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천우희, 전여빈, 한지은
이병헌 감독의 대표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영화의 신파, 흔히 씨제이 감성이라는 혹평 속에 불꽃처럼 등장한 천만 관객의 코미디 영화 <극한직업>은 그동안 CJ ENM이 <탐정> 시리즈, <궁합>, <형> 등으로 욕을 먹은 과거를 싹 다 잊게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병헌의 오랫동안 고집했던 줏대 있는 감각은 <극한직업>에서 아주 대단하게 발현됐다. 수많은 대사와 예상을 빗나가는 연기, 여기에 클리셰여서 더 웃음이 나는 연출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이런 작품을 마치고 그가 또 예상을 빗나가며 드라마로 돌아왔다.
사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이슈는 꽤나 오랫동안 있었다. 감독의 명성이나 배우진으로 방영 전부터 눈길을 끌었고 방영 직후에는 반응이 두 갈래로 갈렸다. 사실 필자도 이 작품 방영 당시 봤던 첫 반응이 '호불호 갈린다', '누구에게는 인생 작일 수도 있겠지만 안 좋아할 사람도 분명히 많다'였다. 드라마 16부작, 시간으로 하면 약 16시간,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드라마 OST 권진아 - 위로 는 주야장천 들어놓고 드라마를 보진 않았다. (챙겨볼 티비도 없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넷플릭스에 입성한 이 작품을 보는데 쓴 16시간은 감정적으로 동요되고 공감하고, 울고, 웃기에 전혀 아까운 시간이 아니었다.
줄거리
누가 자격을 주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는 나이 서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에 대해 방황하는 세 인물 임진주(천우희), 이은정(전여빈), 황현주(한지은)는 각자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드라마 작가를 희망하는 진주는 스타 작가의 보조 작가로 일하게 되지만 쉽지 않고, 미혼모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현주는 워킹맘으로서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간다. 죽은 연인의 환영을 보는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은 누구에게 의지하지 못한 채 슬픔을 감내한다. 이들의 삶에 사랑이 과연 사치일까. 이 셋에게 멜로가 있어도 될까.
어른의 탈을 쓴 미성년, 서른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안정적인 직장,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연인, 경제적인 독립과 더불어 '잘 산다'라고 보여지는 허례허식 따위의 감성까지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순간 능력치가 배로 뛰는 것도 아닌데 사회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바라는 것들이 참 많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이런 서른, 그러니까 청년들이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세 인물과 그 밖의 인물들을 통해서 마냥 슬프진 않게 보여준다.
재능과 현실의 중간에서 '그래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하며 버티기(존버)만 하기에 애매한 취준생 진주는 명품백을 사기 위해 적금을 깬다. 그리고 심지어 동생의 돼지저금통까지 훔친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일 해야 하는 보조작가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의 해피엔딩, 새드엔딩 등 '엔딩'에 의문을 가진 진주는 자신이 만드는 이야기에 대한 남다른 시각이 있었기에 스타작가와의 마찰이 잦았고 결국 잘리게 된다. 그렇게 진주는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가 드라마 공모전에 참가한다. 입상은 못했지만 여러 드라마의 연이은 히트를 치며 스타 감독으로 방송국을 활보하는 손범수(안재홍)의 마음에 든 진주의 글은 진주가 드디어 메인작가로서 일할 기회를 가져다준다.
진주의 캐릭터가 자유분방해서 그렇지 다른 드라마에서 연출했으면 마음 아픈 캐릭터가 맞다. 그래서 진주도 자신의 슬픔에 술을 먹기도 하고 엄마를 찾아가 위로를 받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다가올, 또 누군가에게 이미 지나갔을 그 아픈 청춘의 한가운데서 진주는 방황하고 때론 남에게 의지하기도 하면서 길을 찾아 나선다. 목표가 있다고 해서 그 길이 쉬운 것이 아니 듯 진주가 직면한 ‘작가’라는 길에는 험난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게 비단 진주 개인의 사생활일지언정 그 사생활 또한 진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그리고 여기 셋 중 누구보다 빠르게 엄마가 된 인물도 있다. 현주는 이십 대 초반 도망만 잘 가는 남자를 만나 대학교를 포기하고 한동안 여자가 아닌 엄마로만 살아간다. 남자는 현주와 아이를 버리고 이기적이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고 현주는 독박 육아에 지쳐가다 비로소 좋은 기회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지만 미혼모 워킹맘에겐 가능한 것들이 많지 않다. 연애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과의 사회적인 소통도 쉽지 않다. 그러나 현주는 그걸 기어코 해내는 인물이다. 자신의 직장에 최선을 다하고 아들에게도 엄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려고 노력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이라고 말을 덧붙이기엔 인간 모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집단이지 않은가. 현주는 그저 제대로 된 삶을 이제야 만나게 된 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순수하고 맑았던 현주는 그렇게 그 집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성장한다.
