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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Nov 20. 2020

다름과 상상력, 공존의 거리 두기

#3. <산책을 듣는 시간> + <에이드리언 심콕스는 말이 없다>

  산책을 했다. 아무 목적지 없이 걷는 그 행위가 마음을 환기시켰다. 처음 산책을 시작한 목적은 건강 때문이었다. 불혹의 나이 마흔이 되면, 세상의 유혹에 흔들림 없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건 공자님만 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나를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가 들린다. 오디세우스처럼 내 몸이라도 줏대 있게 묶어두고 싶지만, 연약한 정신과 몸은 이리저리 휩쓸리며 닳고 있다. 어느 날 깨달았다. 내 정신과 신체의 나약함이 어느 한쪽을 원망할 것 없이 사실 하나라는 것을. 지덕체(智德體)는 삼위일체처럼 하나였는데, 내가 수수방관하는 사이 몸도 무너지고 정신도 삶의 의미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새벽에 걷기 시작했다. 하기 싫은 일은 먼저 해치우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걸었다. 새벽 공원은 조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원에 조성된 트랙을 돌고 스트레칭을 하신다. 나는 묵묵히 혼자 걷는다. 트랙을 돌며 마주치는 교차지점에, 혹은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한 그들의 산책에 귀를 기울여본다. 사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기도 하고 거친 숨소리를 고르기도 하고, 힘겨운 신음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가장 빈번하게 지속해서 들리는 소리는 호흡과 발걸음이다. 시계추가 움직이듯 일정한 속도로 각자의 호흡에 맞는 발걸음들이 타악기처럼 내 귀에 맴돌면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이 트랙이 들려주는 궤도에서 엇나가지 않을까 그들과 나, 호흡과 발자취의 균형에 대해 생각한다.

정은, <산책을 듣는 시간>, 사계절


<산책을 듣는 시간>은 음악과 같은 소설이다.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는 제목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 ‘듣는’ 것이다. 듣는 대상이 산책이라니 이상하고 야릇했다. 책을 펼치면 더욱 이상한 세계로 들어간다. 나오는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개성적이고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낸다. 주인공인 수지는 청각장애인 소녀로 자신의 장애를 특별하고 신비한 능력으로 여기며 충만한 만족감을 가진 채 살아왔다. 아빠는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엄마와 할머니, 고모와 산다. 친구 한민과 마르첼로를 만나고 이들과 소통하며 수지는 세상에 우뚝 서기 위한 길을 걸어간다.


 소설을 끝까지 읽은 후 차례를 다시 보면, 은유적 표현들이 수지가 걸어온 길의 자취로 다가온다. 수지의 어린 시절은 ‘고래의 귀지’다. 여기엔 수지의 첫 번째 소통방식인 엄마와의 자의적 수화가 나온다. 단어의 나열을 몸짓언어로 표현하는 그들의 소통방식은 고래의 귀지만큼 신비로운 예술이다. 수화라는 몸짓언어가 서로의 얼굴, 입술과 표정에 집중하며 손짓으로 엮어져 표현되는 그들의 대화는 하나의 ‘춤’이었다. 수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소통의 언어였고, 그래서 한국어와 구화를 배우는 일은 수지에게 부정적인 고통으로 다가온다. 엄마는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수화를 금하고 구화를 배우게 하는데, 금기는 반드시 깨어져야 맛이 난다. 수지는 혼잣말로 수화를 이어가며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고, 구화로는 욕 사전을 만든다. 수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씨발!’, 말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양극단을 달린다.


 수지는 특수학교에 다니며 다른 친구, 다른 세상과 만난다. 농인들이 쓰는 수화를 거부하며 구화만을 고집하는 엄마와의 갈등도 깊어지고 청각장애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수지의 별명은 뮤트걸로 불린다. 알 없는 안경처럼 헤드폰을 끼고 듣지 못하는 수지는 아웃사이더다. ‘유성우’가 우주의 혼돈 속에 춤추는 별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수지의 모습은 세상 속 차별과 편견에도 자기만의 빛을 내는 생명의 비유로 다가온다. 그 빛을 잃지 않고 제 색깔을 내도록 도와주는 인물이 한민이다. 그는 색맹이고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은 아니지만,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맹인견 마르첼로를 자신의 토템처럼 여기며 애지중지한다. 수지는 첫눈에 그와 마르첼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진다. 수지는 원치 않는 인공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자신이 좋아하던 ‘고요한’ 세상을 빼앗은 어른들을 원망한다. 일반 학교로 전학을 하였지만 적응을 못 해 그만둔 후 더욱 방황하던 수지에게 할머니의 죽음과 엄마의 가출, 계속된 시련 속에서도 수지를 버티게 해준 힘은 한민과 마르첼로와 함께 한 산책이었다. 산책을 통해 수지는 타인과의 소통과 이해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는다. 수지와 한민은 밴드를 만든다. 코스모스 사운드 트랙,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든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소우주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공명을 이루는 울림, 어쩌면 사람의 존재와 만남 모두가 어떤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트랙인지 모른다.

마시 캠벨 글/ 코리나 루이켄 그림, <에이드리언 심콕스는 말이 없다>, 다산기획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나눈다는 점에서 <에이드리언 심콕스는 말이 없다>라는 그림책을 떠올렸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아이다. 클로이는 외톨이에 가난하고 책상 정리도 제대로 못 하는 그가 말을 키울 리 없다고 거짓말이라 단정하며 비난한다. 어느 날 엄마와 산책길에서 에이드리언네 집으로 향하고, 그와 다시 만나 공을 주고받으며 노는 사이 깨닫는다. 그의 멋진 말이 곁에 있음을. 그림책 곳곳에 있지 않은 말의 존재가 사실은 있었음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산책도 그렇다. 함께 발을 맞춰 걷는 사이, 마치 공을 주고받듯, 함께하는 공간과 함께하는 시간의 주고받음은 우리의 마음을 서로에게 더 다가가도록 돕는다.


  <산책을 듣는 시간>에서 할머니는 수지에게 말했다. “어른들의 관계란 그런 거야. 사람마다 적절한 거리가 있거든. 가까워지면 결국에 멀어지지. 그런데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다가가는 어느 지점이 있어. 사람마다 그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서 유지하는 거야. 각 관계를 교통정리 하면서. 쉬운 일은 아니지. 쉽지 않아. 하지만 보람이 있지. 보람이 없기도 하지만.”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숨겨진 차원>이라는 책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거리 두기의 유형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인간에게도 동물적 본능인 ‘영토권’이 있어서 언제나 사수해야 할 공간과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숨겨진 차원’이란 인간관계 속에 자기 영역, 즉 자기만의 세계를 위한 거리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마치 그것이 없는 듯 행동하기에 수많은 갈등과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가장 먼저 떠올린 사회적 이슈는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다. 거리 두기의 범위가 지정되면서 ‘친밀한 거리 두기’는 어려워졌다.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는 우리의 감각기관이다. 대부분의 동물이 시각, 후각, 청각을 사용한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후각과 방사열 감각이 증대되고 근육과 피부의 교류, ‘촉각’이 사용될 수 있다. ‘코로나 블루’는 친밀한 거리 두기가 어려워지면서 스킨쉽과 같은 서로를 다독이는 친밀함의 부재가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산책을 나서며 거리 두기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품는다.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다가가는 어느 지점”, 마음의 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서 유지”하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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