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링슈트라세

by 성이호성

"구텐탁" 침이 흐를 듯 말 듯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호태에게 승무원이 웃으면서 동그란 초콜릿을 건넸다. 더불어 승무원은 착륙 준비를 위해 의자 등받이를 제자리로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구텐탁은 오후에나 하는 말 아닌가? 지금은 거의 8시가 되어가는데 왜 그러지. 여름이라 아직 해가 안 져서 그런 건가?' 20년 전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했던 호태는 하루 시간에 따른 인사말 구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좌석 등받이를 바로 세운다.


'이 초콜릿에 있는 사람 얼굴이 누군지 알듯 하면서도 잘 모르겠네.. 오스트리아 항공이니 뭔가 오스트리아 역사와 관련된 사람이겠지? 왕인가 너무 침 흘리면서 조는 모습을 보여서 승무원에게 다시 물어보긴 좀 그런데...' 호태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비행기가 곧 착륙하려고 한다. 업무로 비행기 탈 일이 많은 호태는 비행 중 짬을 내서 잠을 자는데도 도가 텄지만, 졸다가 안내방송을 놓치고도 언제 비행기가 착륙할지 정확하게 아는 방법이 있었다.


"뚜르륵 뚜르륵 쾅" 비행기 바퀴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내려왔으니 이제 3분 안에 착륙하겠구만'

"꾹 꾹 꾸르르르..."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호태는 핸드폰에 착륙 시간을 비엔나 기준으로 저장했다. 오후 8:15 착륙.


무역회사에 10년째 근무 중인 호태는 작년부터 본인이 타는 모든 비행기에서 소요시간 기록하고 있었다. 공항 도착, 탑승수속, 항공기 이착륙 그리고 입국수속 후 짐 찾는 시간까지 모두 상세히 기록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데이터가 중요한 세상이니까', 언젠가는 유용하게 씔 수 있는 데이터, 아니 뭔가 사업 아이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희망 섞인 상상을 하면서 호태는 열심히 본인의 항공기 탑승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호태의 이번 동유럽 출장은 다소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유럽 국가들의 국방력 증진을 위한 무기 도입으로 한국의 방위산업 업체들의 진출이 늘어나, 호태가 소속된 자동차 사업부에 까지 옆 부서에서 인력 파견 요청이 들어왔다. 호테는 회사 입사 이후 담당 지역이 유럽과는 거리가 있어 이쪽으로 출장 올일이 없었는데, 러시아 때문인지 덕분인지 비엔나를 경유하게 된 것에 피곤함 속에서 작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보통 출장도 일주일을 넘어가는 일이 잘 없는데, 이번 출장은 여름휴가 기간이 맞물리면서 가족이 있는 직원들이 출장을 꺼리게 되어 호태는 한주 더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 업무를 보고 귀국하게 되었다.


소위 잘 나가는 구글, 애플, 메타 같은 외국 회사에 근무 중인 사람들이 출장에 개인 휴가를 붙여 다니는 걸 보면서 항상 부러웠던 호태는, 출장 중간에 낀 주말에 그동안 쌓아 두었던 개인 마일리지를 털어서 비엔나 항공권과 주말을 보낼 숙소만 일단 예약하고 출장을 떠났다. 급히 투입된 출장이라 업무 인수인계 및 조율할게 많아서 송도에서 며칠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하다가 왔을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 2위를 자리를 놓고 매해 선두 다툼을 하는 비엔나라는 도시는 뭐가 특별할까?' 서울 토박이인 호태는 직장 때문에 송도와 서울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상태에서 비엔나라는 도시의 살기 좋은 비결은 무엇인지 주말 동안 알아내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비행기 문을 나섰다. '엇 터미널 게이트가 아니라 계단으로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야 하네.. 여기가 제주공항도 아니고 국제공항인데..' 호태의 마음속에는 비엔나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타이틀에 부합할지 첫 발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지만, 다시 핸드폰을 꺼내 계단을 내려온 시간을 저장했다. 오후 8:23


