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직장과 예쁜 아이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
관심있게 들어서인지 느닷없는 그녀의 자살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인지 회사에 있을 때도 나는 박소연, 그녀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부분 의외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자살할 사람은 아니었다고 했다. 늘 밝은 미소로 기억되는 여인이었단다. 아주 일부는 바로 그 웃음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보다 딱 10년 뒤에 입사했으니 그녀의 회사생활도 10년을 꽉 채우고 있었다.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 미소가 조직생활에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한 두 달이면 금새 알아차리게 마련이니까. 그러고 보니 유난히 화사했던 그녀의 미소가 매우 비현실적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더 이상한 것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추측에 근거한 것들뿐이라는 점이다. 10년차쯤되면 친한 동료 한 두명쯤은 있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사실은..이런 이런 이유였다더라’는 후문이 따르는 법이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엔 그런 해설이 따라오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와도 몇 년 전에 밥을 한번 먹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책이 나온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명으로 출판되어서 아직도 내가 책을 펴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라 그녀의 메일은 참 의외였다. 당시 나의 회사생활은 그리 편치 않았다.
물론 겉으로야 문제될 것은 없었다. 연구원 2년차 스케줄에 맞춰 졸업작품을 출간하고 생각지도 않게 복직하던 그 해에 바로 승진을 했다. 펴낸 책의 영향과 여러 행운이 겹쳐 나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보직을 찾기도 했으니 어찌보면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한 독자에게서 받은 편지는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고 그 상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생활전반에 지독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열심히 사는 건 좋은데, 그게 뭐?
스스로는 기쁜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기쁘게 할 수 있니?
오히려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니니?
그렇다면 아쉽더라도 최대한 몰래 티나지 않게 사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나의 기쁨으로 세상에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세상을 향해 보낼 수 있는 신호라고는 미소가 전부였다. 그것도 매우 어정쩡한 미소. 거의 말없이 밥만 먹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쑥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의 미소가 뿌리는 완강한 거부의 메시지를 그녀는 제대로 읽었던 것이다. 그때 만해도 그녀는 참으로 풋풋한 이년차 신입사원이었는데... 그녀와의 식사를 마칠 즈음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볶아대고 있었다.
한심하다, 나지선.
이 어린 아이 앞에서 꼭 이렇게 밖에 못하겠니?
가 말하는 포근하고 따뜻한 인격체란 게 이런 거니?
그녀와의 에피소드를 기억에서 완전히 밀어내 버린 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그녀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내 책을 읽었던 걸까? 그 책의 저자가 나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때 내가 그녀와의 관계에 보다 적극적이었더라면 그녀의 오늘이 달라졌을까?
질문에서 도망치는 길은 그녀의 삶뿐이었다. 2라고 쓰여진 봉투를 열었다. 노트가 한 권 들어있었다. 노트에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쓰인 글 같았다.
아빠
2019.11.4
아빠나이 마흔다섯때였다. 간암이었다. 아빠는 본인의 병을 알고 계셨다. 하지만 아빠는 혹여 군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병원에도 가지 않고 묵묵히 참고 계시다 갑자기 쓰러지셨고 그길로 바로 군생활을 접으셔야했다.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 가신 아빠에게 의사가 내린 선고는 앞으로 2개월. 아빠의 엄청난 의지와 노력으로 의사의 2개월은 11년까지 연장되었다. 하지만 그 모진 세월이란..
병든 몸으로 직장을 나오셨지만 가장으로서 아빠의 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생활력이 전혀 없으신 엄마와 철없는 남매가 그저 아빠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아픈 몸으로 수입을 늘려보시려고 임대업, 택배, 사채 등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셨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될 리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베트남에서 고추를 수입하셨다. 한참 불닭, 불갈비 등 무지 매운 먹거리들이 유행했을 때 그 타는 듯한 매운 맛을 만들어낸 주원료 베트남 고추. 그 고추를 한국에 처음 들여온 분이 우리 아빠시란다.
아빠 돌아가시고 남은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빠가 이 업계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고 계셨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빠가 고추사업을 계획하실 무렵 가족들은 너무나 냉담했다. 그동안 사업을 하신다며 집을 담보로 잡혔다 풀기를 여러 번, 그중에 한번은 경매로 집이 넘어가기도 했던지라 가족들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나 역시도 아빠가 제발 가만히 계셔주기를 바라기만 했다. 큰딸인 나에게만은 꼭 지지를 받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 아빠는 가족들 몰래 집을 잡혀 고추를 수입하시고 건조공장까지 세우셨다. 가족들은 아빠가 집담보를 풀 수 있을 만큼 자리를 잡으셨을 무렵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던지.
