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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Nov 22. 2020

편의점에서 눈여겨볼 것은 어쩌면,

#5. <편의점 가는 기분> + <백주의 결투>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를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편의점이 나온다. 편의점은 쿨하다. 투명 유리 너머로 보이는 환한 조명, 가지런히 진열된 물품, 문을 열고 들어서면 청결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에 음악이 흐른다. 유니폼을 입은 친절한 점원의 정해진 인사를 듣는다. “어서 오세요. ○○입니다.” 매장 구석에 설치된 볼록거울과 CCTV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필요한 물품을 빠르게 고르고, 바코드를 찍어 계산하면 볼일은 끝이다. 효율성, 계산성, 예측 가능성, 통제성이 작동하는 장소, 합리적 근대사회를 대표하는 곳이 편의점이다. 전상인은 <편의점 사회학>에서 한국 사회를 드러내는 창이자 을의 공간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으로 편의점을 주목한다. 소비를 자극하는 밝은 조명, 청결한 내부에 자본주의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곳, 바로 편의점이다. 

박영란, <편의점 가는 기분>

 <편의점 가는 기분>은 어느 ‘추운 겨울밤, 편의점’을 배경으로 벌어진 이야기다. 학교를 자퇴한 18세 소년이 할아버지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마주하는 세상의 모습을 잔잔하고 따듯하게 그려내고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인 ‘나’와 마주하는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 ‘나’는 미혼모의 아들이며,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올라 외조부모가 부모로 둔갑한 상태다. 할아버지는 도시개발 붐이 일고 있는 구지구에서 하던 농심 마트를 접고 신지구 원룸가에 편의점을 열었다. 할아버지를 도와 인적이 뜸한 한밤중에 편의점을 지키는 주인공, 그에겐 여자 친구가 있었다. 구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연립주택에 살고 다리도 불편하지만 섬세한 감성과 깊은 생각을 지닌 수지,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말없이 사라지고 ‘나’는 더 이상 여자 친구를 찾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배경이었다. 구지구와 신지구, 하우스푸어, 청년 주거 문제, 대기업 동네 상권 침투와 유통구조 재편, 신자유주의적 노동환경 등 사회 구조의 모순을 주인공을 둘러싼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 편의점이라는 ‘소우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음, 가난, 착취 같은 신자유주의의 암울한 그림자가 엄존한다는 사실, 이러한 양극화의 모습을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을 중의 을이라 할 수 있는 편의점 알바 누나, 편의점을 접고 다시 동네 마트를 하겠다는 할아버지의 고민에서 편의점 본사와 가맹점의 관계가 갑을 관계의 전형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편의점 밖의 사회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편의점은 ‘을’의 공간으로 변하고 사회적 약자들은 편의점으로 몰려간다. 바로 소설 속 꼬마 수지와 엄마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을 도우려는 주인공과 훅, 캣맘 아줌마의 따듯한 배려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이 지닌 무관심의 배려, 쿨한 기계적 인간관계와는 다르다. 약자들의 연대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희망의 장소, 양극화 시대 공동체 복원의 거점으로 편의점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밤의 흑점’이라 일컫는 한밤중, 그리고 추운 겨울이라는 시간적 배경도 그 따듯한 공간의 변모를 어둠 속의 빛처럼 강조한다. 구지구와 신지구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마계라는 건물은 인간의 욕망으로 불타버리지만, 편의점에서 피어난 약자들의 연대는 촛불처럼 은은하게 마음속으로 번져온다.

마누엘 마르솔, <백주의 결투>

 감당하기 힘든 거대하고도 척박한 환경에서 대립이 아닌 공존과 연대를 떠오르게 하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마누엘 마르솔의 <백주의 결투>다. 미국 서부의 개척시대, 카우보이와 인디언의 대결 구도를 콩트와 같이 유머러스하게 엮은 그림책이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활과 총을 겨누고 서로 먼저 쏘아야만 살아남는 그들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다룬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든 황당한 상황 변화에 그들의 결투는 번번이 미루어진다. 청둥오리는 갑자기 카우보이의 시야를 가리고, 선인장 같은 구름은 인디언의 눈길을 빼앗는다. 느닷없이 지나가는 고물 기관차의 소음, 갑자기 썸 타는 그들의 말이 그들의 결투를 지연시키면서 그들은 깨닫고 변화한다. 서로를 겨눈 활과 총의 위협, 대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밑의 독사나 무리 지어 달려드는 버펄로와 같은 상황에서 서로 도우며 연대하는 것임을.


 <편의점 가는 기분>에서 주인공의 변화도 같은 맥락이다. “선생님은 ‘인류’라는 말이 거대한 흐름을 뜻한다고 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은 정말 별게 없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아주 텅 빈 건 아니라고. 그게 그 흐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흐름 속을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거라고요.” 주인공은 이 말에 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 학교 밖 편의점에서 그는 세상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인간답게 사는 것, 세상이 정해놓은 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쩌면, 내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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