그동안 몇 년간 미주 출장에서 쌓은 하얏트 포인트를 이번에 큰맘 먹고 파크 하얏트 비엔나에서 여름휴가 겸해서 쓰겠다는 생각으로 전부 소진했기에, 조금이라도 호텔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찾고 황급히 유럽의 우버인 볼트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비엔나의 공기는 늦은 여름의 온도 치고는 낮은 섭씨 18도. 바람이 조금 불으니 살짝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지만 호태는 새로운 곳에 왔다는 기대감에 출장 중 쌓였던 피로도 잊고 조금씩 들뜨고 있었다. 오후 8:42


호텔 도착하니 해가 이제 곧 질 것 같았다. 오후 9:05


바르샤바에서 오후 마지막 회의가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가 문을 닫고 비엔나행 항공기에 탑승했던 호태는 오스트리아항공 승무원이 준 알 수 없는 인물의 초콜릿 하나만 먹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 파크 하얏트 비엔나는 원래 은행 건물을 호텔로 바뀐 것이라 그런지 복도와 객실 모두 여느 유럽호텔들과 달리 으리으리하고 호와스럽게 느껴졌다. 체크인하는 곳에는 유난히도 히잡과 명품 가방을 하나씩 두르고 있는 중동 여성들이 많이 앉아 있었는데, 돈 많은 걸프국가 사람들이 호텔도 원래 돈냄새나는 은행이었던 곳으로 일부러 온 건가 생각하며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방에 올라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후 9:14


'48시간 남짓되는 여름휴가를 한시도 낭비할 순 없지. 비엔나에 왔으면 이곳의 명물 식당을 찾아가야지.' 호태는 작년부터 익숙해진 쳇지피티에게 질문을 남겼다. [슈니첼이 맛있고, 역사가 있고, 밤늦게까지 하고, 호텔에서 가까운 식당 추천] 4개의 카페가 추천되었는데, 호태는 이중 구글 평점이 가장 높고 호텔과도 10분 남짓 거리에 있는 Kaffee Alt Wien으로 가기로 정하고 호텔을 나섰다. 오후 9:26


비엔나 링슈트라 세 안쪽 길은 정방형이 아니라 길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었으나, 호태는 구글맵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식당에 도착했다. 오후 9:37


식당은 쳇지피티의 말대로 늦게까지 하는 집이라 그런지 바 자리에만 자리가 비어서 호태는 바석에 착석했다. 점심때 폴란드 정부 관계자와 한국 협력사와 업무 대화가 이어져 맘 편히 밥을 먹지 못해 배가 매우 고픈 상태였던 호태는 메뉴판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는 슈니첼과 굴라쉬 그리고 감자 샐러드를 주문했다. 직원이 너무 많지 않겠냐는 질문에 호태는 "이치 하베 헌거?" 기억나는 머릿속의 모든 독일어를 끌어모아 나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독일어로 하니 식당 종업원이 피식 웃으면서 이해했다면서 물을 부어주었다. "이건 수돗물인가요?" 호태가 물어보니 "비엔나 수돗물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맛있으니 안심하고 마시세요" 종업원이 너무 자신 있는 대답에 호태도 반박하지 않고 마셨다. '여긴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선진국이고 살기 좋은 도시 1,2등 하는 곳이니 수돗물은 그냥 마셔도 괜찮겠지, 서울 아리수도 그냥 마셔도 된다는데' 호태는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중얼거리며 물을 쭉 들이켰다. 오후 9:46


호태는 음식을 기다리며 내일 무엇을 할지 쳇지피티에게 또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호텔에 포인트를 많이 썼으니 호텔에서도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고 싶어, 호텔에서 할 것들도 추천을 받았다.


[비엔나 파크 하얏트의 아라니 스파는 이름처럼 금장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라니’는 헝가리어로 ‘금’을 의미합니다. 이 스파의 디자인에는 금 타일, 보석, 자개 등 고급스러운 재료가 사용되어 화려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스파의 중심에는 길이 15미터(약 49피트) 실내 수영장이 있으며, 원래 이 건물의 1915년 은행 금고 일부였습니다. 이 수영장은 금괴 모양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실제 은행 금고의 일부였던 금이 남아있습니다....]


