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생 때 소풍 갔었던 동네 산에서 본 것들을 종이에 적어 내는 조별 숙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유치원 친구들이 돌, 나무, 물 등의 단어를 적을 때 나는 솔방울, 이끼, 빗방울이 떨어질 때 강에 일었던 파란을 적어냈다. 조별로 발표를 할 때 선생님은 솔방울과 이끼, 파란은 누가 적은 것이냐 물어보셨고, 멋진 답변이라며 친구들 앞에서 박수를 쳐 주셨다. 그저 본 것을 적어내라길래 말 그대로 봤던 것을 적어냈을 뿐인데 선생님이 왜 그렇게까지 칭찬을 해줬는 지 그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은 일상속에서 흘려보내버릴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예민한 성정을 알아봐줬던 것 같다.
대학생 땐 인기 교양이었던 심리학 수업을 들었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전 수강생을 대상으로 심리테스트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전문가가 진행하는 심리테스트인 만큼 다들 기대감을 가지며 응했고, 교수님께서 각 결과를 말해주셨을 땐 대부분의 학생이 '맞다'며 결과값으로 나온 특징에 수긍했다.
"혹시 테스트 결과가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다른 사람이 있나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나는 학생들 중에서 유일하게 손을 든 사람이었고 잠시지만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수님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사실 이 테스트는 모두 가짜입니다. 지금 손 든 학생 소신있는거에요." 알고보니 교수님이 진행한 테스트는 신뢰성이 없는 가짜 테스트였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확증 편향'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는 날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소신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해 봤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는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녔다. 내가 일상에서 가지는 불편함을 말하면, 의사 선생님은 그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린 시절과 과거의 나의 경험에 대해 물어보셨다. "초등학생 때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나요?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요?" 나는 묻는 말에 상세하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 땐 이런이런 이유였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런이런 결과가 있었을 거에요."
의사 선생님은 "00씨의 특징적인 점이 하나 있어요."라고 말했다. 보통은 초등학생 시절의 일을 물어보면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선생님"혹은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라는 답변이 일반적인데 나는 그에 비해 너무나 정확하게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질문에 답변을 한다는 것이다.
"00씨는 본인 스스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근데요, 그게 문제입니다. 좀 몰라야 되거든요. 스스로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00씨" 의사 선생님의 말은 정답이었다. 나는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망각'을 거부하며 살았다. 나도 좀 그만 알고싶다.
나는 감정적이고, 고집 있고, 생각을 많이 하고, 맛있는 음식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MBTI를 좋아한다. 나는 또 어떤 모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