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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Dec 13. 2020

이름값 할 시간

#10. <푸른 늑대의 파수꾼> + <매듭을 묶으며>

한때, 인디언 식 이름 짓기가 유행이었다.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가 흥행한 뒤였다.  인디언식 이름에는 사람마다 태어난 생년월일에 따라 정해진 영혼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나의 가족에게 인디언식 이름을 붙여보면 아빠는 지혜로운 양의 기상, 엄마는 날카로운 말의 왕, 언니는 날카로운 양, 나는 욕심 많은 하늘의 죽음, 동생은 말 많은 바람의 유령이다. 나의 남편은 웅크린 하늘의 일격이고 아들은 적색 늑대가 된다. 재밌다. 묘하게 맞닿은 부분도 느껴진다. 그 이름을 따라 산다고 하니 이름이 운명을 결정짓는 셈인가.  

   

김은진, <푸른 늑대의 파수꾼>, 창비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라는 제목도 인디언식 이름으로 지어졌다. 2016년 서울, 16세 소년 오햇귀는 우연히 학교 봉사활동으로 독거노인 댁을 방문하고 현수인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같은 반 태후의 괴롭힘을 피해 숨었던 그 집 다락방에서 오래된 시계를 발견하고 같은 장소, 다른 시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2016년에서 1940년, 경성에서 만난 소녀들은 다름 아닌 현수인과 하루코였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햇귀는 맑은 노랫소리로 인기 가수를 꿈꾸던 수인의 청춘이 왜 고통으로 일그러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수인은 독립운동을 돕다 위험에 처한 아버지를 위해 일본인 관리의 식모로 오게 되고, 일본인 관리의 딸인 하루코와 마음을 나누며 명랑하게 희망을 꿈꾸고 살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수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다가온다. 일본인 위안부로 끌려갈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햇귀는 시간의 경계를 오가며 수인을 돕기 위해 노력한다.   

    

 2016년 현재의 햇귀는 태후의 빵셔틀과 괴롭힘으로 자주 늑대의 악몽을 꾸며 도망치고 싶었던 소심한 아이였다. “늑대는 어디에나 있스므니다. 도망쳐도 또 만나게 되지요. 한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치게 되므니다.” 우연한 기회로 친구가 된 일본인 유메의 말은 햇귀에게 용기를 준다. 그녀를 통해 자신의 인디언 이름을 알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눈길을 돌린 햇귀, 과거로의 시간여행으로 진정한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되어 수인의 운명을 바꾼다. 이른 아침 처음으로 비치는 햇살이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배경 속에 수많은 젊은 수인이들이 고통과 슬픔을 겪었음을 우리는 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냥 알고 있을 뿐이다. 태후가 햇귀의 아이디로 위안부 할머니의 소식에 악플을 달고 할머니의 고통을 조롱하는 모습은 실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식에 달리는 댓글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역사는 알고 있으나, 그 사안의 심각성이나 중요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비난하거나 그저 방관하는 사람들. 태후와 햇귀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를 거울처럼 비춘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끈이 아직도 매듭지어지지 않았음을 일깨우려는 듯이.

빌 마틴 주니어, 존 아캠 볼트 글/ 테드 랜드 그림,  <매듭을 묶으며>, 사계절


 <매듭을 묶으며>라는 그림책은 어둠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고 나약하게 태어난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어떻게 용기와 희망을 키우고 점점 강해지는지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전해준다. “전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만 하나요?” “그렇단다. 너는 눈앞에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태어났지.”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보는 방법은 많이 있어요.” “그렇고말고. 넌 어둠을 뚫고 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 넌 할 수 있단다. 너에겐 푸른 말의 힘이 있으니까.” 푸른 말의 힘은 아이의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처럼, 푸른, 동 터오는 아침, 봄의 기운을 아이는 느끼면서 점점 어둠의 산을 가로지른다.     


누구에게나 이름은 중요하다. 공자님도 정명론(正名論)을 주장하며 각자 이름값을 할 때 나라는 부강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각자 주어진 이름처럼 살아가려 애쓰는 시간인지 모른다. 일본인 관리의 식모가 되어 ‘하쓰’(하대하는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의미 없는 이름)라고 불리는 수인(囚人)에서 보랏빛 꽃창포처럼 아름다운 수인(秀藺)이라는 본인의 이름을 되찾은 것처럼, 햇귀가 햇귀신이라고 놀림받던 아이에서 “어둠 속에서 만난 햇살”처럼,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특별함을 갖게 된 것처럼 말이다.   

   

 <매듭을 묶으며>에서 할아버지는 말한다. “이제, 아가야……. 또 한 번 그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 수세기 끈의 매듭을 하나 더 묶어야겠다. 이 끈이 매듭으로 가득 차면, 그땐 이야기가 네 마음속에 새겨져 네 스스로 네 자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온 이야기는 무엇이든 우리 마음에 매듭을 하나 지어준다. 나를 불렀던 다양한 이름과 역할이 던진 수수께끼를 떠올리며 시계를 본다. 주문을 외운다. “Race the clock(시간과 싸워라), Race the clock….” 잠시 멈추고 과거를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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