'와 은행 금고 그것도 금으로 장식된 수영장이라니 내일 꼭 수영을 해야겠네, 체크'


쳇지피티는 동유럽의 중심 도시답게 박물관 미술관에 대한 추천을 많이 했지만, 호태에게는 이런 것들이 잘 들어오질 않았다. 곧 만으로 마흔이 된다는 생각에 요새 부쩍 신체적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된 호태는 자전거 혹은 조깅 같이 활동적인 것을 추천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호텔 주변에 5 km 정도 조깅코스 추천을 요청했다. 호텔에서 출발해 링슈트라세를 한 바퀴 돌면 5 KM가 된다고 한다. 링슈트라세가 뭔지 물어보니,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성벽이 있던 것을 철거 후 도시 계획 차원에서 건설한 원형도로이자, 주요 관광지들이 링슈트라세를 따라 분포해있다고 한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조깅이나 해야겠다' 올해 초 건강검진에서 체지방이 정상보다 높게 나오고,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던 찰나에 배가 나온 것을 깨달은 호태는 이번 짧은 여행을 기점으로 건강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 했다. 호태는 서울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여러 번 했으나, 매번 뛰러 나가기 전에 미세먼지 농도가 증가하던가, 비가 쏟아지거나, 미룰 수 있는 좋은 핑곗 거리가 생겨 주말 아침을 침대에서 보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꼭 일어나서 뛰리라 다짐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은 후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10:44


평소 잠이 많은 호태는, 지난 5일 동안 한국 본부와 업무 조율 그리고 연속된 현장에서 미팅 그리고 고객사 및 협력사와 저녁식사 일정까지 소화하느라 하루 4-5시간 남짓 잤던 호태는 배가 부르고 긴장감도 풀려서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비엔나 도시탐험은 내일로 미루자며 호텔방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오후 10:49


다음날 침대 위에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기절했던 호태는 방광이 신호를 보내서 잠에서 깼다. '아 내가 나이가 든 건가 새벽에 오줌 때문에 자꾸 깨네' 마흔을 바라보는 호태는 연초 건강검진 결과도 그렇고, 요새 부쩍 늘어난 빈뇨로 이른 아침에 깨면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미약한 요실금 증상을 보이고 있어 조금씩 걱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오전 5:25


소변을 본 후 호텔 밖 모습을 보기 위해 커튼을 열려고 하는데, 수동이 아닌 자동인지 호태는 방 이곳저곳에 있는 버튼을 눌러보다가 암막커튼 올리는 버튼을 찾았다. '비싼 호텔이라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들어와서 커튼을 내려주고 갔나 보구나' 커튼을 열리고 동이 큰 건지 이미 밝아져 있는 비엔나 시내의 광경을 보이는데, 어제저녁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큰맘 먹고 뛰어봐야겠다고 생각한 다짐은 어지 간냥 아직도 몸도 피곤하고 날도 여름 날씨라고 하기엔 써늘해서 이불 안에 조금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알람을 오전 7시로 맞추고 제대로 겉옷을 벋고 이불 안에 들어갔다.


"자면서 이불에 오줌 안 적시려면 은행 두세 개만 먹으면 돼" 호태는 본인이 잠든 건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난 건지 어릴 적 야뇨증으로 부모님을 속석일 때 할머니가 자기에게 해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행이라도 좀 챙겨 먹으면 낮아지려나?' 종종 혼잣말을 잘하는 호태는 푹신하고 따듯한 이불속에서 하얏트 침대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오전 5:31


"바라바라 밤밤 바라바라 밤밤" 7시 아침소리에 다시 깬 호태는 평소 버릇대로 일단 알람연기 버튼을 누르고 다시 누웠다. 핸드폰 기본설정대로 10분에 한 번씩 알람이 계속 울리는데, 그때마다 호태는 다시 알람연기를 눌러댔다. 여러 번 연기버튼을 누르다 호태는 번쩍 이대로 계속 자면 짧은 휴가를 망칠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 일단 일어났다. 오전 7:55


