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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깃 Apr 22. 2024

그날의 날씨

선거일이자 휴일이었던 날, 새벽부터 집을 나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사전투표가 활성화되고 나서는 투표는 미리 하고 본투표 일에는 놀러 가는 게 루틴이 된 것 같다. 첫 일정으로 베르크 로스터스에서 커피를 한잔하기로 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베르크 앞까지 걸어가던 길에 큰언니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아빠가 안 좋으시다고. 부산에서 저녁까지 먹고 올라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12시에 출발하는 광명행 열차를 급히 예약했다.


아빠는 처음 뇌졸중이 왔던 7년쯤 전부터 요양병원에 있었다. 팬데믹 때문에 방문이 제한된 기간을 합하더라도 병석에 있는 아빠를 보러 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눈치 없고 개념 없고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이라는 핑계로, 그저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몇 번 찾아보지도 않았다. 아빠와의 사이가 크게 좋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아빠를 좋아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빠를 보는 것이 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순전히 내 자격지심 때문이다.


나는 딸 셋 중 막내, 심지어 늦둥이다. 큰언니와는 10살, 작은언니와는 7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나는 ‘막내딸'이라는 단어의 격에 맞는 인간이 결코 아니다. 유아기 이후로 아빠에게 딱히 애교를 부리거나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넨 기억이 없다. 소위 딸 키우는 재미를 나에게서는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릴 적 아빠와 함께 보낸 시간은 꽤 많았다. 엄마도 맞벌이하고 언니들도 이미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나름대로들 바빴기에 아빠가 나를 데리고 다닐 때가 많았다. 대학교 교직원이었던 아빠 사무실 한쪽에서 이것저것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병원도 아빠가 데려간 적이 많았고, 주말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아빠는 나만 데려가고는 했다 (언니들은 귀찮아서 따라나서지 않기도 했다). 대전엑스포나 고구려 벽화 전이 열렸던 과천 현대미술관도 아빠와 단 둘이 다녀왔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다. 아홉 살쯤이었나.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실없는 농담을 건넨 적이 있다. 아빠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고, 그 뒤로 더욱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후로 다시는 아빠에게 어떤 농담도 하지 않았다. 만약 MBTI 검사를 한다면 둘 다 대문자 볼드체 I가 나올 것이 틀림없다.


2시 반쯤 광명역에 도착하여 택시를 잡아타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최근 보름 정도 아빠를 간병했던 엄마와 언니들, 형부들이 먼저 와 있었고, 아빠는 이미 의식이 흐릿해져 있었다. 나보다도 체중이 안 나갈 것처럼 비쩍 마른 아빠는 산소호흡기를 단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심전도와 산소포화도 등이 표시되는 모니터는 이따금 주황색 등을 반짝거리며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아빠를 알던 사람이라면 누가 알려주거나 침대에 붙은 이름표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 같은 상태가 계속되어 엄마와 작은언니, 형부만 병원에 남고 나머지는 일단 집에 가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TV를 틀고 남의 동네 출구 조사 결과를 보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이미 봤던 예능 프로의 재방송을 보면서 키득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오후 10시쯤 전화가 울렸다. 아무래도 밤을 넘기기 힘드실 것 같다고.


다시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큰 형부 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확실히 낮에 봤을 때보다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는 그저 ‘피곤하다, 이 이야기도 에세이에 써야 하나, 집에는 다녀올 수 있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다. 아까보다 짧은 간격으로 울리는 모니터의 경고음이 마치 내 양심이 외치는 소리 같았다. ‘못돼 쳐먹은 것, 개념이 있니 없니, 하품이 나오니?’


자정을 넘겨 사망이 선고되고 나서도,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건가. 아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도, 영정 사진으로 앉아있는 아빠를 보면서도, 상복을 갈아입을 때도, 입관할 때도, 화장하고 분골을 할 때도 나는 멀쩡했다. 엄마는 펑펑 울고, 언니들도, 나보다 아빠를 알았던 시간이 훨씬 짧은 작은 형부도, 심지어 입관을 도와주는 장례지도사도 훌쩍이는데, 내 눈에는 조금의 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사이코패스 아닐까?”


둘째 날 저녁에 조문하러 와준 친구와 친구 남편에게 농담조로 털어놓았다. 그건 아니라고, 그저 감정을 마주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라는, 작년에 부친상을 당한 친구 남편의 말이, 나란 인간 어딘가 고장 난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은 편한 곳은 아니다. 나도 잘 모르는 어른들이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건네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하고, 매 순간 어디에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할지 난감한 시간이 이어져 슬쩍 상주 휴게실로 피신해 있기 일쑤다. 동시에 내가 모르는 아빠의 모습을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아빠와 중학교 1학년 때 짝꿍이었다는 친구분이 오셨다. 당시 친구분은 광주 시내에 사는 도시 사람 (친구분의 표현), 아빠는 비아면(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 사는 시골 사람이었단다. 한 번은 아빠가 친구분을 시골장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때 아빠 덕분에 시골장을 처음 봤다고 하셨다. 아빠가 45년생 해방둥이니까, 당시는 50년대 말이었을 것이다. 도시 촌놈에게 시골장을 보여주고 싶어 친구 손을 붙들고 장터 여기저기를 누볐을 까까머리 중학생 아빠의 모습이 참으로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순수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년이었구나….


3일째인 토요일 아침, 장례식장에서 버스를 타고 화장장으로 향했다. 장례 절차 내내 메마른 상태였던 내가 한 번이라도 울컥한 지점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날의 날씨였다. 화장장에 도착해 하관과 운구 봉송을 하고 고별 의식을 하러 이동하던 중,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도 따뜻하게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화장 절차가 끝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장지로 이동하는 길,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장례 기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고 화창했던 날씨가 남은 가족이 고생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아빠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결국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사십춘기도 아니고 이 나이에 무슨 중2병인지, 앞자리에 앉은 엄마나 옆에 앉은 큰언니가 혹시라도 눈치채는 건 너무 쪽팔리고 싫어서 애써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자는 척을 했다.


사진 속 건강했던 아빠의 모습을 볼 때도,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도, 지금보다 더 철없던 시절 아빠를 속상하게 했던 일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은데, 그날의 날씨만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거린다. 장지에서 납골 예식을 하는 동안에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누구도 감정이 격해지거나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순조롭게 모든 절차가 끝난 것도 아빠의 성정이 통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아빠를 한번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한 눈치, 개념,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후회하는 것조차 나의 오만인 것 같아, 함부로 울 수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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