아픔의 크기로 따지 지면 가장 큰 슬픔을 경험한 건 아마 은정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 결국에 그 사람을 따라가려고 시도한 것 이 모두가 결단력과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는 은정이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겪어야만 했던 일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실제로 가까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가족이 아닌 경우가 더욱이 그렇다. 은정은 홍대와 결혼을 하진 않았으나 미래를 약속한 사이었고 서로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사랑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하는 평범한 연인 사이 었으나 홍대가 가진 병이 그 평범한 관계를 일방적으로 조기 마감시켜버렸다.
은정은 홍대를 간병하면서 아마 천천히 이별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홍대가 떠난 것은 준비한다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소한 일이 아니기에 은정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벽을 쌓고 홍대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은정은 카메라를 통해, 타인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고 홍대의 환영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실제 추억과 다르게 홍대는 자신을 부정하는 은정에게 소리를 지르고 목을 조르기도 한다. 사실 홍대의 환영은 백 퍼센트 은정이 만들어낸 것으로 은정에게 소리치고 달려드는 것은 홍대가 아닌 은정인 것이다. 그를 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은 비로소 은정이 자신의 행복과 현실을 자각하면서 멀어진다.
이렇게 힘겨운 상황에도 사랑은 필요하다. 어쩌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진주는 드라마와 이야기를 사랑하기에, 현주는 아들과 일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은정은 사람을 또 그 사람을 기록하는 일을 사랑하기에 이 사랑에 아픔이 동반된다. 이병헌 감독은 '사랑은 도대체 언제 해야 할까?', '언제쯤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될까?' 하는 질문에 아주 명쾌한 답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 바로 당장 사랑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진주는 일과 사랑에 선택에서 결국 행복을 선택한다. 현주 또한 돌아온 아이의 아빠와 시댁 식구들을 두고 자신의 행복을 선택한다. 그리고 은정은 행복이 있을지도 모르는 유럽으로 떠난다. 이들이 선택한 행복에 사랑이 있다. 그래서 이 셋과 마찬가지로 뭘 재고 따질 것도 없이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바로 당장!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이 가득한 드라마의 결말은 작가인 진주가 막을 내린다. 어떤 캐릭터에게는 확실한 다음 행선지를, 어떤 캐릭터에겐 애매한 결말을 내리기도 한다. 결국 이병헌 감독은 드라마 속 진주가 "이 인물은 이렇지 않을까요?, 이 둘의 관계는 그냥 이렇게 둬보죠." 하는 대사를 하게 하면서 이야기에 대한 모든 가능성들을 열어둔다. 해피엔딩을 넘어 더 큰 엔딩, 어쩌면 이 드라마를 시청한 관객이 상상하고 그려나갈 수 있는 더 큰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드라마 마지막 즈음에 진주(이 드라마의 화자이면서 연출자)는 시작에 의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작의 끝이 결코 성공과 실패가 아니다. 시작의 훌륭한 마무리는 완성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의 결말이 꼭 어떤 것의 성공과 실패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 선택이 완결되어가는 것을 목격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물론 사랑하면서 말이다.
+ 대사량이 어마어마하기도 하고 구어제가 아닌 문어체를 써서 흥행에 실패한 것 같기도 하다는 셀프평가를 이병헌감독이 내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오디오가 비지 않는다. 심지어 메인포스터이미지에 '수다 블록버스터'라는 문구까지 있다. 많은 양의 대사를 이렇게 지루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감독은 한국의 이병헌과 미국의 아론 소킨 감독밖에 없을 것이다. 장르는 매우 다르지만... 이런류의 티키타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론 소킨의 영화와 드라마를 한번 쯤 보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둘다 영화도 하고 드라마도 한다... 평행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