당초 한국을 떠날 때는 출장 그리고 여행 중에 2-3일에 한 번씩 뛰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예상보다 바쁘게 돌아간 출장 일정 그리고 피곤함을 이유로 일주일 내내 캐리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신발을 꺼냈다. 어쩌다 보니 몇 달 전 여러 가게에서 신어본 러닝화 중 호태 발에 가장 잘 맞는 신발의 끈을 조여 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마저, 이 러닝화는 가게 종업원이 현 세계 마라톤계의 일인자 킵초게가 비엔나에서 2시간 이내에 42.195 km를 주파했던 신발의 보급형이라고 했었지' 호태는 비엔나에서 새로운 기록을 만든 신발을 자신이 다시 러닝을 시작하는 러닝화로 신게 된 게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미국 중학교 시절 육상부에서 활약했던 호태는 직장 생활에 쪄들어 살면서 본인이 한 때 좋아하던 러닝을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태는 킵초게가 비엔나 어디서 뛰었는지 쳇지피티에 물어보려다 살짝 귀찮기도 하고, 원래 뛰고자 했던 링슈트라세에서 5KM 완주를 생각하면서 한동안 묵혀두었던 러닝화를 조여매고 호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전 8:07


그래도 오랜만에 뛰는데 그것도 새로운 도시에서 러닝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워져 있던 러닝클럽 앱을 다시 깔려고 잠시 호텔 로비로 들어와 와이파이로 앱을 다운로드하였다. 계정 비번은 예전에 쓰던 그대로 마지막 달린 기록은 출장 차 들렸던 시카고 미시간 호수를 따라 뛰었던 5KM가 조금 부족했던 4.66KM. KM당 기록은 5분 49초. '이때도 오랜만에 뛰어서 5KM도 못 뛰고 기록도 좋지 못했구만'. 호태는 생각을 뒤로하고 이제 뛰면서 무슨 노래를 들을지 골라야 했다. 평소 음악을 잘 듣지 않은데, 그냥 아무것도 틀지 않고 뛸까 생각하던 차, 러닝앱과 연동된 스포티파이 계정에 남겨있는 동생의 최신 음악 기록이 있었다. 호태는 동생 호애의 가족 계정을 빌려 쓰고 있었다.


'This is Song Sohee? 이건 뭐지. Not a Dream? 제목은 나쁘지 않은데 일단 들어보면서 뛰기 시작해야겠다' 그렇게 호태는 링슈트라세로 출발 오전 8:11


초행길에 중간중간 뛰면서 길을 보지만, 일단 링슈트라세에 들어서면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만 돌면 5 KM는 충분히 뛸 거라는 쳇지피티의 말을 믿고 호태는 조금씩 달리기 시작. 경사는 없고, 도심에 가로수는 잘 가꾸어져 있어 해가 떴어도 그늘도 지고, 무엇보다 여름 날씨치고 비엔나 기온이 20도 초반으로 유지되고 있어 호태가 다시 러닝을 시작하기 이보다 최적의 장소는 없었다. 토요일 오전이라 거리도 한산하고 호애의 음악 리스트도 특이한 창법이었지만 호태가 뛰는데 기운이 나서 일단 무한반복으로 틀고 계속 달렸다.


호태는 중간중간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신호등의 디자인이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친구랑 걷는 모습도 있고, 아이와 어른이 걷는 모습도 있고, 연인들이 걷는 것 같은 모습까지 신호등들이 매우 아기자기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은 것들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원동력이겠지'. 호태는 상쾌한 비엔나 오전 날씨 때문인지 비엔나의 모든 게 좋아 보였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지점에는 가게들이 보이는데, 호태가 어제 오스트리아 항공에서 받아먹은 초콜릿도 있었다. 호태는 보행신호를 위해 대기하면서 가게 가까이 가서 보니, 초콜릿 속 등장인물은 모차르트라고 쓰여있었다. '아 비엔나가 음악의 도시였던걸 내가 간과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 한 학기 오스트리아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와 룸메이트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음악을 좋아하는 공대생이었는데..' 호태는 밤늦게 까지 한국과 오스트리아에 다른 점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15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선선한 공기를 마시며 뛰니 뇌에 산소가 공급이 잘 되는지, 호태는 예전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고, 무거웠던 몸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호태는 링슈트라세를 뛰면서 이미 문을 열고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카페를 지나치면서 5KM 찍을 때까지 계속 달려갔다.


