문제였다. 진짜 철학은 책을 읽고 해석하거나 논리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철학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랍니다”라고 하자 “그럼 대체 왜 살아 있는 거지? 훌륭하게 살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라고 말했다.(같은 책, 6권 65장) 그는 사람들에게 “이성을 갖추든지 밧줄을 갖춰 놓든지 하라”고 말하곤 했다. 지혜롭게 살든지, 아니면 밧줄에 목이나 매라는 말이다.(같은 책, 6권 24장) 철학은 그렇게 절박한 것,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고 발로 차면서까지 경쟁을 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뛰지 않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개가 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했던 진짜 공부는 무엇에 관한 것일까? 그것은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디오게네스가 추방당한 것이 화폐 위조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일설에 따르면 디오게네스는 아폴론 신탁의 지시에 따라 화폐를 위조했다가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탁이라는 것은 본래 뜻이 모호해서 해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화폐를 위조하라’는 아폴론의 신탁도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폐란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폐를 위조하라는 말은 ‘인간 사회의 가치체계를 뒤엎으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매우 귀중한 것이 싼 값으로 팔리고 또 그 반대일 때도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사실 조각상은 3000드라크마나 되는데 1코이닉스의 보릿가루를 동화 한 닢에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6권 35장)     


디오게네스는 사물의 값어치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조각상은 인간에게 꼭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 관습에 따라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보릿가루 등의 음식물은 꼭 필요하다. 그것은 자연적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사회적 관습으로 만들어진 가치가 자연적 가치를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디오게네스는 이런 가치 질서를 뒤집으려 했다. 그래서 고대의 철학사가는 디오게네스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는 틀림없이 화폐를 위조하고 있었던 것이고 사회적 관습에 따르는 것에는 자연에 바탕을 둔 것과 같은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같은 책, 6권 71장)     


이렇게 가치를 뒤집는 것은 디오게네스에게는 오히려 지극한 행복에 이르는 길, 곧 신들과 같은 행복을 누리는 길로 여겨졌다. 가치를 뒤집는 것은 지혜로운 자들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현자는 신들의 친구이지. 그런데 친구들의 것은 공통의 것이라고들 하지 않나? 그러니까 현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지.”(같은 책, 6권 37장)      


지혜는 소유물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소유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디오게네스는 “자족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같은 책, 6권 17장) 그렇다면 부자가 되기 위해 굳이 돈이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디오게네스는 “금전에 대한 사랑은 모든 화의 근원”이라고까지 말했다.(같은 책, 6권 50장)  

   

그는 때때로 큰 소리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양식은 신들로부터 쉽게 부여되고 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만 것은 사람들이 벌꿀이 든 과자라든가, 향유라든가, 그 밖에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같은 책, 6권 44장)      


디오게네스의 삶은 벌꿀과자나 향유를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적은 것에 만족할수록 자유롭고 행복하다면, 더 적게 지닐수록 자유와 행복이 커지지 않겠는가? 그의 무소유는 상상 이상이었다. 마땅한 거처가 없었던 그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작은 오두막을 한 채 마련해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시일이 늦어지자 공문서 보관소에 굴러다니던 큰 술통을 가져다가 집으로 사용했다. 개집이나 다름없는 집이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디오게네스>, 1882


그뿐 아니라 디오게네스는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 물건들을 담고 다니는 큰 주머니 하나만 가지고 생활했다. 그나마 휴대품들도 점차 줄여나갔다. 처음에는 컵을 갖고 다니면서 물을 마셨는데 어느 날 어린 아이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는 “내가 이 꼬마에게 졌다”라고 하면서 컵을 버렸다. 밥그릇도 이런 식으로 버렸다. 이렇게 극단적인 무소유를 실행하면서 디오게네스는 구걸을 하며 살아갔다. 그러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듣거나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장애인이 아니라, 자신처럼 주머니에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장애인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그는 집 잃은 개처럼 살았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전기가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사람들을 쏘아 마비시키기 때문이었다. 디오게네스로 말하자면, 자타공인 개였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사람들이 개라고 부르냐고 하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짖어대고, 나쁜 자들은 물어뜯기 때문이지.”(같은 책, 6권 60장) 개를 자처하는 사람이니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한번은 어떤 이들이 개에게 주듯이 뼈다귀를 던졌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개가 하듯이 그들에게 오줌을 갈겼다. 

또 개처럼 길거리에서 밥을 먹었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광장에서 밥을 먹는다 해서 이상할 게 없지.” 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광장에서 자위행위도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자 능청스럽게 “배고플 때도 이렇게 문지르기만 해서 해결된다면 좋을 텐데”(같은 책, 6권 69장)라고 했다.

소유하지 않고 사는 것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개가 되기 위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였다. 안티스테네스가 하던 몸의 수련을 디오게네스는 스파르타식으로 강화시켰다. 여름에 뜨거운 모래 위에서 뒹굴기도 하고, 겨울에는 눈길 위를 맨발로 걷거나 하면서 몸을 수련했다. 심지어 정말 개가 되고 싶었는지 날고기를 생으로 먹기까지 했는데, 이것만은 실패했다고 한다.

