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테이스팅 - 숨은 '식물' 찾기 시작

by 파끄 parc

팔년 전, 한 정원에서 열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또 다른 정원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 글은 그 두 정원을 지나, 결국 진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나의 첫 정원은 충남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으로, 교육생의 신분으로 나는 거기서 흙을 만지고, 식물의 이름과 얼굴을 익히고, 그들의 계절을 함께했다. 그때 내게는 없던 하나의 감수성이 생겼다. 식물에 대한 감수성이다. 그건 식물을 염려하는 마음이다. 목마를까 잎끝이 시들었는지 살피고, 춥거나 더울까 날씨를 살피고, 밟을까 발밑을 조심하는 마음이다. 그 감수성을 안고 나는 훗날 대학원에 가게 된다. 식물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겠다는 야심을 갖고서. 하지만 대학원에서 그 감수성은 조금씩 시들어갔다.


두 번째 정원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 천리포수목원에서 한해를 보낸 직후, 싱가포르의 한 바에서였다. 그곳은 진 바(gin bar)로 진을 주종으로 팔았다. 위스키바, 와인바도 아니고 진바라니. 생소했지만 이국의 정취에 취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메뉴판은 초견에는 외계어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가득했다.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코리안더(고수), 큐컴버(오이) 등. 정원의 식물 이름표에서 볼 법한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진에 들어간 보태니컬, 즉 식물의 이름이었다.


브런치1-1.png 싱가포르의 진 바 Native에서의 테이스팅 Photo by Parc


"아, 술도 정원이구나."


수많은 식물 이름들 속에서 갈피를 잡기 어려워할 때, 바텐더가 도움을 주었다. 테이스팅을 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술의 이름은 모르지만 '엘더플라워(서양딱총나무 꽃)'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이름에 무심코 끌렸다. 엘더플라워가 들어간 진을 짚었더니 바텐더가 '너 뭘 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는 내게 한 모금을 건넸고, 나는 결국 그 진으로 한 잔을 비웠다.


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투명한 진 속에 다양한 식물이 들어차 있었다. 와인이나 맥주처럼 단일한 작물이 아니라 여러 식물이 함께 만드는 경관, 그러니까 한마디로 진은 한 병의 정원이었다. 진의 복합성은 한가지 재료가 아닌 수많은 식물에서 나온다. 그날밤 나는 진의 진면목을 모두 알지는 못했지만, 진이 정원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몸으로 느꼈다. 향으로, 맛으로 느꼈다. 하룻밤 찰나의 기억이었지만, 그 발견은 긴 시간의 밑바닥에 남아 있었다.


"정원으로 돌아가자"


그로부터 팔년 후, 나는 식물에 대한 감수성을 안고 들어섰던 대학원에서 생기를 잃고 있었다. 천리포의 정원에서 식물은 몸소 겪는 소꿉친구 같은 존재였다면, 연구에서의 식물은 글자로 된 추상의 세계를 유영하는 유령이었다. 손발 끝의 촉감이고 코 끝의 향기이던 식물은, 이제 대상이고 개념이고 텍스트로 존재했다. 정원에서는 식물을 '느낌'으로서 타자를 염려하는 감수성을 길렀다면, 연구실에서는 식물을 '앎'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그 감수성을 놓쳐갔던 것 같다.


다른 존재를 돌보는 감수성을 잃어가며, 어느 순간 나는 피폐해져 있었다. 나를 돌보는 감수성마저 잃은 채로. 나를 되찾기 위해 텃밭을 시작했고, 제철채소로 요리를 했고, 그리고 진을 마시기 시작했다. 세 가지를 통해 식물을 앎이 아니라 느낌으로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텃밭의 명이나물 Photo by Parc

이중 가장 미묘하고 매력적인 행위는 혀로 식물을 다시 만나는 일, 바로 진 테이스팅이다. 진을 마신다는 것은 투명한 정원을 거니는 산책이다. 그 정원은 노간주나무가 중심을 이루고, 때로는 시트러스 계열 열매가 혀끝을 간질이고, 때로는 매콤한 계피향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밖에도 수십, 수백가지 보태니컬이 층을 이루며, 향과 첫 모금, 목넘김과 여운으로 이어지는 맛의 지형을 만든다.


하지만 식물의 결을 더듬어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텃밭에서 깨운 감각으로 진의 보태니컬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령 산나물을 채취하는 날에는 한국의 나물로 빚은 진에서 그 맛을 탐색하고, 시소를 수확해 메밀국수에 곁들이는 날에는 시소가 들어간 일본 크래프트 진을 디깅해보는 식이다. 이렇게 텃밭에서 제철의 식물을 만나고, 진이라는 또 다른 정원을 한 병씩 산책해보려 한다.


KakaoTalk_20260305_151527600_11.jpg 2026 남태령 송하텃밭 Photo by Parc


이 연재는 그렇게 시작된다. 어떤 날은 오이를, 어떤 날은 생강을, 어떤 날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 풀과 꽃의 기척을 느끼게 될 것이다. 텃밭에서 식물을 만나고 그 감각으로 진을 맛보며, 나는 한 병의 진 속에 숨은 식물을 만나는 보물찾기를 해보려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글들은 술을 평가하는 기록이라기보다, 향과 맛으로 다양한 식물들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풍경화에 가깝다. 한달에 한번쯤, 이 작은 정원을 함께 거닐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