아빠는 손에 힘을 잃으셔서 제대로 전화기를 잡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지실 때까지도 사업에서 손을 놓지 않으셨다. 병실을 지키던 나는 그때서야 아빠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자신의 머릿속 구상이 노력을 통해 현실에서 구현되는 희열을 즐기시는 거다. 그것이 아빠를 지금껏 지탱해준 힘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병상에서도 사업을 접지 못하시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마저 못하신다면 아빠는 더 견딜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에 아빠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아빠가 일을 즐기셨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을 단순히 즐거움의 대상으로 대하시기엔 너무나 절박하셨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셨던 아빠. 그러나 치료비는 천문학적인 액수였을 것. 매달 나오는 연금은 겨우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시켜 줄 수준이었으니 아빠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편하게 나오는 연금 받으며 조용히 사시는 것이 낫지 않냐고 말씀드렸지만 그건 그냥 이대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고 조용히 죽어 가시는 게 어떠냐는 말보다 더 잔인한 말이 아니었을까. 아빠에게 일은 가장으로서의 책임이고 자존심이었을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아빠를 보내드린 지 3년이 다 되어서야 이를 깨달은 모자란 큰 딸. 앞으로 삼십년을 내리 울어도 죄송스러운 마음을 덜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2019.11.5
내 나이의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서른다섯, 삼군 사관학교 출신 육군 소령, 아홉 살짜리 딸(나), 일곱 살짜리 아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빠는 많이 배우지 못한 엄마를 창피해하셨다.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또 그럴 수 있는 가능성도 분명히 보이는데.. 그 모든 걸 오직 본인 한사람의 힘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 고단함. 엄마는 아빠랑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배우자가 아니셨다. 그 부분이 두 분 모두에게 깊은 상처였던 것 같다. 아빠는 혼자 힘으로 무리하시며 거기에서 오는 피로를 엄마에 대한 무시와 짜증으로 푸셨다. 본인의 역량에 어울리는 자랑스러운 아내를 갖지 못한 것이 최대의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빠의 이런 결핍을 썩 훌륭하게 충족시켜 드릴 수 있었다. 아빠는 공부 잘하는 딸자랑으로 아내에 대한 불만을 메우셨다.
엄마는 본인이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부분으로 무시당하며 사랑받지 못한다는 슬픔을 술로 푸셨다. 지금 와 생각하면 한해 걸러 부임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터라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마땅히 없는 엄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가족에겐 아직도 욱신욱신하는 큰 상처가 되었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은 아빠셨다. 살아 계실 때는 잘 몰랐는데 점점 '아빠가 정말 대단한 분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도 점점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기질적으로 많이 닮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돌아가시고 친척들끼리 모여 앉으면 항상 나오는 얘기. 아빠가 조금만 있는 집안에 태어나셨더라면 대통령도 하셨을 분이라고. 물론 의례적인 덕담이지만 완전히 빈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으셨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하셨는지 한편으로는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직관이라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일까?
아빠 덕분에 내 스타트 라인은 적어도 제로 위 지점이다. 아빠가 생전에 구현하려고 하셨던 부분을 이어서 이뤄내고 싶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이다.
엄마
2019.11.6
오늘은 엄마를 생각해보자.
엄마는 전라도 농가의 5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셨다. 듣기론 집안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던데 외할아버지는 왜 엄마를 학교에 못 가게 했던 걸까? 엄마는 초등학교도 가는 둥 마는 둥 다니시고 그저 동생들 뒷바라지와 농사일, 살림으로 유소년기를 다 보내셨다. 외할아버지는 자식중 엄마를 특별히 아끼셨다고 했다. 그것이 당시의 자식사랑법이었을까?
하여간 할아버지는 이름난 깡패였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마음잡았다는 준수한 외모의 목포 총각인 아빠를 사위로 욕심내셨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으나 결혼을 하면 돈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다. 아마 아빠는 군대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인프라를 절감했을 테고 그때 마침 외할아버지의 제안이 달콤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래서 엄마와 결혼했지만 외가의 형편이 나빠지면서 할아버지는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엄마는 아빠를 참 좋아하셨던 것 같다. 존경하기도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핸디캡 때문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간을 가장 의미 있는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지낸 불행한 사람. 정이 많고 따뜻한 여인.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가족이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지킬 수 있었던 토양이 되셨던 분.
그동안을 견디어 온 내공이 결코 헛되지 않고 엄마의 인생후반을 빛나게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번엔 나도 적극적으로 도와드려야지..엄마..사랑해요..힘내세요.
이렇게도 사려깊은 그녀는 도대체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네! 경찰서요? 저희 엄마가 거기 계신다고요?」
「..........」
「아이도 함께 있죠?」
엄마..왜 이래..
아빠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는데 엄마와 아이가 없다. 전화도 불통...
불안한 마음에 여기저기 찾아보다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찰나에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술에 만취해 길에 쓰러져있는 것을 경찰서에 모셔다 놓았다고..돌을 갓 넘긴 아들 녀석이 쓰러진 할머니 옆에 울면서 앉아있더란다. 기가 막힌다.