'4.96, 4.97, 4.98, 4.99... 그리고 5.... 아 힘들다' 호태는 목표하던 거리를 달성했다. 큰길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했던 터라 구글맵을 보고 다시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기록은 km 당 5분 48초. 오전 8:40


호태는 시청 앞 라트하우스파르크 반대편에 서있었다. 문득 비엔나 시청 건물 앞에서 인증샷이라도 하나 찍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호태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오전 내내 바람이 살랑살랑을 넘어 상당히 불었다. "뚝, 앗!" 호태 머리로 밤 같이 생긴 열매가 떨어진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게 뭐지?' 호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리도 조금 아파서 놀랄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 이 밤같이 생긴 열매가 좋은 일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왠지 모를 마음이 생겨났다.


어릴 적 새똥을 맞아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밤 같이 생긴 게 떨어져서 머리에 맞아본 적이 없어 호태는 여행의 재미난 추억이 될까 싶어, 머리에 꿀밤을 준 밤같이 생긴 이름 모를 열매를 주워 들고, 시청 앞 라트하우스파르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8:43


서울 도심에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런 도심형 공원이 더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호태는 공원을 따라 난 길을 걷는데, 어디서 많이 익숙한 모습의 나무를 발견한다. '어 이건 은행나무인가?' 여름인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호태는 더 가까이 가서 보니 부분 부분 노란색으로 나뭇잎이 바뀌기 시작한 갈라진 반원의 나뭇잎은 영락없는 은행나무였다. 은행나무는 한중일 3개국에만 남아있다고 호태는 어디서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어느 자매결연 도시에서 기증한 건 아닌가 싶어 은행나무 주변에 표지판 같은 게 없을까 둘러보았는데, 별다른 건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게 주위를 둘러보는데 은행나무 주위에는 이른 추위에 몇 떨어지지 않은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줍는 어린 여자아이와 아빠가 보였다. 여자아이의 눈이 호태와 마주치면서 방긋 웃는다. 호태도 조금 멋젖지만 같이 웃었다.


"호태~?" 여자아이의 아빠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아니 넌 "마티아스! 너 맞아?" 뛰면서 내 뇌가 다시 자극을 받아 기억력이 돌아왔는지 15년 전 한 학기 동안 내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마티아스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너무 반갑다, 안 그래도 아까 뛰면서 너는 계속 비엔나 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 딸이지, 너무 귀엽고 너 닮은 것 같은데."

"야 호태 비엔나 꼭 오겠다고 하곤 이제야 말도 없이 왔어. 허허 역시 인연은 어떻게든 이어지네"

"앗 그러게 말이야, 난 학교 졸업하고 뭐 취직하고, K 직장인으로 넘 정신없이 사느라 어릴 적 가졌던 여러 가지 꿈이나 상상 이런 건 다 묻혀두고 잊어버렸지 뭐.. 넌 뭐 해 너 원래 자동차 헤드라잇 디자인 같은 거 하고 싶다고 했잖아" 이것도 갑자기 호태 뇌 속 구석 어딘가 있던 정보가 끄집어져 나왔다.

"호태, 기억력도 좋네, 지금 나 다니는 회사에서 여러 조명 설계 관련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지. 넌 다시 미국 가서 공부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그렇게 갔었나? 페이스북 하다가 어느 순간 네가 안보이더라고"

"아 맞아 그게 사실 유학 가겠다고 하면서 GRE 시험도 보고 그랬는데, 여차저차하다 보니 유학은 그냥 안 가고 그러면서 페이스북 같은 SNS도 잠시 끊고 뭐 그러면서 인간 관계도 좀 많이 좁아지긴 했지... 특히 회사 다니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삶이 있나 싶어 허허"

"아빠 배고파"

"알았어 소피아. 호태 너 아침 먹었어? 나 소피아랑 산책 나왔다가 저기 길 건너편 카페에서 아침 먹으려고 했는데 너도 같이 먹지 않을래?"

