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고 행복이 곧 즐거움에서 온다면,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대답은 명백하다. 지금 당장 즐거움을 누려라! 우리 삶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지금 당장 열매를 수확하라! 많은 근엄한 현자들은 인간이 누리는 쾌락을 금기시하곤 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못 박는다.
그렇다면 과제는 즐거움의 크기를 최대한 키우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더 큰 즐거움을 얻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 마치 여행계획을 세우는 사람처럼 말이다. 2주간의 휴가를 이용해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해보자. 궁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대한 많은 나라를 돌아다닐 것인가, 한두 나라에 집중할 것인가?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선택할 것인가? 최대한 안락한 숙소를 골라야 하나, 싼 숙소를 이용하는 대신 남은 돈을 먹는 데 써야 하나? 어디에서 뭘 먹고, 뭘 봐야 할까? 등등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은 정해진 시간과 돈으로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인터넷 정보를 이리저리 검색하면서 머리를 싸매고 고심한다.
작정하고 즐기기로 마음먹은 여행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더 큰 즐거움을 찾기 위한 고심의 연속이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식사에는 ‘끼니 해결’이라는 실용적인 목적 못지않게 ‘맛의 향유’라는 쾌락적 목적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참치찌개와 떡만둣국과 오므라이스, 어떤 것이 나를 가장 즐겁게 해줄지 고민하는 것은 내가 나의 즐거움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먹을 때뿐만이 아니다. 퇴근 후 누굴 만나서 무얼 할지, 주말엔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는 것은 더 큰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더 맛있는 것, 더 짜릿한 것, 더 보기 좋은 것을 누리려고 애쓰는 것은 즐거움의 크기를 늘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삶의 목적을 즐거움에 둔 철학자라면 자연스럽게 다음 물음에 부딪친다. 우리가 최대치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 에피쿠로스의 대답을 들어보자.
모든 괴로운 것들의 제거가 즐거움의 크기의 한계이다. 즐거움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괴로움이 없으며 양자 모두의 괴로움도 없다.(에피쿠로스, 오유석 옮김, <쾌락>(문학과지성사, 1998), 13-14쪽)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의 크기의 한계”가 “모든 괴로운 것들의 제거”에 있다고 한다. 마음의 괴로움과 몸의 괴로움이 모두 제거된 상태가 ‘가장 큰 즐거움’의 상태라는 말이다. 즐거움에 대해 논하다가 갑자기 괴로움을 끌어들이는 것이 좀 의아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여러모로 얽혀 있다. 이를테면 괴로움이 강한 상태에서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도 몸이 아플 때 들으면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 반면 괴로움을 겪은 직후에는 작은 즐거움도 크게 느껴지고 평소에는 그다지 즐겁지 않던 것도 즐겁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종일 격무에 시달린 뒤에 잠자리에 들 때 특히 달콤하게 느껴지고 운동 직후에 마시는 우유 한 잔이 꿀맛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들을 떠올려보면 에피쿠로스가 즐거움에 대해 말하면서 괴로움을 언급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우리는 보통 세 가지 상태를 구별해서 생각한다. 즐거운 상태, 괴로운 상태, 그리고 딱히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간 상태. 지인의 결혼식을 예로 들어보자. 결혼식장에서 내 마음은 중간 상태에 있다. 그러다 피로연 음식을 앞에 두자 즐거운 상태가 된다.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이 합석을 하는 순간 괴로운 상태가 된다. 이어서 먹은 음식이 체하면서 몸도 괴로워진다. 피로연장을 나와서 소화제를 먹자 속이 풀리면서 몸이 즐거운 상태가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다시 중간 상태. 말하자면 즐거움은 플러스 상태, 괴로움은 마이너스 상태, 그리고 중간 상태는 0이다. 이것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중간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는 괴로운 것들이 제거된 상태가 곧 즐거운 상태다.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 때만 즐거운 게 아니라, 싫은 사람과 합석한다거나 체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괴로운 일을 겪고 있지 않은 상태가 곧 즐거운 상태다. 즐거움에 대한 이런 생각은 매우 소박하다 못해 소극적으로 보인다. 플러스를 늘리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를 줄이는 것, 비유하자면 재산을 늘리는 게 아니라 빚을 없애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즐거움이 목적이다”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즐거움이나 육체적인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쾌락>, 47쪽)
따라서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무분별하게 탐닉하는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분별한 쾌락’이 그 자체로 악해서가 아니다. 여기서도 판단 기준은 즐거움 자체다.
어떠한 즐거움도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가져다준다.(<쾌락>, 47쪽)
에피쿠로스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음주나 과도한 성행위를 경계한다. 이런 일들이 사악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괴로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나에게 즐거워 보이는 일이라 해도 이로운 일이 아닐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피쿠로스도 ‘즐거워 보이는 것’에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그런 경고를 하는 것조차 ‘즐거움’을 위해서다. 에피쿠로스는 겉으로 즐거워 보이지만 실은 우리에게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지혜와 절제를 필요로 한다.
즐거움이라고 다 같은 즐거움이 아니다. 어떤 즐거움은 참된 즐거움이지만 어떤 즐거움은 즐거움의 옷을 입은 괴로움이다. 이제 에피쿠로스는 이것을 판별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즐거움을 분류하려 한다. 그런데 즐거움이 워낙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분류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초점을 살짝 옮겨서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욕망을 관찰한다. 즐거움은 나의 욕망이 충족될 때 느껴지므로 즐거움의 원천이 곧 욕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면해야 한다. 내 욕망의 대상이 성취된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만약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쾌락>, 34쪽)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욕망에 대해 던지는 비판적 물음이다. 어떤 욕망은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 가령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은 더 큰 고통이 된다. 그러니 식욕은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필연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모든 욕망이 그렇지는 않다.
