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비극 작품의 주인공들이 겪는 불행에 비유했다. 물론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택한 삶의 방식이 오히려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었으니 이는 반어(反語)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가 터무니없지만은 않아서 비극 공연을 보면서 퀴니코스 철학을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 크라테스라는 사람이 그랬다.
그가 퀴니코스파의 철학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 것은 어느 비극 공연에서 텔레포스가 작은 바구니만 들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6권 87장)
크라테스는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의 집에 머문 적도 있다. 그런데 크라테스는 비극 공연을 보면서 텔레포스가 거지로 위장한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텔레포스 이야기는 이렇다.
트로이아 전쟁 때, 아가멤논이 이끄는 트로이아 원정군은 처음에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트로이아보다 한참 아래쪽에 있는 뮈시아에 상륙하여 인근을 약탈한다. 이때 뮈시아의 왕 텔레포스가 이끄는 군대가 반격을 가하여 희랍군을 물리치는데, 전투 와중에 텔레포스가 아킬레우스의 창에 맞아 상처를 입는다. 다행히 희랍군은 물러가지만 상처가 아물지 않은 텔레포스는 거지로 위장한 채 홀로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상처를 입힌 사람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료한 텔레포스는 희랍군에게 트로이아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준다.
크라테스가 텔레포스의 어떤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가 평범한 철학을 공부했다면 자신의 삶에 교양 하나를 더하는 정도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런데 크라테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퀴니코스 학파의 문을 두드렸고, 이것은 그가 당장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자신의 토지재산을 돈으로 바꾸고 …… 이렇게 얻은 약 200탈란톤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앞의 책, 6권 87장)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크라테스가 어느 환전상에게 돈을 맡기면서 자식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성장하면 맡겼던 돈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철학자가 된다면 재산이 필요 없을 테니 시민들에게 나눠주라는 당부를 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디오게네스의 권유로 재산을 포기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재산을 처분하고 디오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 크라테스가 어느 정도로 무소유를 실천했는지 알 수 없지만 퀴니코스의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크라테스는 이름처럼 ‘굳건한 사람’(엔크라테스)이 되기 위해 여름에는 두터운 외투를 걸쳤고 겨울에는 누더기 옷을 걸쳤다.(앞의 책, 6권 87장)
귀한 가문의 청년이 갑자기 거지와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하자 집안사람들이 당황한다. 친척들이 크라테스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그들을 쫓아버렸다고 한다. 재산과 가족을 포기한 채 퀴니코스 철학자의 길을 택한 크라테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누군가 철학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1코이닉스(약 1.3리터)의 콩, 그리고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앞의 책, 6권 86장)
포도주빛을 띤 바다의 한가운데에 페레(Pērē)라는 나라가 있다.
공정하고 풍요로운데, 지저분하고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도, 빌붙어 사는 자도,
폭식가도, 호색가도, 그 나라로 항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나라에는 마늘, 무화과, 빵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들 때문에 서로 싸우지도 않고
돈이나 명성 때문에 무기를 마련하지도 않는다.(앞의 책, 6권 85장)
이것은 크라테스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상적인 나라를 그린 시다. 나라 이름 ‘페레’는 퀴니코스 철학자들이 물건을 담아서 갖고 다녔던 주머니를 가리킨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사람들의 욕망이 다양해지고, 그에 따라 폴리스가 거대해지면서 자연스레 전쟁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그린 나라에서는 전쟁을 전담하는 수호자 계층이 중요한 기능을 맡는다. 반면 크라테스가 꿈꾼 나라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나라, 비대한 문명이 만들어낸 욕망을 찾아볼 수 없는 나라다. 이런 곳에서는 다툼도 전쟁도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 날 메트로클레스라는 사람의 가족이 크라테스를 찾아왔다. 메트로클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제자로 철학 공부에 열심이었다. 어느 날 그가 연설 연습을 하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방귀를 뀌고 만다. 이 일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던지 메트로클레스는 집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 망신을 당했으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요.”
어떻게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가족은 크라테스에게 메트로클레스를 설득해달라고 찾아간다. “뱃속의 가스가 밖으로 분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그렇지 않고 배에 가스가 가득 찼으면 얼마나 곤란했겠나?” 자연의 이치에 합당한 설명이었지만 메트로클레스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은 방귀 뀌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다. 크라테스는 콩을 많이 먹으면 방귀가 잘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메트로클레스를 만나기 전에 콩을 잔뜩 먹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부욱, 부욱, 부우웅……, 하고 방귀를 뀌었다! “어떤가? 별 거 아니지?”