"오 나야 좋지, 근데 내가 막 뛰고 나서 좀 땀도 나고 했는데, 식당에서 받아줄까?"

"걱정하지 마 여긴 비엔나야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 서울에서처럼 남의 시선 너무 의식하고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가는 카페에 복장 제한은 없어"

"캬 좋다 좋다 널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너무 신기하고 좋다"


호태와 마티아스 그리고 소피아는 Café Landtmann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태는 카페에서 뭘 시키면 좋을지 추천을 받고 음식을 주문하고, 마티아스는 자기와 딸이 매주 와서 먹는 걸 시켰다.


"호태 비엔나는 얼마나 길게 방문하는 건가?"

"난 동유럽에 출장을 왔는데 주말이 껴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러 비엔나를 왔어, 어젯밤에 도착해서 내일 저녁에 다시 떠날 거야. 혹시 추천해 줄만 한 게 있을까?"

"빈이 일요일에는 거의 모든 가게가 닫아서 관광객들 가는 식당 아니면 마땅히 밥 먹을 곳이 없을 듯한데, 내일 점심때 우리 집에서 밥이나 먹을까?"

"나야 너무 고맙지, 근데 와이프분한테 미리 양해라도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와이프? 아 난 결혼하진 않았고, 소피아 엄마는 일요일 점심 때는 다른 개인적으로 하는 게 있어서 나랑 소피아랑 시간 보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그렇구나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아빠 왜 영어로 이야기해요, 난 잘 못 알아듣겠어요" 세 살이 조금 넘은 소피아는 아빠가 영어로 계속 이야기하자 중간에 한마디 거들었다.


소피아가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호태는 조카들에게 하듯 뭔가 관심을 돌려야겠다 싶어서 본인이 아침에 밤같이 생긴 열매를 뛰다가 머리에 맞았다고 익살스럽고 과장되게 연기하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소피아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쑥스럽게 아빠의 품에 안기면서 조용히 피식 웃었다.


"호태 그거 마로니에에 맞았다고 하는 거야?"

"아 이거 마로니에라는 거야? 밤이랑 뭔가 비슷해 보여서 난 밤인가 했지"

"아 그게 영어로는 아마 말밤일 꺼야, 근데 마로니에라고 그냥 부르지"

"오 말밤, 마로니에, 서울에도 마로니에 공원이 있는데 어거랑 연관이 있으려나 흠..."

"네가 그러진 않겠지만, 그건 밤 같이 식용은 아니니 참고해"

"아 그렇구나 하마터면 한국에서 처럼 밤으로 구워 먹을 뻔했네 하하"

"네가 밤 말하니까 나도 생각나는데, 우리 예전에 학교 앞에서 네가 삼겹살 먹자고 해서 했던 날 고깃집 사장님이 기관지에 좋다면서 은행을 꼬치에 꽃아서 구워 먹으라고 했던 거 기억나?"

"음 그래? 우리가 삼겹살 그 아마 깡통집일 거다 거기 자주 가긴 했는데, 언제 은행꼬치를 서비스로 사장님이 주셨다고?"

"맞아 난 그때 이런 것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지, 소피아랑 주말에 라트하우스파르크 산책하며 은행나무를 보면 그때 맛보았던 은행이 생각난단 말이지"

"은행이 맛있어서? 아님 신기해서?"

"뭐 맛은 그냥 그랬는데, 내가 담배를 좀 많이 피자나 근데 사장님이 기관지에 좋다고 하고 먹으니 괜히 그날 저녁 담배를 태우는데 폐활량이 괜히 며칠 동안 더 좋아진 그런 플라세보 같은 효과라고 해야 하나 허허?"