욕망들 중에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지 않는 욕망은 필연적이지 않다.(<쾌락>, 20쪽)
늦은 밤에 배가 출출해졌다. 치킨이 떠올랐다. 이런 경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치킨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곧장 이어진다. 배고픔을 해결하고픈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치킨’을 먹고 싶은 욕망은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 해서 나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음식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인 욕망이지만 치킨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이지는 않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필연적인 욕망과 필연적이지 않은 욕망으로 구분한다.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은 필연적인 욕망이다. 이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을 경우 심한 고통을 겪게 되고 심지어 우리 존재가 파괴될 수도 있다. 그런데 태블릿PC에 대한 욕망은 충족되지 않아도 우리 존재에 심각한 영향이 없으며 큰 고통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잘 살펴보면 물을 마시고픈 욕망은 자연적인 욕망이지만 태블릿PC에 대한 욕망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욕망은 곧 필연적인 욕망이고 자연적이지 않은 욕망은 필연적이지 않은 욕망일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우리를 더 헛갈리게 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은 욕망에 자연적인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부류로 나눈다.
욕망들 중에서 어떤 것은 자연적인 동시에 필연적이며, 다른 것은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고, 또 다른 것은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으며 다만 헛된 생각에 의해 생겨난다.(<쾌락>, 20쪽)
① 자연적이면서 필연적인 욕망: 인간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욕망인 동시에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인간의 삶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욕망을 가리킨다. 음식에 대한 욕망, 잠에 대한 욕망, 호흡에 대한 욕망 등등이다.
②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욕망: 대표적인 것이 성욕이다. 성욕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충족시키지 않는다고 (물을 마시지 않거나 잠을 자지 않았을 때처럼) 생명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연적이되 필연적이지는 않다. 사실 이 부류에 속하는 욕망들이 어떤 것들인지는 좀 애매하다. ‘자연적’이라는 게 다소 모호해서 무엇이 ‘자연적’인지 의견이 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성의 모성애는 자연적인가?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보지만 어떤 이들은 그 역시 학습된 감정이라고 본다. 이렇듯 구체적인 욕망에 대해 이것이 자연적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령 자연적인 욕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꼭 필연적이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③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 인간이 본래 지닌 욕망도 아니고, 따라서 충족시키지 않아도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 욕망을 가리킨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 사람들 사이에서 누리고 싶은 명예욕이나 지배욕 등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식하는 많은 욕망이 사실상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을 우리는 왜 그토록 열렬하게 충족시키려 할까? 필연적인 욕망이 아니더라도 주관적으로는 절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트에 엄마를 따라온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장면을 보자. 엄마가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면 아이는 세상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다는 듯이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엄마는 이 장난감이 아이에게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막상 사줘도 이틀 뒤에는 다른 장난감과 함께 바구니 안에 처박힐 테니까. 하지만 아이는 눈앞의 장난감이 사실상 얼마나 불필요한지 모른다. 아이에게는 지금 이 순간 저것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나도 절박하고, 명확하며, 필연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 욕망은 필연적인 게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고통을 가져오지는 않는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런 쾌락은 헛된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며, 이런 쾌락을 몰아낼 수 없는 까닭은 그 쾌락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헛된 생각 때문이다.(<쾌락>, 21쪽)
헛된 생각이라고? 그렇다. 상상력이 분방(奔放)하듯이 욕망도 분방하다. 우리의 욕망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 대상에 집착하여 우리 마음이 거기에 달라붙게 한다. 기어이 그것을 손에 넣고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또다시 자신의 욕망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피쿠로스의 안내를 따라가 보면 사실상 우리가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욕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즐거움이 욕망의 충족에 달려 있다면, 삶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즐거움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자연이 요구하는 부유함은 제한되어 있으며 쉽게 얻을 수 있다. 반면 헛된 생각이 요구하는 부유함은 무한히 뻗어나간다.(<쾌락>, 17쪽)
그러므로 즐거운 삶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즐거운 대상들을 일일이 다 좇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유인하는 대상들이 실은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의 산물임을 알아차리고 헛된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여기서 고통을 느끼겠지만 이 고통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손에 넣지 못한 아이가 느끼는 일시적인 고통과 같다. 망상에서 비롯된 이런 고통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꼭 필요한 것들만 갖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충만함이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된다면, 단순한 음식도 우리에게 사치스런 음식과 같은 쾌락을 준다. 또한 빵과 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배고픈 사람)에게 가장 큰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tyche)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쾌락>, 47쪽)
에피쿠로스가 즐거움을 계산하는 방식을, 어떤 이는 간단히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즐거움=충족/욕구
욕구가 100이고 충족량이 40인 경우, 우리 삶은 40퍼센트만큼 즐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더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해법은 충족량을 늘리는 것이다. 40에서 50으로, 다시 50에서 60으로 점차 충족량을 늘려가면 즐거움의 총량도 늘어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전략은 충족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욕구량을 줄이는 것이다. 충족량이 40인데 욕구량을 100에서 80으로 줄이면 50퍼센트만큼 즐거워진다. 욕구량을 다시 50으로 줄이면 80퍼센트 즐거워진다. 이것이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즐거움을 늘리는 에피쿠로스의 방식이다. 이런 비움의 경지가 높아지면 그야말로 최소한의 것만을 갖고도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육체는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로부터 구해달라고 외친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거나 안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행복에 있어서 제우스와도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쾌락>, 47쪽)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올륌포스의 신들은 매일같이 둘러앉아 잔치를 벌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그리는 이상적인 삶이다. 그런데 신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에피쿠로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것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수련’을 거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