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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Oct 02. 2022

[아티스트웨이 시즌 2]심청이 3주차

W3. 머리의 소리보다 마음의 소리를 먼저 듣는 법

당신 안의 비평가에게 이름을 붙이고 캐릭터를 설정해 보자.

- 줄리아 캐머런, 《아티스트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 비지니스북스, 2022,200쪽.



내 안의 비평가는 "두려움에 얼어붙고 멈춰 서게 하는 존재"다. 나의 까다로운 비평가에게 나는 "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잘(Jal)은 말 그대로 내가 잘나길 바라는 듯하면서 교묘하게 불가능할 정도의 높은 기준을 나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폭탄 같은 말을 퍼부으며 나를 아프게 부수는 존재다. 


이것은 믿음의 소리인가, 두려움의 소리인가?

- 줄리아 캐머런, 《아티스트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 비지니스북스, 2022,206쪽.


마음이 낙관을 향한 믿음의 소리라면, 머리는 비관을 향한 두려움의 소리다. 잘(Jal)이 이러쿵저러쿵 문제들을 지적하며 자신의 논리적인 판단을 믿으라고 강요할 때 내가 해야 할 말은 하나다." 너나 잘하세요!" 머리와 마음의 소리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진심으로 잘 되기를, 잘 살기를 바라는 다정한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으로 공감하고 이해했다고 믿으면서도 실상 내가 정말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좋은 글쓰기는 '솔직한 글쓰기'라고" (211) 나도 믿고 있다. 솔직한 글을 쓰는 진솔한 사람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게 어렵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생각보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커서 마음의 말을 받아 적기보다 앞뒤 문맥을 따져가며 하나의 완성도 있는 글을 쓰려고 애쓰는 때가 더 많은듯하다. 아티스트웨이를 처음 시작하며 3쪽을 채우는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도 완성도에 연연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냥 막 써본다. 심지어 논문도 초고는 막 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이든 마음이든 브레인스토밍을 하듯 뭐든 쏟아내어 본 후에 자꾸만 다듬고 고쳐나가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몸에 밴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고쳐나가는 중이다.


20220918_심청이 모임_W3


3주 차 심청이 모임에서의 피드백을 정리해 본다.

새벽 글쓰기가 익숙해지면서 생긴 변화에 자연스러워졌다는 것(?)과 동시에 시간과 분량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이는 곧 게으름을 피우거나 늦잠 자는 폐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걸 모두 느끼고 경험했다. 실제로 나는 자꾸만 새벽 4시 기상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가 글쓰기를 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면서도 신기한 일.          

이번 글쓰기는 '-이다'체가 아닌 평어 글쓰기를 시도해 봤다. 어느 한쪽으로 통일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에도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평어체로 쓰다 보니 어느 순간 편해지면서 초자아가 나의 어떤 부분과 대화하는 기분을 경험했다는 심청 1의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변하지 않는 나(큰 자아, 초자아?)와 짜증을 내는 나, 비관하는 나, 울컥하는 나와 대화하는 것. 그러면 어때?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잘 잤어? **,잘 들어봐! 자꾸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인정해 주는 일을 되풀이할수록 나의 모든 부분을 포용하는 마음이 생긴다. 심청 3은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는데, 생각보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적더라는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의 엄마, 선생님이 된 이후에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적어지고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 어쩌면 더더욱 다정하게 나의 이름을 불러줘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아침 글쓰기를 평어로 써본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정하다. (심청 1)  편안하다. (심청 2) 따듯하다. (심청 3) 김춘수의 시 "꽃"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아름다움인지 일깨워주는 것처럼, 스스로의 의미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어야겠다. 다정하고 따듯하게.          

나의 일탈 놀이(아티스트 데이트)는 '그네 타기'였다. 전혀 즐겁지 않아서 충격이다. 어릴 때 내가 하던 놀이 중에 소소하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던 것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것이었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즐거움은커녕 불편함과 실망감, 부끄러움이 뒤섞인 감정이 밀려오자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왜 그랬을까. 그네를 타면서 나에게 들려온 소리들은 이런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돼서 애들처럼 유치하게 웬 그네 타령? 삐걱삐걱 불안하게 울고 있는 그네의 소리는 안 들리니? 창피하다 정말. 이러다 그네 끊어지는 거 아냐? 자꾸만 삐걱대며 흔들리고 있잖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네 타는 일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다니.'           

나의 실패담에 심청 3은  내면의 어린 아티스트를 위한 사려 깊은 공간과 시간을 염두해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이미 커버린 나가 어린 나로 완벽히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어릴 때 즐거웠던 일이 반드시 어른인 나에게 즐거울 리 없다는 것과 타인의 시선에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면서 일탈 놀이도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패했지만, 큰 소득을 얻은 기분이다.          

산책은 글쓰기만큼이나 잘 지키려 애썼고, 산책을 잘 해나가고 있다. 심청 3은 '맨발' 산책의 매력에 푹 빠져서 마치 천방지축 강아지가 된 것처럼 어디서든 흙을 보면 신발을 벗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심청 3을 보며 심청 1은 나도 맨발산책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했고, 나는 종종 맨발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심청 3을 떠올릴 뿐 신발을 벗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냥 나에게는 산책이 일탈 놀이(아티스트 데이트)이기도 하다. 대부분 책상 앞이나 정해진 공간에서 대부분을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일도 귀찮은 사람이라 더더욱 나가서 산책하는 일 자체가 일탈이 된다. 산책과 일탈 놀이, 글쓰기가 따로인듯하지만 모두 연결돼있는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산책을 하며 글쓰기의 영감을 얻고,  산책의 여유 안에서 일탈 놀이를 즐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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