"우리 할머니가 은행 하곤 인연이 많으셨지, 그래서 은행을 거의 만병통치약 아니 행운의 증표 같이 생각하셔, 나도 은행 어릴 때 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자주 먹었어, 서울 우리가 살던 동네에 은행나무도 많았고"

"나도 여기에 은행 열매가 떨어지면 가져가서 구워 먹어 보겠는데, 여기 은행나무는 수나무인지 열매가 없어"

"그렇구나 나도 근데 가을이 언제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지나쳐서 요새 서울에서 은행 떨어지는걸 본지 좀 된 것 같네"

"서울 돌아가면 서울은행 좀 나한테도 보내줘, 교환학생 시절 추억 좀 하고 나의 약해진 기관지도 더 살려보게 허허"

"기관지 살리는 은행이라, 그래 내가 서울 돌아가면 좀 알아보고 사든지 줍든지 구해서 꼭 보내줄게"

"그럼 내가 오늘 아침은 미리 서울은행 값으로 지불하는 셈으로 계산할게"

"앗 안 그래도 되는데"

"네가 예전에 나 빈 돌아간다고 했을 때도 삼겹살 사준 기억도 있어서, 서울 돌아가서 은행 안보 내줘도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그냥 너 친구가 좀 더 오래 담배를 피우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다면 보내달라는 거지 허허"

"아빠 나 이제 집에 갈래요"

"그래 이제 계산했으니 가자"


호태는 내일 점심때 마티아스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오전 10:30


비엔나에 와서 15년 전 친구도 다시 만나서 기쁜데, 내일 덜 심심하게 점심 약속도 잡혔으니, 이젠 호텔로 돌아가 호텔 시설들을 이용해겠다. 객실층으로 돌아오니 청소가 이미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아직 내 방은 청소를 안 해서 Do not disburb 사인을 걸어두고, 전날 밤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호텔방을 좀 더 불러볼까.


호텔키를 모으는 게 취미 같은 습관이 된 호태는 여분의 키를 먼저 본인 가방에 하나 챙겨두고 전직 은행이었던 방 인테리어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방은 으리으리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또한 길고 화장실은 운동장에 동시에 두 명이 써도 전혀 동선의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해서 혼자 온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은행 건물의 위엄을 디자인에 녹여내려고 했는지, 상당히 중후한 느낌이 나는 욕조와 실내 바닥 인테리어였다. 짐을 풀어두는 옷장 쪽에 짐을 좀 정리하다가 뭔가 플라스틱 덩어리들을 발견했다.


[비엔나 카지노] 호태는 80유로에 해당하는 카지노 칩을 방 안에서 발견했다. 이전 투숙객이 두고 간 것 같은데, 특급호텔인데 청소를 너무 대충 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건 왠지 오늘 오전에 15년 만에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 같은 좋은 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 카지노가 어디 있는지 검색을 해보았다. 구글맵으로 보니 호텔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아 그러면 오전에 수영 좀 하고 좋은 침대에서 낮잠 좀 자고 늦은 점심 후 관광지 같은 곳을 하나 찍고 카지노로 가서 이 칩들을 현금화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원래 은행 금고였던 지하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오전 10:58


수영장은 정말 무슨 금고 같은 느낌이었는데, 쳇지피티가 알려준 것 같이 금이 실제로 남아있는지 않았다. 역시 쳇지피티가 거짓말 혹은 오래된 정보를 가지고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금고 안에 있었을 금들을 떠올리면서 호태는 유유히 배형을 하면서 둥실둥실 떠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멍을 때렸다. 원래 은행 금고 안을 수영하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방에서 비엔나 카지노 칩을 발견한 것에 호태는 또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 이거 80유로로 룰렛을 잘해서 딱 2배만 만들어서 현금화해서 나와서 맛있는 저녁을 사 먹어야겠다. 아니야 비엔나 와서 내가 계속 좋은 일들이 있는 거 봐선 그보다 더 많이 벌어서 나올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돈을 많이 벌면 어제 체크할 때 중동 여자들이 매고 있던 명품 가방이라도 하나서 사가서 엄마한테 선물이나 할까?' 호태는 혼자서 물속에서 방방 거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좀 졸리기 시작해서 씻고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오전 11:42


호태는 비엔나 링슈트라세에서 토요일 오전을 마무리하고 침대에서 깊은 낮잠이 들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