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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Nov 24. 2020

언어와 기억의 쓸모

#6. <기억 전달자> + <위험한 책>


  배달된 조간신문을 펼쳤다. 1면 헤드라인에는 “성소수자에 무지한 법무부”, “코로나 3차 재난지원금 공론화 여당·정부 ‘난색’ … 야권 “필요”, 서울‘10인 이상 집회’금지”……. 오늘도 차별과 다툼, 경쟁, 억압 등이 난무하는 세상 소식에 눈살을 찌푸렸다. 얼른 뒤집어서 신문의 언어를 거꾸로 읽는다. 늘 신문의 마지막 면, 광고부터 정독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칼럼, 오피니언을 꼼꼼히 살핀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니고 나와 그리 밀접한 상황이 아닌 이야기들을 읽고 느끼는 경험만으로도 내 것이 된다. 그리고 길어 올린 언어를 기억창고에 넣는다.      


 순간순간의 기억은 삶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역사가 된다. 나의 기억이 모여 개인사가 되고, 가족의 기억이 모이면 가족사가 되고, 한 민족의 기억이 공유되면 민족사, 국가의 기억들이 모여 세계사, 인류의 기억이 곧 역사를 이룬다. 그런데 기억이 통제되고 거세된 사회가 있다. 바로 <기억전달자>에 나오는 미래의 모습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모든 것을 해결해 놓은 안전한 사회다. 차별도 없고, 불평등도 없고, 고통도 없고, 슬픈 감정도 없다. 내가 선택할 것들을 정하지 못해 힘들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제공한다.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며,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이상적인 사회 시스템을 이룬 곳에서 주인공 조너선은 살고 있다.     

로이스 로리, <기억 전달자>, 비룡소

 조너선에게 열두 살은 특별하다. 사실, 이곳의 모든 아이들에게 열두 살은 중요하다. 위원회에서 그동안 관찰한 아이들의 기질과 적성, 능력을 토대로 미래의 직업이 결정해주는 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너선은 특별한 직무를 배정받는다. 기억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보유하는 사람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 이유로 조너선의 자질을 열거한다. 지능, 정직함, 용기, 지혜 그리고 ‘사물 저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기억 보유자는 영예로운 직업이었다.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면 아무런 거부 없이 온전히 받아들인다. 조너선은 자신이 배정받은 직무에 감사와 자부심, 그리고 ‘두려움’을 느낀다.   

  

  ‘기억 보유자’가 되기 위해 기억전달자를 만나고 ‘기억의 짐’들을 하나씩 경험할수록, 그동안 살면서 겪지 못한 세계에 대한 충격과 고통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차이가 빚어낸 무자비한 전쟁, 성의 억압, 동물과 자연의 훼손, 차별로 인한 갈등과 고통의 기억들을 받아들이면서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이상적인 모습이라 믿어왔던 세상이 사실은 반 이상적 사회, 디스토피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실마리는 ‘언어’와 ‘기억’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교정받는다. 유의어도 없고 은유도 없다. 오로지 ‘정확한’ 단어를 구사해야 한다. 매일 저녁 하루 동안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하면 정확한 단어로 교정받거나 완곡한 말로 순화시킨다. 매일 아침은 꿈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꿈이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언어를 공유하고 피드백하는 과정은 다름 아닌 감시와 검열, 세뇌의 반복이다.     


 이를 테면, 조너선이 처음 성욕을 느끼고 “원한다”는 느낌으로 말했을 때, 그의 부모는 그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즉시 교정하여 알려준다. “흥분”이라고. 그리고 성욕을 느낀 것이라고 대신 결정 내리며 약을 준다. 약을 먹으면, 당연히 그 비슷한 느낌도 느낄 수 없다.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모두 고정된 틀과 형식에 묶어버린다. 흥분은 감정이 일어남을 뜻하는 두루뭉술한 단어일 뿐이다. 성욕이 그리 단순한가. 순화된 말을 그대로 수용하게 되면, 생각은 단순해지고 그저 무비판적으로 사회와 동화된다. 조너선은 자신이 기억을 수용하며 얻게 된 그 경험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전쟁놀이를 하는 친구들에게 과거 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안락사를 일컫는 “임무 해제”다. 사람들은 그 실체를 모른 채 그저 다른 어떤 곳으로 보내진 다고 믿는다. 안락한 죽음, 평안한 죽음을 누구나 꿈꾼다. 하지만 여기서의 임무 해제는 안식이나 휴식이 아니다. 그저 폐기 처분된 부품 조각과 같이 처리된다. 보육사인 아버지가 영아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안락사시키는 모습에 조너선은 경악한다. 그리고 치밀하게 탈출을 결심한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서 따로 돌보았던 아기 가브리엘에게도 “임무 해제”의 위기가 닥치자, 그를 구하기 위해 미리 짜둔 계획을 포기하고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다. 추위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가브리엘에게 그의 따듯한 기억들을 나누어주며 극복해 나가는 그의 모습은 기억 수용자가 아닌 기억전달자로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존 라이트 글, 리사 에반스 그림 <위험한 책>, 천 개의 바람

 <위험한 책>이라는 그림책도 감시와 통제가 만연한 회색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소년 브릭은 어느 날 “읽지 마시오.”라고 적힌 금서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꽃을 본다. 꽃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브릭에게서 현재 상황에 대한 슬픔과 간절한 열망이 피어난다. 꽃이 왜 숨겨져야 했는지, 책은 왜 금서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강력한 규칙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무력화시킨 사회가 사람들을 다채로운 감정과 의식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색맹의 회색빛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색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중립의 색이면서, 동물의 세계에서 안전한 보호색을 뜻한다. 브릭의 선한 의지와 마음이 회색도시를 꽃이 피어나는 도시로 바꾸었듯, <기억전달자>의 조너선도 같은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나아간다.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SF소설이 그리는 미래사회가 디스토피아인 이유는 과학 기술이 이루어낸 효용과 실용이 이 사회의 욕망을 성취해 갈수록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역행한다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주장을 반영한다. 날씨와 기후를 통제하여 교통사고와 식량부족의 위험을 극복하고 사회치안문제를 해결해 간다 해도 이 모든 성취와 행복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살핀다면 인간은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조너선이 가진 ‘너머를 보는 힘’이란 다름 아닌 다양한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차이를 차별이 아닌 다양성으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과 선한 의지가 바로 언어와 기억의 쓸모다. G. 레이코프와 M.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 경험은 은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했다. 은유를 통해 감정이나 상황을 더욱 섬세하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유가 부정된 언어로 획일화되고 언어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 구성원은 주체성을 잃은 채 살아가게 된다. 만약 인간이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고통은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는 지혜를 조너선은 얻었다. 우리가 다양한 언어로 비유하고 기억을 공유해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SF소설에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마주하는 것도 과거의 비극적 기억이 왜 필요한가를 오래된 미래의 모습으로 거울처럼 비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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