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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Dec 27. 2020

위풍당당 아싸의 뒤끝

#14. <아Q정전> +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

아싸(아웃사이더, outsider)는 누구인가.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루저(looser), 실패자, 찌질이, B급 인생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는 동떨어진 반대 선상의 캐릭터를 지칭할 터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캐릭터들을 만나면 늘 반전 효과를 기대해왔다. 아싸의 역습은 얼마나 통쾌한가. 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가 모여 산다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 평범을 넘어서 찌질한 누군가가 영웅이 되는 인생역전! <아Q정전>의 제목은 솔직히 그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아Q라는 아무개 같은 인물이 고상한 위인들에게 어울릴만한 정전(전기)의 주인공이 된다니 말이다.     

루쉰, <아Q정전>, 창비.

아Q는 생긴 것부터 찌질하다. 나두창으로 인한 부스럼 자국이 몇 군데나 되었고, 동네 건달들에겐 구실 좋은 놀림감이 된다. 사람들에게 천한 대접을 받고, 허드렛일을 하며 겨우 살아가면서도 그에겐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자발적 아싸가 되어 사람들 모두를 얕잡아 본다. 자신이 거의 ‘완전한 사람’이라는 본인만의 ‘정신 승리법’에 근거한 것이다. 이를테면, 동네 건달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나는 벌레 같은 놈이다”라고 자기 경멸의 일인자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인자”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처한 부정적 상황은 모두 잊어버리고 ‘제 일인자’라는 말만 남겨 의기양양 만족한 승리자가 된다. 아Q는 이런 식의 이상한 묘책으로 그만의 인생 승리를 만들어간다. 강자에게 멸시당하고 약자에게는 화풀이를 하면서.     


어느 날 마을 권세가의 하녀에게 추근거린 일로 매를 맞고 마을을 떠나 성내로 들어간다. 당시 중국에 불어 닥친 신해혁명의 물결은 아Q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이 혁명당에 벌벌 떠는 모습에 자신이 혁명당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내 시들해지고 아Q는 도둑으로 몰린다. 글자를 모르는 아Q는 이유도 모른 채, 취조 문서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처형당한다. 마지막 어설픈 각성의 순간이 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Q가 만족하려던 삶은 거짓으로 점철된 기억이다. 뒷맛이 씁쓸해지면서 거짓의 대명사 피노키오가 떠오른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도 사실은 아싸 중의 아싸가 아니었을까. 그림책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에는 핵인싸가 되는 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문자도라는 전통문화를 세로가 긴 판형의 아코디언북으로 재현했다. 우리가 예로부터 미덕이라 여겼던 8가지 덕목에 대해 풍자와 반어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상이 원하는 덕목을 잘 지키고 살아간다면 원만한 사회생활이 보장될뿐더러 존경과 인기를 누리는 핵인싸가 될 수도 있다. 효제충신(孝弟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을 우리는 성인군자라 여기지 않았던가. 오늘날로 치자면 인싸 중의 핵인싸라 하겠다.      

박연철,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  사계절.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은 피노키오가 아니다. 물음표가 비처럼 내릴 때, 우산을 쓰고 나온 내기 쟁이 할아버지는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의 거짓말을 찾아내면 엄펑소니를 주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8가지 이야기는 물론 모두 거짓이다. 이야기에 걸맞은 문제적 상황을 들이밀며 진실이라 우겨댄다. 예를 들면 죽순을 먹고 싶어 병이 난 엄마를 두고 자기 배만 채우는 아들의 착한(?) 마음을 효(孝)라고 한다거나 상대방의 기분에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말하는 마음을 예(禮)라고 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피노키오의 코는 길어지고, 마침내 엄펑소니는 피노키오가 꿀꺽 삼켜버렸다며 웃어넘기는 내기 할아버지, 그는 맥거핀(트릭) 기법으로 유명한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히치콕 감독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처럼 속이는 일종의 트릭(맥거핀)으로 세상을 희롱했다. 마치 루신이 아Q정전을 통해 중국의 민낯을 드러내고 풍자한 것처럼. 그림책 속에 엄펑소니는 의뭉스럽게 남을 속이는 것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인데, 그 진의를 확인하려면 한쪽 눈을 감고 여러 각도로 종이를 비틀며 비스듬히 바라보아야 한다. 바코드처럼 표현된 왜상 기법 때문이다. 세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법도 이와 같다. 그냥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비틀어보고 다른 각도로 끊임없이 비판하며 보아야 한다.

    

아Q로 대표되는 아싸의 뒤 끝에는 씁쓸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있다. 사회를 기준으로 나를 집어넣으려 애쓰던 삶 속엔 얼마나 많은 차별과 혐오, 폭력이 있었던가. 우리가 소수의 승리자를 ‘인싸’로 규정하는 순간, 대다수의 누군가는 그 반대편의 ‘아싸’로 그 사이에 낀 ‘그럴싸’로 계층이 나뉜다. 다양한 신조어로 인간을 비교하고 구분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외롭고 불쾌해진다. 그래서 이제 마싸(mysider)가 대세다. 더 이상 핵인싸도 자발적 아싸도 원치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나의 행복, 나의 삶을 더 이상 사회를 기준으로 저울질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서점가의 에세이 베스트셀러 제목만 대충 훑어보아도 감이 온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아’,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다만 나로 살뿐’.      


비대면 시대 우리가 사수해야 할 것은 코로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와의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다. 나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마음의 거리를 확보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만한 적정 거리 유지도 필수다. “삶이 우리를 속일 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던 푸시킨의 말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운명은 인간을 데리고 놀기 좋아한다. 휘둘리는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마싸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합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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