엄마..오늘 같은 날까지 꼭 그래야 하는 거야? 엄마..왜 이래..내가 뭘 잘못한거야..
엄마와 아이를 집에 두고 아빠와 집을 나서면서 설마 오늘 같은 날..하며 애써 불안한 마음을 떨쳐냈다.
아빠의 주치 병원인 아산병원에서 이젠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며 떠밀어내다시피 퇴원을 권했다. 아빠도 제발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기도 했다. 11년 전 2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군대를 떠나신 아빠는 환절기마다 병원신세를 지시면서도 거짓말처럼 항상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다. 암세포가 퍼져가는 고통과 함께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한 번도 아빠가 돌아가시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위중해도 다시 일어서 주시리라 굳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래서 단 하루도 아빠 병실을 지켜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아빠 모습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다.
병원에 들어가실 때마다 자식들이 간병하는 옆 침대 환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셨다고..엄마가 말씀하셨지만 싫었다. 엄마가 그것도 안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내가 이번엔 벌써 한 달째 아빠 곁을 지키고 있다. 물론 육아휴직중이라 가능하기도 했지만 왠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빠는 이런 딸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계실까?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시는 아빠의 손을 잡고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아빠, 여기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이제 그만 편안한 곳으로 가셔도 돼요.」
살아 계셔달라고 하기엔 아빠의 삶은 일초일초가 고통이셨다. 하지만 그게 그의 고통을 먹고 자란 딸인 내가 해야 할 말이었을까?
오늘은 집에 오신지 사흘째. 기분이 훨씬 나아지셨다며 음식이 안 받으니 기운을 차리려면 링거라도 맞아야겠다며 집 앞 병원에 가자고 하셔서 모시고 나갔다. 그런데 엄마는 그 틈에 아이까지 업고 집을 나섰다가 길에서 쓰러지신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중환자실이 아니면 어떤 처치도 할 수 없다며 진료를 거부했다. '중환자실은 싫다'는 아빠와 의사가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을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제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아산병원 의사의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어떤 말보다 더 확실한 메시지가 전해진 셈이다. 집을 나설 때만해도 다시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오는 길에 의료기기상에서 지지대를 사오자셨는데...
집으로 오는 차안..아빠가 애써 외면하던 죽음을 힘겹게 받아내는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나는 참 너무나 괴로웠다. 그런데 엄마가 없다.
「엄마 어디 있냐?」
「뭐 사러가셨겠지」
「그래」
아빠가 모르실 리가 없다. 경찰의 말투로 보아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했으니...동생과 내가 집을 비운 몇 년 동안 아빠는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처리하셨을 것이다. 엄마를 모시고 와 옥탑방에 가둬두고 아빠의 상태를 살피러 안방에 들어갔을 때 아빠가 가만히 나를 부르셨다.
「소연아..엄마한테 잘 해라..그리고 꼭 전해라..미안하다고..」
이튿날 아빠는 중환자실로 들어가셨고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셨다.
부모님의 관계에 나는 철저한 방관자였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일이지 않냐고... 제발 나를 내버려둬 달라고...다 이해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알아서 하시라고...물론 아직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별로 다를 것 없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 하나 추스르기도 버거운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부터 고쳐 써야 이런 아픔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었을까?’하는 정도까지는 생각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내가 묶은 자는 아니었더라도 풀어야 하는 자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을 테니까.
다행히 엄마는 많이 좋아지셨다. 아빠의 그늘이 없어졌다는 위기감이 오히려 엄마를 강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빠가 내게 남겨주신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복원하는 거 말이다. 아직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의 가족사를 읽고 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내 울고 있었을 것이다. 한없이 받기만 했던, 그러고도 고마워할 줄 몰랐던 스스로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젠 그녀가 베풀어야 할 때가 왔음 알아차리긴 했지만 아마 그녀는 별로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철저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사는 유형의 인간으로 보인다. 그녀는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없는 캐릭터이다.
일견 외향적으로 보이나,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외부에 보이는 관심은 내면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도구를 찾기 위한 분명한 목적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니까. 누구도 이런 목적적인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관심은 여전히 쓰라린 자신의 내면만을 향할 뿐. 소중한 가족을 위해 쓸 만한 분량의 사랑도 생산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그녀는 남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상자를 받자마자 열어봤더라면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열어만 봤더라면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아픔을 나눠가졌더라면...지금쯤 그녀와 나란히 손을 마주잡고 마음을 나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인색하게 만들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나를 벌써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는 잘 모르는 물건을 의심없이 열어볼 만한 그런 사람이 이미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결벽증과 무신경함까지도 고려한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왜 자신의 죽음에 나를 개입시키려했던 걸까? 3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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