복싱 선수가 샌드백을 치면서 훈련하듯이, 디오게네스가 사용하던 훈련 도구가 있었다. 바로 거리에 세워진 조각상이었다. 겨울에 조각상이 눈으로 덮이면 디오게네스는 그것을 끌어안고 추위를 견디는 훈련을 했다. 조각상은 신체 훈련뿐 아니라 마음의 훈련에도 사용되었다. 한번은 조각상에게 구걸을 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거절당하는 훈련을 하고 있지.”(같은 책, 6권 49장) 이 모든 것이 세상일에 초연해지고 궁핍을 견디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는 사람이 훈련을 통해 어떻게 덕에 이르는가를 예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손재주나 그 밖의 다른 기술들을 익힐 때, 장인들은 연습을 통해서 놀라운 재주를 몸에 익힌다. 피리연주자나 운동선수들도 각자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영혼을 그와 같이 단련시킨다면 그 노력은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같은 책, 6권 70장)     


디오게네스에게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치밀한 논변이나 체계적인 이론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좋은 삶이라고 믿는 것을 체화시키기 위한 단련에서 디오게네스를 따를 자는 없었다. 무도인이 산중수련을 하듯이 디오게네스는 가난하고 거친 삶을 통해 철학을 수련했다. 물론 그것은 고된 일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불필요한 일에 노고를 쏟지 않나? 그에 비해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노고는 행복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사람은 불필요한 노고가 아니라 자연에 적합한 노고를 통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며, 불행한 삶을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탓이라고 그는 말했다. 쾌락을 경멸하는 것도, 연습을 하면 쾌적한 일이 된다. 마치 향락적인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와 반대되는 생활을 하면 불쾌함을 느끼듯이, 쾌락과 반대의 것으로 단련된 사람들은 쾌락 그 자체를 경멸하는 데에서 오히려 더 큰 쾌적함을 느끼게 된다.(같은 책, 6권 71장)      


세상을 향해 짖는 개


이렇게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디오게네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초연하고 냉담했다. 희랍어 ‘퀴니코스’(kynikos)에서 영어의 ‘시니컬’(cynical)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냉소적인’이라는 뜻이다. 디오게네스는 인간 사회에서 중시되는 가치를 냉소적으로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의 가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독설을 날리곤 했다. 몸을 씻고 있는 사람에게 “몸을 씻는다고 문법적 오류가 고쳐지지는 않지. 하물며 몸을 씻는다고 인생의 과오가 씻길까”라고 내뱉었다.(같은 책, 6권 42장)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입구에 ‘악한 사람은 들어오지 말 것’이라고 써 붙인 것을 보고는 “집주인은 어떻게 들어갈 작정이지?”라고 중얼거렸다.(같은 책, 6권 39장) 

디오게네스의 독설은 거의 무차별적이었고 주위 사람을 거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지경이었다. 어느 날 훤한 대낮에 램프에 불을 켜서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뭘 하고 있느냐고 묻자 “인간을 찾고 있다네”라고 대답했다.(같은 책, 6권 41장) 한 번은 광장에 서서 “어이, 인간들이여!”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나는 인간을 불렀지 불한당들을 부른 게 아니라구!”(같은 책, 6권 32장) 하였다. 디오게네스가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 누군가 “안에 사람이 많소?”라고 묻자 “아니요”라고 대답했는데 다른 사람이 “목욕탕이 붐비나요?”라고 물었을 때는 “그렇소”라고 대답했다.(같은 책, 6권 40장) 

가진 것은 없었지만 디오게네스는 누구보다 당당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좋은 가문이나 명성도 악덕의 장식이라며 빈정거렸다. 이렇다 보니, 재산이나 명예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디오게네스에게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이 디오게네스를 호화스러운 저택으로 안내하고, 여긴 깨끗한 곳이니까 평소 하듯이 침을 뱉거나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디오게네스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그 사람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더 더러운 곳을 찾지 못해서 말이야.”(같은 책, 6권 32장)     


가문이나 명성은 그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열이 있겠지만 아예 무시하는 디오게네스에게는 존경이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왕궁으로 불려 다니는 지식인들도 디오게네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카리스테네스를 행복한 자라고 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밑에서 얼마나 호화롭게 지내는지 모른다고 말한 자에게 “그는 불행한 사내다. 점심도 저녁도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밖에 먹지 못하니까”라고 디오게네스는 말했다.(같은 책, 6권 45장) 

    

세상 사람들이 비천하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디오게네스는 스스로 그런 비천한 인간이기를 자처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가치 평가를 조롱했다. 도둑을 체포해서 연행해가는 관리들을 보고는 “큰 도둑이 좀도둑을 연행해가네”라고 소리쳤다.(같은 책, 6권 45장) 하인에게 신발을 신기라고 명령하는 자들을 보고는 “코도 혼자 못 풀 테니 불행한 사람이로군” 하며 웃었다.(같은 책, 6권 44장) 그의 눈에는 노예나 그를 부리는 주인이나 얽매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예는 주인을 섬기고 있지만 열악한 인간은 자기 욕망을 섬기고 있지.”(같은 책, 6권 66장)


자크  가믈랭,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 1763


“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라고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나는 디오게네스. 개다.”(같은 책, 6권 60장) 권력자들이 학식 있는 이들에게 뭔가를 베풀면서 권세를 과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모양이다. 한 번은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가서 원하는 것을 말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앉아 있던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햇볕 좀 가리지 않았으면.”(같은 책, 6권 38장) 

디오게네스는 정말 개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개다! 하지만 너희들은 개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아마도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자유로운 개를 만난 후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아닌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구나”라고 중얼거렸다는 말이 전해진다.(같은 책, 6권 32장) 통 속에 사는 거지 철학자가 세계를 정복한 대왕을 무릎 꿇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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