크라테스의 방귀에 메트로클레스는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크라테스는 죽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괴롭히던 것들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호메로스가 숭상한 명예,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치를 둔 사회적 명성…… 이런 것들을 방귀 소리로 날려버린 것이다. 이후 메트로클레스는 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를 만난 플라톤이 자신의 비극 습작 노트를 불에 던져버렸듯이, 크라테스를 만난 메트로클레스는 이전 스승인 테오프라스토스의 강의 노트를 불태웠다고 한다.
메트로클레스의 부모 입장에서는 아들의 마음을 달래려다가 오히려 아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딸 히파르키아가 골치였다. 결혼할 나이가 된 히파르키아에게는 청혼자들이 제법 있었는데, 아무도 히파르키아의 눈에 차지 않았다. 히파르키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한 명의 남자가 다름 아닌 크라테스였다. 가문 좋고 부유하고 잘생긴 청년들을 전부 마다하고 거지나 다름없는 퀴니코스 철학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부모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부모는 온갖 말로 딸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딸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크라테스와 결혼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요.”
이 부모는 자식들이 죽겠다고 할 때마다 크라테스를 찾아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크라테스를 찾아가 딸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크라테스 편에서도 히파르키아의 구애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개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퀴니코스 철학자에게 결혼이 웬 말인가! 그는 히파르키아를 만나 자신이 적절한 신랑감이 아니라는 것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지혜로운 철학자도 사랑에 빠진 여인을 쉽게 당해내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본 후에도 설득이 먹혀들지 않자, 크라테스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말했다.
“여기 당신의 신랑이 있소. 이게 그가 가진 전부요. 이제 당신이 결단을 내리시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삶을 견뎌낼 수 없다면 당신은 나와 함께 살 수 없을 테니 말이오.”(앞의 책, 6권 96장)
히파르키아는 흔들림 없이 크라테스를 선택했다! 결국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함께 퀴니코스 철학자의 삶을 살았다. 디오게네스가 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욕구를 만족시켰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면 이 커플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와 섹스를 하기 위해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지만 크라테스와 히파르키아는 공개적으로 섹스를 했다.(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퓌론주의 개요>, 1:14)
히파르키아는 단지 크라테스의 아내가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동료 철학자이기도 했다. 고대 희랍의 향연은 남자들의 회합이었지만, 히파르키아는 향연에도 끼어들어 남자들과 토론을 나누었다. 한 번은 뤼시마코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향연이 열렸는데 히파르키아는 여기에 참석했다가 테오도로스라는 사람과 언쟁을 벌였다. 히파르키아는 소피스트들의 쟁론술에도 소양이 있었는지 장난기 어린 궤변으로 테오도로스의 약을 올렸다.
히파르키아 똑같은 행동인데 누가 하면 잘못이고 누가 하면 잘못이 아니고, 그렇게 될까?
테오도로스 그럴 리가 있나! 같은 행동이면 누가 해도 똑같지.
히파르키아 그럼 테오도로스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잘못이 아니라면, 히파르키아가 똑같은 일을 해도 잘못이 아니겠네?
테오도로스 그렇겠지!
히파르키아 테오도로스를 때리는 행동은 어떨까? 테오도로스가 테오도로스를 때리는 건 잘못이 아니지?
테오도로스 그렇지.
히파르키아 그럼 히파르키아가 테오도로스를 때려도 잘못이 아니겠네?(<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6권 97장)
테오도로스는 말문이 막혔다. 웃어 넘기면 그만이겠지만 똑똑한 여자를 보기 싫었던지 테오도로스는 완력으로 히파르키아의 겉옷을 잡고 확 벗겨버린다. 사내들 앞에서 히파르키아에게 망신을 주고 수치심을 안겨줄 생각이었을 테다. 하지만 히파르키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한번은 테오도로스가 향연에 나타난 히파르키아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 “베틀을 버려두고 돌아다니는 여자가 누구람?” 베 짜는 일은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니, 남자들 모임에 끼어들지 말고 집안일이나 하라는 뜻이겠다. 그러자 히파르키아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나야, 테오도로스. 그런데 베 짜는 데 쓸 시간을 교양을 닦는 데 쓴다면 내가 잘못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나?”(앞의 책, 6권 98장)
고대의 철학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자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독립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철학자는 히파르키아가 유일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여성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세운 학교 아카데미아에는 라스테네이아(Lastheneia)와 악시오테아(Axiothea)라는 여성 제자가 있었는데, 이름 외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더구나 악시오테아는 남장을 하고 다녔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당시에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철학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반면 히파르키아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철학적 담론에 끼어든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관습을 비웃어버린 퀴니코스 학파가 보여줄 수 있었던 급진적인 면모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책에는 히파르키아에 대해 아주 적은 내용만 적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과 그 밖에도 셀 수 없는 다른 이야기들이 이 여성 철학자에 대해서 전해진다.”(앞의 책, 6권 97장) 우리는 그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들의 도시를 활보한 여성 철학자 히파르키아의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